-
-
인생 임시 보관 중
가키야 미우 지음, 김윤경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5월
평점 :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만약, 한 번 더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내 인생을 방해하는 요소는 모조리 배제해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이제 결혼은 하지 않겠다. 물론 아이도 낳지 않을 거다.
내 인생을 살고 싶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여자의 인생도 당연히 남자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할 터이다. 나도 사실은 오타니 선수처럼 내가 원하는 외길을 똑바로 걸어가고 싶었다.
pp.12~13
"대체 누가 비웃는다고 그러셔? 영양 밸런스가 만점인데."
"그런 도시락이 어딨어? 비상식이야."
"이걸로 충분하다니까. 남의 시선 따위 아무려면 어때!"
"오늘 마사미, 뭔가 멋있는데." 하고 오빠가 말했다.
"그렇잖아, 오빠. 남들이 뭘 해줄 건데? 남의 뒷말이나 하면서 즐거워하는 타인들, 평생 상대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 사람들하고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더 좋아."
그런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알았더라면 인생이 얼마나 편했을까.
p.65
옛날부터 여자는 이과나 수학 과목 못한다고 근거 없이 단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뒤집어 말해서, 남자가 이과 과목이나 수학을 못하면 쪽팔리는 일이라고 각인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 교사도 '남자다움'이라는 주술에 갇힌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거라고 생각하니, 당시의 내가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p.160
"뭐였던 걸까......"
정말로 뭐였던 걸까, 내 인생은.
뭘 위해 열심히 애써왔던 걸까.
p.347
실패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 같은 인간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까지 비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예방선을 쳐둔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원래와 똑같은 상황일 뿐이라고 나 자신에게 수없이 일러둔다.
사회 풍조에 대한 분노는 물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거듭되는 자신감 상실이 습성이 되어서 평생 사소한 일에도 걱정이 앞서는 데다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태도가 여자의 몸과 마음에 깊이 배어든다.
그런 연쇄를 끊어내고 싶었다.
p.362
"기타조노는 어떤 인생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글쎄,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면......"
"나는 말이야, 매일 설레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성공한 거라고 생각해."
"매일이라니, 그건 불가능하지."
"그럼 바꿔 말할게. 평생 살면서 설레는 횟수가 많은 사람이 성공!"
"그건 사람마다 다른 거 아닐까?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잖아."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하지만 나는 달라. 죽을 때까지 설레며 살고 싶어."
pp.430~431
가키야 미우, <인생 임시 보관 중> 中
+) 이 소설은 일본의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만다라 차트'를 따라 그리던 63세 '기타노조'가 만다라 차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63세 주부였던 그녀는 탄탄한 인생 설계로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았어야 한다고 종종 생각한다. 그때 완벽한 인생 설계를 해온 오타니 쇼헤이의 삶이 눈에 들어왔고, 본인도 그런 삶을 꿈꾼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의 말을 비웃는다. 남편과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고 속상하던 그녀는 우연히 만다라 차트를 그리다가 중학생이었던 과거 시절로 돌아가는 경험을 한다.
그곳에서의 삶을 제2의 인생으로 여기고 남녀 차별에 맞서 자기 삶을 꾸려가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제약이 많았던 그 시절을 극복하기 위해 기타노조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뿌리 깊이 박힌 사회적 고정관념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다. 현실적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같은 시절로 타임 슬립해 돌아온 '아마가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제2의 인생을 공유한다.
이 책은 남녀 차별의 모습을, 정확히는 여성이 차별받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차별의 모습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방 출신이기에 받는 차별적 시선, 학벌에 의한 무의식적 차별, 나이 차와 경력에 의한 무시, 한 집안의 가장으로 헌신하는 걸 당연히 여기는 고정관념, 어떤 집안과 결혼했느냐에 따라 생기는 편견 등도 담겨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타노조와 아마가세는 그들 각자가 짊어진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애쓰고, 작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수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에 맞서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과거의 어느 한 때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를 상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든 언제든 각자 맡은 역할에 자기만의 고충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혹시 다시 현재로 돌아간다면 제1 혹은 제2의 삶이 아닌 제3의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닐지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