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계절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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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고상 최초 3년 연속 수상'이라는 타이틀에 이끌려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작가 'NK 제이신'은 이 책을 시작으로 3부작의 '부서진 대지 시리즈'로 2016년, 2017년, 2018년 3년 연속으로 '휴고상 최우수 장편 부분'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동안, 백인과 남성에 편중돼있는 휴고상 수상작 리스트에 대한 불만이 제기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2016년 NK 제미 신이 '다섯 번째 계절'로 휴고상을 수상하자, 작품성보다는 '소수 인종 혹은 여성 우대'가 작용된 투표가 아닌가'라고 말하는 회의론자들 또한 있었습니다. 이에 작가 NK 제미신은 휴고상 수락연설에서 "아마 반대론자들이 있겠죠.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제가 이 자리에서 상을 받는 이유는 이전에 이 상을 받았던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에요. 그건 바로 제가 엄청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죠"라고 답했습니다. 



2. 좋은 이야기를 꾸미는 다양한 수식어들이 있습니다. '눈물 콧물을 쏙 빼는 감동',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가독성', '흠잡을 데 없는 문장력' 같은 표현들이 종종 사용됩니다. 하지만 제가 가끔씩 만나는 최고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다른 표현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각까지 자극하는 책'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완벽하게 짜인 세계관에, 입체적인 등장인물의 촘촘한 동선,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굴곡 넘치는 이야기는 시각적, 공각적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내다 못해 후각까지도 자극합니다.



 후각까지 자극하는 책, 이 소설에 그 표현을 사용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비 내리는 초원의 '습한 곰팡이' 내음이 납니다. 또, 외딴섬마을의 '소금기 담긴 공기'가 느껴집니다. 누덕누덕한 모피를 둘둘 감고 있을 때의 불쾌한 '퀴퀴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몰입하는 순간부터, 고요 대륙으로 빨려 들어가 오감을 모두 장악 당했습니다. 



3. 소설의 첫 몇 장 동안은 상당히 혼란스럽더군요. 로봇 부족원들로만 이루어진 마을의 추장 같은 인공적인 말투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1인칭 내레이션은, '비평가들에게만 인정받는 포스트모더니즘 SF 소설'이라는 단어를 잠시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글의 작은 줄거리에서 큰 흐름으로, 또 수동적인 관찰자 입장에서 능동적인 독자 입장으로 변화함에 따라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고전적인 어투는 점차 우아하고 중독성 있게 느껴지더군요. 옮긴이 박슬라님은 좋은 번역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거사 크리스티'의 소설과 몇 편의 장르소설에 참여하셨더군요. 번역된 다른 책들도 보관함에 담아 놓았으면 천천히 읽어 볼 생각입니다.



4. 1부는 한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612쪽의 두툼한 소설입니다. 두꺼울뿐만 아니라 서술의 밀도가 높아, 한바탕 읽고나면 머리속이 뻑뻑한 기분이 들더군요. 이야기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간의 대립을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긴장감은, 비단 가상 세계에서의 핍박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소수 계층을 향한 차별과 학살, 때때로 드러나는 집단적인 폭거는, 우리 사회 소수 인종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따돌림, 괴롭힘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가 어떤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며, 어떤 문제를 구체화시키고 싶은지 선명하게 유추할 수 있더군요. 


 서로 다른 여성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각각의 내용은 밝혀질수록 흥미로웠습니다. 결말부에서는 시점을 이용한 반전 또한 등장합니다. 이런 장점은 압도적인 이야기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린라이트가 반짝거리며 들어오는 것 같은 만족스러움이 느껴지더군요. 예, 맞습니다. 치킨맛집이 치킨무도 맛있는 집이었다는 그런 행복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5. 소설이 발간될 때마다 자동으로 책장을 채우게 되는 몇 명의 작가가 있는데요. 2020년, 제 책장은 NK 제미신의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판타지 문학의 또 다른 교과서입니다. 독자가 입문자던지, 아니면 전문가던지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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