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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하루키 - 그만큼 네가 좋아 ㅣ 아무튼 시리즈 26
이지수 지음 / 제철소 / 2020년 1월
평점 :
"이 구역의 하루키스트는 나라고 외칠 자신은 죽어도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달랑 하루 만에 기획서와 에세이 두 꼭지가 뚝딱" 써졌다고 작가는 말했지만,
어느 누가 이보다 더 하루키를 잘 쓸 수 있을까?
이지수 작가는
하루키 때문에 히라가나도 모른 채 일문과에 진학하고,
하루키 때문에 "와타나베가 탔던 보잉 747에 몸을 싣고",
하루키 때문에 어느날 불현듯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원서를 들고 송정역 맥도날드로 향해,
하루키 때문에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번역가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다.
"나의 이삼십대는 하루키의 문장에서 출발하여 예상치 못한 경로를 거쳐 예기치 못한 변화를 겪은 후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그렇다면 그 문장으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갔다가 유턴했던 송정역 맥도날드 2층이 내 인생의 반환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우연히 하루키 덕후의 길로 들어서게 된 십대부터 일본 유학 시절, "연애니 청춘이니 하는 푸릇푸릇한 단어"로부터 멀어져, "더럽게 고생스럽고 피눈물 나게 힘든" 육아 현실에 이르기까지 평범하지만 누구와도 같지 않은 삶의 순간 순간 함께해 준 하루키를 절묘하게 버무려 냈다. 단맛과 짠맛이 기막히게 균형을 이룬 '단짠단짠'한 에피소드로 들어가 어김없이 담백한 하루키의 문장으로 빠져나오는 솜씨에 매번 감탄하며 읽었다.
고양이를 기르고, 운동화 신은 남자를 좋아하고, 파스타를 자주 해 먹고, 우물만 보면 반가워하는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키 찬양으로 책을 채웠다면, 조금은 미심쩍어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끝으로, '나의 하루키' 혹은 '나의 청춘'에 결연히 이별을 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하루키스트'들조차도 멘붕에 빠뜨린, 어쩌면 팬들의 의리가 이뤄낸 판매라고도 할 수 있을 <기사단장 죽이기>를 한 챕터로 가져와("팬심은 무엇을 어디까지 참게 하는가") 눈감아버릴 수 없는 하루키와 팬 사이의 간극까지 솔직하게 짚어낸다. (나 역시 이 두꺼운 두 권 짜리 책을 육아 시기에 꾸역꾸역 읽어내면서 분통을 터뜨렸던 것이다! ㅠㅠ) "하루키가 이름만으로 책을 파는 작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팬이라서 어쩔 수 없이 사는 책이 아니라 너무 좋아서 안 살 수가 없는 책"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루키스트'들이라면 다 같을 것이다.
이 작은 책 안에 하루키라는 대양이 넘실거린다.
한때 그 푸른 물에 몸을 담그고 유영하며 자유가 뭔지도 모른 채 한없는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현실은 '자유'라는 단어와 급속도로 멀어져갔다. 그토록 아끼던 하루키의 산문집이나 소설을 들춰보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루키가, 아니 하루키를 읽던 그 시절이 얼마나 반짝이던 시간이었는지 새삼 떠올라 조금 슬프고 조금 설렜다. 주말에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다시 펼쳐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