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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엿보다 - 정재곤의 정신분석학 에세이, 2020 세종도서 교양부문
정재곤 지음 / 궁리 / 2020년 3월
평점 :
표지 그림을 보고 어머! 이 책은 뭐지? 싶었던 책이다. 에곤 쉴레의 그림이 들어간 책이라니. 에곤 쉴레는 내가 대학생 때 정말 좋아했던 화가 중 하나였다. 20대 초반, 주변 친구들이 클림트의 그림에 열광할 때 나 혼자 에곤쉴레 작품을 보면서 이게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지! 하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전공만 이수해서는 졸업 후 취업 상황이 암울하기도 했고, 먹고 살려면 뭘해야 하나 싶어서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던 탓이 아닌가 싶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불안을 내재하고 산다. 가정을 꾸린 지금은 욱해서 아이에게, 남편에게 화를 내고서는 이 수습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머리가 아프고, 층간소음 때문에 질려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고 싶은데 그랬다가 나중에 나오고 싶을 때 나올 수 없으면 어떡하지' 등등 친정 엄마말에 따르면 '불필요한 고민을 끌어안고' 불안을 연료로 삼아서 산다. 이런 나에게 심리학은 매력적인 영역이다. '나'라는 인간이 왜 그런지, 논리를 제공해주니까.
정재곤의 <나를 엿보다>는 5년 간 궁리닷컴(kungree.com)에 연재된 칼럼 40여편을 엮은 것으로, '정신분석학 에세이'이다. 오랜 기간 연재된 글이기에 그 당시의 사회상을 토대로, 관련 심리학 지식을 엮은 글로 되어 있다. 가족의 이름으로, 삶의 현장, 다문화 심리학, 이론과 실제, 세상의 변경에서 나를 마주치다 등 총 5부로 구성이 되어 있다. 다양한 분야를 다뤘다는 점, 대중을 대상으로 한 글이기에 쉽게 읽히면서, 아무데나 펼쳐서 읽어도 된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나는 이 책을 아이에게 욕조에서 한바탕 신나게 물감놀이를 시켜주는 짬짬이 읽었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된 개념 중에 '충분히 좋은 엄마' 가 있다. 코로나19로 가정보육하는 집이 늘면서 아이가 내 친자임을 확인했다는 넋두리를 종종 맘카페에서 읽곤 한다. 가르치다가 화가 나면 친자라는 거다. 친자가 아니면 절대로 화가 안난다며. 그만큼 아이 키우기는 어느 부모에게나 힘든 건데, 그 이유가 자녀가 부모에게는 일종의 '분신'이자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가장 좋은 부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자아 이상'이라고 한다.
저자는 아이에게 너무 과한 애정도 독이지만 너무 적은 애정도 독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영국의 아동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코트의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과학적이라기보다 문학적이고 묘사적인 이 개념은 자녀에게 과도한 애정을 베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과도하게 적은 애정을 나타내지도 않는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아는 엄마를 의미한다. 적당히라니! 뭐든 '적당히'가 참 어렵다. 한식이 어려운 게 엄마한테 레시피를 물어보면 항상 '적당히, 알아서, 대충' 넣어라. 라고 말해줘서인데. 외국 학자도 '적당히'라는 개념을 설파하다니. 역시 육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려운 것 같다.
또 흥미롭게 읽었던 내용이 <번아웃>이다. 번아웃(burnout)이란 질환은 주로 직장인에게서 관찰되는 질환으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다 타고 고갈됨으로써 나타나는 질환이다. 최악의 경우 생명을 태워버릴 수도 있는 질환이다. 저자는 육체적 번아웃 못지않은 심각한 문제로 정신적 번아웃을 이야기한다. 대표적인 위험군으로 주부와 어린아이들을 들고 있다.
주부들의 가사노동은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고 또 매일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반복적이고 단순한 노동에 속하는 까닭에, 육체적 번아웃 못지않게 정신적 번아웃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바깥에서 돈벌이를 위해 애쓰는 남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긍심 저하로 인해 주부들이 공허감이나 허탈감, 우울증에 시달릴 위험성은 그만큼 높은 셈이다.p.120
'자긍심 저하' 라는 단어에 매우 공감이 갔다. 집안일과 육아는 사실 가정을 지탱하는 요소 중 하나임에도 그리 대단한 일로 인정받지 못한다. 육아도 인정을 받으려면 애가 영재가 되던지, 국제중을 가던지, 과학고나 국내외 유명 대학 정도는 가줘야 '성과'로 인정받는다. 보통의 아이로 건강하고 밝게 키우는 것도 참 힘겨운 세상인데 말이다. 주부들은 어디서 자긍심을 찾아야 하는 걸까? 적어도 나의 경우는 집안일과 육아는 아닐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리는 똥손이고, 정리정돈은 엉망이며, 맥시멈리스트의 삶을 살고 있으니...육아는 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나는 아직 아이가 4살이라서 교육의 영역에는 발을 딛지 않았다.하지만 주변 엄마들이 전집을 들이고, 교구를 들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사실이다. 저자는 선행학습이 당연시 되는 우리 교육의 문제점이 아이에게 가져올 부작용을 경고한다.
학습에 관한 한 부모의 조급증은 자녀의 학습에 대한 조로증을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할 연령의 아이는 한창 인성을 다져야 할 나이이다. 이 시기에 아이가 자아 성숙보다는 학습에 지나치게 시달리게 된다면, 결국 이때 형성된 번아웃으로 인해 뒤늦게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다.p.121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금 다짐했다. 아이한테 나중에 이거 저거 막 시키고 그러지 말이야지. 초등학교 입학 까지는 인성을 다지는 시기라고 했으니 엄마랑 아빠랑 여기저기 많이 놀러다니고 재밌는 거 많이 보여줘야겠다고 말이다.
다 읽고 나서 이 책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소소한 생활 주변사의 모습을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다뤘기에 그에 관한 내 견해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저자의 서문을 끝으로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자신의 내면 풍경을 들여다보고픈 독자라면 조심스럽게 추천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길 원한다. 하지만 행복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나는 짧은 순간이나마 매일 한 차례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주변을 살필 때 행복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을 보다 잘 살필 수 있게 해주는 돋보기가 필요하고 졸보기도 필요하다. (중략) 대부분의 글들이 그때그때 불거진 소소한 생활 주변사를 소재 삼아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씌었으며, 가급적 독자 여러분이 어디서도 접해보지 못했던 신선한 시각에서 접근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앞서 강조했듯이,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세상의 모습은 단적으로 말해 필자 자신의 내면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간 나는 나 자신의 '속뜰'(법정스님)을 얼마나 가꾸어왔던가?p.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