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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강준식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약력을 보니, 저자께서 한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은 아닌 것 같다. 흔히 역사전공자와 비전공자를 가르는 확실한 기준으로 한문 사료 해독 능력을 꼽는다. 물론 현대사를 전공하는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테지만... 각종 연대기 자료와 개인 문집, 관아에서 생산된 고서, 여러 다양한 하멜일지 판본을 꼼꼼하게 대조해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규명한 것은 이 책이 가진 가장 커다란 장점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인상적이었던 것은, 하멜이 표기한 지명을 당대 전라도 사투리에 유의해 비정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서양 학자의 비정이 더 정확하다는 인상도 받았다. 아무튼 한문 독해가 상당히 난점이었을 것임에도 꼼꼼하게 사료를 수집 분석한 저자의 노력이 매우 돋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몇가지 궁금한 점이 남는다. 이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제법 심각한 것(?)까지 대략 3가지가 된다. 첫째, 하멜이 타고 가다가 난파된 스페르베르호의 크기를 비정하는 부분(30~33쪽)에서, 저자는 이덕무의 <<아정유고>>를 근거로 하였는데, 전혀 타당성이 결여된 논증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각주 19)에 인용된 이덕무의 <<아정유고>> 5권, 병지, 비왜론조에서는 아란타(아란, 홍이)의 위치, 그 나라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 종교, 그들의 큰 배와 위력적 대포에 대한 사항이 아주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스페르베로호와 이덕무의 글에 나온 아란국의 큰 배 사이에는 직접적 대응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덕무가 스페르베르호를 염두에 두고 배의 규격을 썼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반드시 스페르베르호에 대해서 그렇게 설명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둘째, 인도주의=비현실주의=체면주의라는 입장에서 조선의 외교 행정을 너무 비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서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저자는
 "하멜이 남긴 항해일지와 기타 관련 자료를 통해....우리 민족 또는 선조들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하멜이 표류했던 효종조의 시대정신은 배청숭명이다. 그 때문에 청나라의 앞선 과학 기술을 오히려 오랑캐 것이라 하여 하시했던 것이다...네덜란드는 물경 3만4천 척의 상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멜의 표류사건을 계기로 하여 조선에 일대 인식전환이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의 조선 관리들을 보면 그 생산성도 대단히 낙후되어 있었다.....그러나 당시의 지도자들은 새 문명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는 심한 거부 반응을 보이기까지 했다."
왜곡을 피하기 위해 다소 지루하게 인용했지만, 요점은 조선후기 사회의 정체성을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배청숭명의 명분에만 집착한 결과, 서구 문물을 수용해 낙후된 생산력을 개선하기는 커녕, 그를 적대시했기 때문에 발전은 어려웠다는 전제 하에, 결국 우리 후손은 이런 식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고 히딩크 식의 선진 기술을 수용하여 국가 발전을 이루어나가자는 것이다. 이럴 때 이 책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는 <<다시 읽는 조선후기사의 정체성>>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이러한 논조는 요즘 역사 대중서들의 경향과는 사뭇 다르다. 대체로 생활사, 문화사라는 옷을 입고 우리의 전 시대 사람들의 내밀한 삶의 모습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속에서 요즘 개념과는 다른 합리성, 실용성을 찾고자 시도한다. 이 책의 논조는 물론 본문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예를 들어 53쪽에서는 스페르베르호에 있던 녹비를 예폐로 전용하는 논의에 대해 반대 입장을 제시했던 승지를 "공자왈 맹자왈에 입각해서,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중시하는 체면 앞세우기의 대의명분에 기초해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173쪽에서는 조선 정부가 잔류 화란인을 송환해 줄 때 새 의복을 입혀 보내자는 식의 논의가 일었음을 재미있다고 평하고는 "이 구절에서 우리는 조선조의 인도주의 또는 체면중시 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제8장 왜나라의 개입은 하멜 문제 처리에 대해 오리발을 내미는 조선정부 VS 선진 외교전략을 쓰는 일본정부의 구도로 접근하고 있다. 표류한 외국인의 물품을 자국의 일방적 의사로 함부로 쓰는 것은 선진의 첨단을 달리는 요즘도 주저되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표류했던 외국인들을 거지꼴로 돌려 보내 쓸데 없는 외교적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는 것이 과연 체면중시 사상인지, 하멜 일행의 송환 문제는 결국 조선정부의 승리한 외교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 선명한 대립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아닌지, 좀더 생각해 볼 점은 있는 것 같다.

발전을 위해 역사를 이용하는 전략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첫째는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의 낙후된 모습을 부각시켜 이를 철저히 반성·비판해 역사 발전에 있어서의 교훈으로 활용하는 것이고, 그 반대로 둘째는 과거의 계승할만한 점을 발굴하여 그를 재해석해 발전 전략 수립에 지표로 설정하는 것이다. 저자는 아마 첫째 번 입장에 서 계신 듯 하다. 서문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전혀 일리가 없지는 않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자기 성찰 없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저자의 표현대로 “이런 식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려되는 것은, 역사 대중서에서의 이런 시각이 혹시라도 조선시대 일반에 대한 부정적 인식 형성에 공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께서 앞으로 글을 쓰실 때는 양쪽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들을 좀더 포괄해 균형 잡힌 시각을 열어 주셨으면 하는 다소 건방진 바람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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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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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읽은 몇 안되는 일본 소설이다. E. H. 카가 말했던가? 문화는 역사가의 시선을 통해 반드시 검토되어야 한다고... 리카는 한국인인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한 일본인이다. 좋은 글은 보편적 감정을 담아내고 있는 거라고 하는데, 나로서는 리카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다케오를 하나코를 통해 정리한다는 얘기. 쉽게 수인되는 얘긴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케오와 리카의 섹스. 이는 완전히 하나코를 위한 행위이자, 리카의 실연의 완성이다. 이 대목에서 난 이책이 완전히 엽기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없다.

내가 여자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가... 아무튼 이 책을 짧은 시간에 읽고 놀란 가슴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하나코의 매력이라는 것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리카가 하나코를 어떻게 해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나코에게 어떤 매력이 있을까. 내 글 읽는 분 중에 그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내게 일깨워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럴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을 해 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언제까지나 난 료코 쪽에 가깝지만 말이다. 남자의 여자 때문에 절연을 준비하는 여성 분들이 만약 있다면, 그 여자가 하나코 정도는 되겠지라고 생각해 보시라. 그러면 마음의 위안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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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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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책을 2시간에 독파했다. 원래 내 책읽기가 호흡이 길지 않고 속독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딱이다. 내용이 쉽고 문장이 간결하다. 또 한문투의 단어가 군데군데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번역도 잘 됐다.

이 책만의 주요 개념어랄까, 다른 책에서 보기 힘든 말들이 있다. '우주의 정기', '자아의 신화', '표지', '만물의 언어', '초심자의 행운' 등등이 그것이다. 또한 '연금술사'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말은 아니지만, 이 책은 상당히 신선한 방식으로 지정한다. 이 모든 단어들은 꿈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켜 나가는 자아, 그리고 그를 부액하는 우주의 힘을 설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산티아고는 이 동화의 주인공, 양치기로 나온다. 그는 시련을 이겨내고 결국에는 자아의 신화를 완성하고 한 연금술사로 화신한다. 그는 만물의 언어를 이해하고 표지를 읽어내면서 자아의 신화에 훌륭하게 접근해낸다. 황금을 찾은 것이다.

이 책은 희망적인 개념, 메시지를 산티아고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따라서 절망적 현실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 너무 희망적이라는 이류로- 거부감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 거부감의 중심엔 '마크툽' 즉 종교적 숙명론이 있다. 산티아고 이야기의 대전제는 '모든 것이 제대로 씌어져 있다.'는 것이다. 난 이제까지 이런 류의 숙명론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언제까지든 이 책은 나에겐 기분 나쁘지 않는 동화로 남아 있을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 숙명론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들은 이 책을 아주 좋아할 것이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지금 辛苦의 시점에 막 접어든 사람들이 읽어도 좋다. 그 시점의 사람들에겐 합리적 이성이 상당히 후퇴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메시지가 무리 없이 전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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