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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2009년 가장 좋아하며 읽은 책은 뭔가요? 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라고 몇 번이고 말할 수 있다. 때로는 작가의 매력적인 문체, 지적인 수사, 독자가 미처 생각지 못한 반전들을 풀어내는 책들을 읽으면 반갑고 대단하다는 생각에 경외감을 느낀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휴머니즘'이 가장 좋다.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을 사랑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예술로서 탄생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속깊은 이해와 연민을 갖고 있는 작가를 꼽는다면 위화가 생각난다. 위화의 초기작 <가랑비 속의 외침>,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대할 수 있다는 <인생>, 그리고 삶의 고단함과 슬픔을 유머와 해학으로 풀어내는 <허삼관 매혈기>까지 모두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허삼관 매혈기>를 제일 먼저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히 웃으며 평등을 부르짖는 허삼관의 캐릭터를 가장 가까이에 느껴서 그런지 몰라도 이 소설만큼 내 마음을 훔친 소설은 근래 6개월 이내에 감히 없었다.
결혼을 하기 위해, 아들을 살리기 위해, 굶어가는 가족들을 위해,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피를 팔아 살아가는 고단하고 가난한 한 중년 남자, 허삼관이 있다. 그러나 그는 울거나 짜증 내거나 세상을 향해 가래침을 뱉으며 불평불만하지 않는다. 그는 피를 팔고 돼지 간볶음 한접시랑 황주 두냥이면 마냥 세상이 행복하단다. 그리고 말한다.
제가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은 땀으로 번 돈이고, 오늘 번 돈은 피 흘려 번 돈이잖아요. 피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지요. 반드시 큰일에 써야죠. _33p
지긋지긋한 가난과 삶의 무게 속에서 허삼관의 아내 허옥란은 피를 팔아 매번 고비를 넘기는 허삼관을 바라보며 안쓰럽기만 하다. 아니 이 고생이 언제 끝날 수 있을까... 깊은 한숨만 나올뿐 이다.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의 아버지 허삼관의 부성애는 따듯하고 지극하다. 특히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아 마음 고생을 시킨 일락이에 대한 허삼관의 태도는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가슴을 찡하게 울리기도 한다.
국수를 먹고 싶어 집을 나간 일락이를 찾은 허삼관은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놓고....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엽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거 아니냐."고 투덜거린다. 그러나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일락이를 업고 승리반점을 향해 걸어간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라고 물어보는 일락이를 향해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한다."그래." 이 장면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일락이를 향한 깊은 부성애는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의 모성애와도 연관된다. 부성애, 모성애 모두 하나로 통한다. 바로 '사랑'이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떠오르는 사람, 가족이든 연인이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사랑이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가난도 삶의 무게도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원천이다.
허삼관에게는 허옥란에 대한 사랑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부성애가 삶을 지탱한다. 아니 그의 삶을 더욱 멋지게 완성시킨다. 피를 판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라 삶의 현실안에서 살아가는 허삼관이라는 존재를 통해 나는 우리 현실 속의 이 시대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본다.
일락아, 오늘 네가 한 말 꼭 기억해둬라.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복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_205p
이제 예순이 된 노인 허삼관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닌 단순히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잔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피를 팔려고 찾아간다. 그러나 이제 나이 든 피는 필요없다고, 죽은 피라고 가구 칠감으로 딱 맞는다는 멸시와 모욕을 듣고 서러움이 복받친다. 나이들어 이제 내 피는 팔지도 못한다고 꺽꺽 울어대는 허삼관을 아들들은 이해 못하지만 허옥란은 이해를 하며 돼지간볶음을 사주며 같이 욕을 한다.
"그 자식 피가 돼지 피지. 그 자식 피는 칠장이도 안 쓸걸.(중략) 삼락이보다도 어린자식이 감히 그렇게 말하다니, 우리가 삼락이를 낳았을 때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자식이 말이야. 이제 와서 감히 어느 면전이라고 으스대기는..."
이 말을 들은 우리 허삼관은 마지막에도 날 웃긴다.
"그런 걸 두고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