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성별은 무엇일까? 


천사의 성별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에 내가 물어보면, 어른들은 신도 천사도 성별이 없고 따지는 의미도 없다고 이야기했다.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니까, 인간의 기준이나 상식과는 아예 상관없는 존재들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성당에 가면 신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는 가끔 상상하곤 했다. 하느님이 성별이 없는 존재라면, 어머니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아버지'라고도 '어머니'라고도 부르지 않는 게 더 공평한 것 아닌가? 


예수님은 왜 남자일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거면, 예수님은 공평하게 여성으로 태어났어야 하는게 옳지 않을까? 그런데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여성으로 태어났으면, 과연 우리가 지금 아는 예수님이 했던 일들을 다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몇 살 때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린아이도 세상을 판단하는 눈치가 있다. 


굳이 눈치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것이, 성당에 가면 미사 집전도 남성인 신부님이 하고, 수녀님들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미사 집전을 돕는 어린이들도 복사단의 남자어린이들이다. 여자어린이들은 독서나 성가대를 할 수 있었지만, 그 역할은 남자어린이도 할 수 있었다. 단지 남자어린이들은 다 복사단을 하고 싶어해서, 성가대나 전례부에는 여자어린이들이 더 많았던 것 뿐이다. 평화로운 성당 내부에서도 남녀 역할이 심하게 나뉘어있고, 사회에서는 여전히 여성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데,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인간 여성으로 태어났더라도 하느님이 주신 미션(?)을 전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나친 상상이었을까? 


성인이 되고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 학교 근처 성당에서는 여성, 남성 상관없이 청년미사에서는 복사를 할 수 있었고, 시간을 내서 성서공부도 했다. 성경에 써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사실 "신학자의 눈으로, 기록자의 눈으로 본" 이야기라는 설명도 자주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성경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내용을 읽어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당시 기득권의 눈으로 본" 기록들을 기준으로, 전통이라는 이유로, 많은 일들이 관습처럼 이어진다. 피임이나 낙태는 여전히 죄고, 동성애자들도 교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 유사이래 여성은 '거룩하게 되려고 수행하는' 남성들을 방해하는 유혹자로 취급되었고, 그런 시각은 단지 그리스도교 문화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보인다. 


여성으로서의 나는 언제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남성)을 유혹하는' 사람이거나 '아름답지 못해서 불쾌감을 주거나 아름다워서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 시각에 동참해, 중고등학생들에게 언제나 몸가짐을 조심하고 단정하게 처신하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지겨웠다. 그렇지만 단정한 학생이 되는 것에 실패했을 때에 받을 수도 있는 불이익이 너무 커서 반박하지도 못했다. 


20대-30대가 되고 여성의 몸을 도구로 보는 사회에서, 피임을 꼭 해라, 하면 안된다, 낙태를 하면 안된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 사회는 이 명령을 관철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종교의 잣대, 전통의 잣대, 윤리의 잣대, 그리고 가끔은 과학이나 통계를 가져다가 입맛대로 사용한다. 


그 이후에 중년 이후의 여성의 삶은, 특히 나의 어머니 세대나 그 이전 세대의 삶은, 대부분의 경우 본인의 에너지를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돌봄노동을 제공했으나 본인이 돌봄을 받아야할 때가 되면 가족으로부터 되돌려받는 것은 요원한 삶이 많다. 이제 나이를 먹은, 누군가 돌보아주어야 하는 그들은 이제 어떡해야하나? 


종교는 고대부터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사람들에게 윤리적 기준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법과 같은 사회적 틀을 제공하기도 하며, 기쁨과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기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실천하지는 못했더라도-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고통을 나누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왔다. 나는 예수님이 2000년 전 유다인들에게는 혁명적인 인물이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갈등을 빚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셨다. 예수님이 21세기에 등장하신다면, 현재 우리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고수하고 있는 부조리한 일들을 다 뒤엎어버릴지도 모른다. 


여전히 종교와 페미니즘의 동행은 쉽지 않지만, 교회가 역사속에서 계속 노력해왔던 것처럼, 여성의 고통과 여성이 느끼는 부조리함에 귀기울여주고 변화시켜나가려는 노력을 해나갔으면 좋겠다.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

 김동옥 지음

 현암사

 2018.10. 



이 책은 나 자신이 페미니스트이자 제도종교의 신자로서 혼란을 겪으면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쓴 글이다. 종교가 여성 억압에서 눈을 흐리는 ‘아편‘이 될 수도 있지만 진정한 자유와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세상이 제시하지 않는 통찰력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종교는 여성에게 성역할에 충실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여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족을 지켜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종교는 여성에게 가정 내 불의에 맞서 싸우라고 권고하기보다는 "불평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피해자인 ‘착한‘ 여성에게 침묵하고 희생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낙태한 여성과 낙태된 태아를 위한 기도회와 미사가 열리고 있지만 이러한 행사를 여성 신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치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예식은 불쌍한 태아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고, 낙태가 살인에 해당하는 중죄임을 재확인 시킴으로써 여성은 죄의식 속에 속죄의 시간을 갖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성애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더라도, 동성애 관련 교리를 공식적으로 수정한 것은 아니다. 또한 교황의 발언이 진보적이라고 해석되는 것은 그동안 가톨릭 교회가 그만큼 사회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고 성소수자의 고통과 인권에 둥감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수도 공동체는 이성애자를 위한 제도이기에 동성애자에게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각기 다른 역할을 선택했다. 마르타는 늘 분주하고 힘든 일을 자처하고 희생하지만 하느님을 만나기 어렵다. 주님의 집인 성당에 와서도, 피정 중에도 기도와 전례에 몰두하지 못하고 청소와 음식 만들기에 전념하는 여성은 집을 떠나도 안식을 얻지 못한다. 반면 마리아는 여성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기도 생활에 몰두한다. "당신은 남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나쁜 여성입니다" 라고 비난받지만 예수님은 마리아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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