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필기구 중에서 연필을 가장 좋아한다. 종이에 닿으면 내는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좋고, 시간이 흐를수록 짧아지는 모습도 좋다. 짧아진 만큼 내가 열심히 썼다는 증거니까. 책을 선택할 때 작가나 출판사를 보고 고르는 편인데, 이 책은 표지를 보자마자 반해서 선택했다. 작가나 출판사를 보지 않고 고른 것은 처음이다. '호두나무 작업실'이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예술 쪽에 종사하는 분이 쓰셨구나 했다. 택배가 도착해서 처음 책을 만났을 때, 무척 설렜다. 스케치화는 띠지 같은 겉표지였다. 속의 진짜 겉표지는 작가님의 작업실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부제는 '붓끝을 따라가는 화가의 하루하루'
저자인 소윤경 작가님은 경기도 양평에 있는 '호두나무 작업실'에서 일러스트를 작업하시는 작가님이다. 주로 판타지 동화를 작업하신 분이라고 한다. 죄송하게도 이 분 작업물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작품은 최근에 나온 <우주로 가는 계단>밖에 없었다. 이 책을 읽어보니 <레스토랑 Sal>은 아이들에게 반응이 좋은 것 같고, <내가 기르던 떡붕이>는 작가님의 실제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었다. 이 두 작품은 꼭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부제에 걸맞게 이 책은 화가의 하루하루를 쓴 작품이다. 글들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반려동물 '떡붕이' 이야기와 '프리랜서의 순발력' 그리고 '삽화의 말로'라는 제목의 글이다. '떡붕이'는 작가님이 대학 졸업 후 작업을 할 무렵에 만난 반려동물이었다. 양평으로 이사를 와서 집 정리를 하는 와중에 정원에 잠깐 놀라고 놓아준 사이에 없어졌고,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작가님은 첫 그림책인 <내가 기르던 떡붕이>를 작업하던 중이었다. 오랫동안 기르던 거북이가 집을 나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모험을 한 뒤에 다시 돌아오는 내용이었는데, 그 일이 실제 벌어진 것이다. 떡붕이는 며칠 뒤, 마을 골목길을 기어내려가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로는 행방이 모연하다고 했다. 떡붕이의 실종 이후 상실감으로 작업 중이던 작품을 반년간 못하셨다고 한다. 떡붕이가 거북이답게 느릿느릿 여행을 마치고, 그림책의 결말처럼 작가님 정원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프리랜서의 순발력'은 글을 대하는 작가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어서 좋았다. 한 달에 한 번 그림책에 대한 칼럼을 모 신문사에 연재하시는데, 될 수 있으면 작은 출판사에서 나온 신인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려고 하신다고 했다. 글을 쓸 때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시는 면모가 드러나서 좋았다.

칼럼의 원고 분량은 A4 용지로 한 장 미만이지만 글쓰기가 내 직업이 아닌지라 2~3일씩 끙끙대며 겨우겨우 완성한다. 혹여 글이 형편없어 그림책 작가가 쓸 수 있는 귀한 지면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수차례 소리 내서 읽어보며 마감일을 맞춘다. p.78

나의 실수로 누군가의 자리가 없어진다는 책임감은 오랜 세월 한 분야에서 일한 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삽화의 말로'는 마음이 아픈 내용이었다. 글 작가와 그림작가가 따로 있는 그림책의 경우, 글 작가가 계약 만료를 이유로 다른 출판사로 옮겨가면 그림작가의 계약도 자동 파기되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글은 출판사를 옮겨가며 다른 그림작가의 작품으로 재탄생이 가능하지만, 그림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해서 놀랐다.

동화 삽화는 아무리 좋은 그림을 그려도 그 책의 주인공이 되기 어렵다. 이미지를 확장시키고 글의 흐름에 긴장감을 더해서 상품으로서 구매력을 끌어올리지만, 하나의 작품으로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점에서 동화 삽화를 열정적으로 작업해 온 나 같은 작가들은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동화에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다. 책장을 넘기다 만나게 되는 그림이란 독자에게 얼마나 내적으로 긴밀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p.100

아이를 키우면서 그림책을 접할 기회가 많지만 사실 글 작가를 위주로 봤지, 그림작가의 존재를 생각을 잘 안 했던 것 같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책에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글자나 그림작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삽화의 존재감은 참 크다. 나도 이 책을 그림 때문에 선택했을 정도니까. 앞으로는 그림작가님들도 눈여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외에도 반려견 보리 이야기, 여행 이야기 등등이 있다. 작업실에서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하는 작가의 모습은 일종의 '화가의 상징'처럼 되어있지만 실상은 고단한 자영업자, 프리랜서의 삶이라는 내용에서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자신을 갈고닦아야만 수입이 들어오는 작가의 비애를 느낄 수 있었다.
화가의 하루를 담담하게 쓴 책이라서 읽기 좋았다. 읽으면서 마음이 차분해지는 책이다. 힐링할 만한 책을 찾는 분이라면 추천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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