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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0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평점 :
판매완료
청춘의 문장들 이후로 내가 가장 아끼는 우리 소설가 김연수.
이 책은 제목은 아주 임펙트가 있었는데...
이 소설과 김연수의 연관은 전혀 몰랐었다.
작가정신의 이 소설 시리즈는...
굉장히 통일되고 사랑스런 판형과 디자인 때문에 맘에 들어하는데,
그 시리즈 중 이제부턴 이 책을 가장 사랑할 것만 같다.
역시 김연수는
성석제의 재담과
김영하의 세련됨과
김연수만의 실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기대주였던 것이다.
사랑에 대한 소설은 이 소설 이후 2009년에 나올거라고 호언장담한
이 작가의 큰소리가 꼭 이루어지길 바라며..
1년 후 만나게 될 그의 또 다른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를
두근두근 기대해본다.
사람들은 사랑에 관한 소설의 대가로 마치 알랭 드 보통이
지적 미적 철학적 관점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듯 말하지만..
아니다.
누구보다 태연하고 뭉근하게
김연수가 우리 언어로 이미 사랑의 철학적 해부를 마쳐놨던 거다.
아 어떡하나.
나에겐 이제 김연수의 시대가 도래했다.
# - 너만 보면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너는 닭고기하고 여자 중에 뭐가 더 좋냐?
-당연히 여자가 좋지, 임마.
-그럼 어떻게 한 여자보다 닭고기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가냐?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 너도 소설가라고, 결혼이 미친짓인것 같니?
# 미혼남에서 유부남으로 바뀌는 과정은 달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일과 비슷하다. 유부남이 되면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중력이 여섯
배나 강해진다는 사실에 멍멍해진다. 하지만 달에서 지구로 바로
귀환할 수는 없다. 반드시 무중력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신혼여행
이 바로 그런 무중력 공간에 해당한다.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법적인 미혼녀의 육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탐닉할 수 있는 그 밀
월여행은 확실히 무중력 상태와 닮았다. 귀 안쪽에 있는 반고리관
이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감각신호들이 달라지는 현상이나
뇌의 지시를 몸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현상은 우주공간에서나
신혼여행지에서나 늘 일어나는 일이다.
# 우리는 다들 단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아가는게 아니다.
# 세상의 다른 모든 일들은 나이든 사람들이 잘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만은 모험을 겁내지 않는
젊은이들의 전공분야다.
# 세상이 변하지 않는것은 하나도 없다네.
그 사실이 얼마나 아쉬운 것인지. 그러면서도 그게 또 얼마나
마음 편하게 하는것인지.
#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
번 끝이 난 사랑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
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
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하
게 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다락같던 ‘나’에게서 벗어나 엉거주춤 관계 속에 집어넣었던 온갖
잡동사니들을 챙겨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우연히 발견한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을 펼쳐보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그렇게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구나, 슬픔이란 유행가 가사에나 나오는
얘기인 것처럼 늘 맑게 웃었구나, 참 떼도 많이 쓰고 참을성도 없
었구나 등등의 회한이 들면서 그런 자신을 아련하게 그리워하게
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
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
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
로 사랑이다.
# 왜 우리는 사랑을 '맺거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그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
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집어넣어도 그 관계는 채
워지지 않는다. 정열, 갈망, 초조, 망설임, 투정, 침착, 냉정, 이기
심, 헌신, 질투, 광기, 웃음, 상실, 환희, 눈물, 어둠, 빛, 몸, 마음,
영혼 등 그 어떤 것이든 이 깊은 관계는 삼켜버린다. 모든 게 비워
지고 두 사람에게 방향과 세기만 존재하는 힘,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원초적인 감정의 움직임만 남을 때까지 그 관
계 속으로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밀어넣는 일은 계속된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마음의 숲 속 빈터가 열리게 되면 뜨
거운 육체의 아름답고 털 없는 동물들이 뛰놀게 된다고 서양의 어
느 시인은 노래했다.
#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을 곳은 기억뿐이다.
# 질투란 숙주가 필요한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질투란 독립적인 감
정이 아니라 사랑에 딸린 감정이다. 주전선수가 아니라 후보선수
라 사랑이 갈 때까지 가서 숨을 헐떡거리면 질투가 교체선수로 투
입된다. 질투가 없다면 경기는 거기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래
서 13세기 사람 앙드레 르 샤플랭은 "질투하지 않는 자는 사랑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했다. 자신들의 사랑을 충분히 확인한 사람
들 중에는 급기야 질투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욕망을 느끼는 부류
도 있다. 그런 까닭에 처음 만난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자기보다 잘생긴 사람을 만나서 질투와 비슷한 감정
을 느끼는 경우를 위해서는 시기심이라는 단어가 준비돼 있다. 그
런 점에서 어휘력이 부족하면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곤란
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