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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 지혜를 찾아 138억 년을 달리는 시간 여행서 ㅣ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평점 :
저자는 서문에서 21세기 첨단을 살아가는 현대인이 오래된 고전을 펼쳐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시작한다.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그들의 지혜를 참고함으로써 오늘 내 안의 혼란을 멈추기 위해, 빛나는 고전을 남긴 위대한 스승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태어났음에도 공통적으로 우리가 다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함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잊고 있던 빛나는 질문들과 대면하게 했다. 나는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이 둘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부터 위대한 스승들을 만나볼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것이 오늘날 나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생각해볼 것이다. 그럴 때, 가려져 있던 오솔길이 드러나고 우리는 내 안의 아기 코끼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저자가 하는 이야기의 큰 틀은 알겠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세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궁금해 하는 이 명제를 저자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한다.
이 책은 채사장이란 작가가 인문학을 잘 알려준다고 추천받아 산 책이다.
19,800원의 556쪽 짜리 책이다.
2장까지 책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저자는 서문에서 3장부터 세계와 자아의 관계(공간적 구성)이 시작된다고 알려준다.
그 중 3~5장은 동양에 관한 부분이란다.
나는 고전을 즐겨 보지 않는다.
아니 거의 보지 않는다.
게다가 내게 동양의 고전은 낯선 것이 아니라 금서수준이다.
억지로 읽어 나가고 있었다.
저자는 인류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문서는 <구약>과 <베다>라고 소개한다,
그 베다가 동양의 <구약>이란 뜻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긴 마찬가지다.
"우파니샤드"가 등장한다.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조금씩 들은 풍월이 보인다.
나는 저자의 논리에 동의여부를 떠나 저자의 생각을 계속 쫓아가 보겠다.
저자의 논리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한다.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시작하는 4장 도가 : 도리와 덕성]에 들어섰다.
나는 마트가는 것을 즐긴다.
아내의 심부름으로 혼자도 잘 간다.
여성용품도 마트직원에게 문의하며 잘 산다.
그런데 마트가는 재미는 따로 있다.
시식코너를 꼭 들린다.
평상시 맵고 짜고 단건 잘 안 먹는편이다.
시식코너에서는 가리지 않는다.
새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고전은 알지 못한다.
그 쪽은 문외한인데다 관심조차 없다.
지대넓얕을 통해 고전을 조금씩 맛보게 되어 좋다.
지대넓얕, 가격이 센 것빼고는 괜찮아 보인다.
입문서로서 가치가 충분하다.
말로만 듣던 노자의 도덕경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괜찮았다.
비록 마트시식코너에서 맛 본 정도지만.
5장은 불교다.
불교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한다.
석가가 인도사람이라는 것과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정도 알고 있었다.
저자는 인류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문서는 <구약>과 <베다>라고 소개한다,
그 베다부터 동양을 설명해 온다.
그 베다에서 나온 불교의 시조 싯다르타가 베다의 전통을 깨고 나와 고행과 명상끝에 깨달음을 얻게 되고 붓다가 된다.
불교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저자는 철학의 기원이 소크라테스라고 알려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플라톤의 저서를 통해 소크라테스를 알고 있는 것이란다.
처음 알았다.
나는 고전은 멀리하고 철학은 피해다녔더니 정말 '소크라테스'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모범인 이유는 그의 삶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삶이 철학이고, 그는 철학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삶때문에 철학의 모범으로 불린단다.
560페이지의 두꺼운 책이 끝을 보인다.
[7장 기독교 교리와 신비]에 들어섰다.
7장을 읽고 저자의 박식함과 통찰력에 놀랐다.
저자의 공부에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안경을 끼고 있다.
누구는 세계관이라고도 하고 어떤이는 사상이라고도 한다.
저자의 세계관으로 해석한 기독교는 나름 의미가 있다.
저자는 범아일여라는 줄에 구슬을 꿰어 목걸이를 만든다.
범아일여의 줄에 기독교라는 구슬은 왠지 튄다
그도 기독교라는 구슬이 튀기는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다만 기독교도 나름대로 일원론을 향한 방향성의 싹이 보이는 면이 있어 목걸이에 어울어질 것이라며 마무리 한다.
물론 나도 안경을 끼고 있다.
그 안경의 색깔도 완전히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뿌였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사상을 통해 세계와 자아의 합일을 증명해왔다.
동의여부를 떠나 그의 깊이와 넓이가 부럽다.
내게는 일원론이냐, 이원론이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일원론과 이원론을 각각 제대로 무엇인지 부터 공부해야할 부분이다.
어쨌든 방향성이 다르기는 하지만, 내가 인문학공부에 더욱 매진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해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