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줄거리와는 관계없었지만 (인류의 테라포밍이 실패한 사례들이나, 사이코패스 사업가 '매니코바'로 인해서 무절제한 익스팬더블이 범죄로 취급받게 된 사연) 같은 세계관들이 줄줄이 등장하는데요,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이렇게 극의 주요한 전개와 상관없이 독립적인 구성으로 흘러가는 여러 이야기는 이 소설이 다양한 세계로 확장될 여지를 남겼습니다. 또 적당한 반전도 가지고 있는데요. 이런 반전은 극 후반부에서 가독성이 증가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다소 뻔하기는 해도, 몽환적인 주인공의 꿈이 결국 스토리의 주요한 부분과 맞닿는 이야기 방식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상상력이 자극되는 순간이 있었고, 여러모로 단행본으로 즐기기 좋은 SF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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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큰 약점도 있는 소설입니다.
첫 번째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깊이를 들 수 있겠네요. '기억과 육체를 복제해서 영생을 사는 주인공이 자신과 똑같은 복제 인간을 만난다.'라는 딜레마에 빠진 상황에서 좀 더 심오한 철학이나 질문이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소설의 어느 부분을 통해서도 이런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는 '미키7' 의 복제 인간인, '미키 8'의 존재 비중이 너무 적게 느껴지는 부분이겠네요. '미키 7'의 시점에서 주도되는 이야기의 영향도 있겠지만, '미키 8'은 거의 배고픔만 호소하다가 험한 일을 당하는 운이 안 좋지 않은 친구 정도로 묘사됩니다. 두 캐릭터 간 비중이 균형적이지 못한 점은 '두 명의 인간, 같은 자아'라는 콘셉트와 동떨어지게 느껴졌습니다. 세 번째는 결말을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는 흐름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미키 7'과 '캣' 사이에서 잠깐 흘렀던 썸은 왜 등장한 건지, 잠시 등장하는 토마토의 작황은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본인과 본인 복제품을 포함한 세 명의 성관계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작가는 여러 자잘한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어떤 친절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이 연달아 등장하고, 이 상황들이 큰 줄거리에 정체를 불러일으키는 건 심각한 문제 아닐까요? 마치 '아이유의 콘서트에 갑자기 등장한 국회의원'같은 상황이 번번이 벌어지는 거죠. 국회의원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겠지만, 관객은 아이유를 보러 왔잖아요? 결과적으로는 내가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닐까 의구심만 불러일으킨 채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작가니까, 삼부작 정도로 나왔다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저는 이 책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뼈대를 통해 무엇을 하든지 가치 있는 창작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 잘생긴 뼈대이기 때문에 뭘 바르냐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더군요. 2024년에 '로버트 패틴슨'과 '스티븐 연'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개봉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무려! 봉준호 감독이 연출을 맡게 됩니다. 제목은 '미키 17'이라고 하네요.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