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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괴물 백과
곽재식 지음, 이강훈 그림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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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봉화 청량산 ---> 경상북도 봉화 청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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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괴물 백과
곽재식 지음, 이강훈 그림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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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모습을 최대한 문헌과 일치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물도 너무 산뜻하다.
원전에 나오는 괴물에 대한 설명도 충실하고, 지은이의 설명도 여러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를 잘 체계화한 것 같다.
여기에 반영되지 않은 신이담을 더 수집해 증보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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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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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큼 재미있는 책도 흔치 않을 것 같다. 그저 재미있다는 표현을 쓰기엔 좀 그렇고, 통쾌하고 유쾌하다고 해야 할까.

이 단편집을 횡재한 돈으로 구입해서

집으로 갖고 들어와 방바닥에 배를 탁 깔고

가끔씩 과자를 우물거리면서

그렇게 읽어치웠다.


이기호란 작가의 능숙한 말재간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성석제를 장난질 정말 잘하는 작가라 알고 있었으나

이기호도 그에 못지 않다.


보지도매상 사장 이야기, 본드쟁이 이야기, 우리의 최순덕씨 이야기...


그저 얘기가 재미만 있다면 뭐하러 이런 몇줄 나부랭이라도 허비하겠나.

이런 이야기 뒤끝에 남는 거리는 정말 공유했으면 좋겠다.

바구니의 언어가 역겹다면 말리고 싶지만...


일찍이 무대뽀의 기린아, 주유소 습격사건의 오성이 형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한놈만 죽인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하나만 짚겠다.

보지도매상 업주 이야기.


일단 문체는 이른바 힙합체이다.

어느 가수인지 생각은 안나지만, 일종의 패러디로

얼마전까지 나의 고등학교 친구 녀석의 컬러링이었다.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 이렇게 시작하는 거다.


말은 못해도 힙합은 기막히게 하는 덜떨어진 친구 순이(맞나?).

그녀는 힙합은 잘했다.

그리고 현장에선 아저씨들을 즐겁게 하는, 白&巨의 젖가슴과 필적할만한 특장이다.


일찍이 바구니로 존재지워진 우리의 사장님, 이력.

자신의 그 "이름"을 불러준 고마운 국사 선생(왜 하필 국사지??? - 이 소설에 뭔가 모자란 인물은 이렇게 국사 곧 한국사와 관련된 사람이 많다. 아마 둘이 더 있지?)을

손봐주고 학교를 나와 직업 전선에 뛰어 듦.

몇명의 아가씨와 봉고차 전화, 간소한 사무실을 밑천으로

투철한 프로 의식을 발휘, 보지도매 업계에서 입지를 마련해감


어느날 순이의 등장.

그 모자란 순이는 전도유망한 우리의 사장님껜 하나의 모욕.

그러나 싹트는 묘한 감정.

자신의 때 덕지덕지 뭏은 옷을 신명나게 빨아주는 순이.


그래, 바구니에게도 뭔가 담을 것, 역으로 담길 것은 있다.

어느 프랑스 소설 제목에 "나는 떠난다"라는 게 있다.

그와 같은 비접착성, 일회성, 냉혈성이 싫다.

처지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는 의미가 되는 존재가 있고 나도 그런 존재가 된다.

잊지 말자. 이런 온통 바구니 같은 인간들만 있는 공간에서조차.


"우리의 바구니를 우습게 여기지 마라. 황차 너희들도 바구니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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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 - 위스망스 단편 (구) 문지 스펙트럼 25
조리스-칼 위스망스 지음, 손경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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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프랑스 문학, 그것도 위스망스는 지금도 여전히 생경하다. 어찌어찌 해서, 낯선 단어를 발견했다. 그것은 퇴폐주의, 혹은 악마주의였다. 문학사조로서 퇴폐주의 혹은 악마주의는 뭘까? 그래서 위스망스를 읽기로 했고, 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 단편집 ≪궁지≫는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들인 〈등짐〉,〈부그랑씨의 퇴직〉,〈궁지〉라는 세 작품을 담았다. 황당했다. 결국 이 책으로는 '퇴폐주의자 위스망스'를 읽게 해주지 못했다. 내 심정은 ≪거꾸로≫를 읽고 위스망스에게 원고를 부탁했다가, 〈부그랑씨의 퇴직〉을 받아 쥐고 실망했다는, 한 영국 잡지사 사장의 그것과 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나? 사 놓은 바에야 읽어야 할 터. 악마주의나 퇴폐주의 대신 자연주의로 목표를 수정했다. 번역자는 위스망스의 끝없는 비판 정신을 찬양한다고 했는데, 그 비판 정신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등짐〉을 읽고 재밌었던 것은 군기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 군바리들. 하루나 이틀이 지나갔다. 우리들은 명령에 따라 말뚝들을 이용하여 보호막을 만들었고, 화주를 많이 마셨다. 무르물랑의 갈보집들이 계속 가득 찼을 때에 갑자기 캉로베르는 군기가 꽂혀 있는 군대 선두에서 우리 부대를 열병했다... 우리들은 이 원수의 말에 설득당하기는커녕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먹을 것도 거의 없다는 불만을 합창하듯이 고래고래 토해냈다. 그러자 힘으로 우리들이 불평하는 것을 저지하겠다고 그는 말했다. "아니, 그만, 그만! 만 명 모두 엎드려뻗쳐. 파리로! 파리로 가!" 도대체 이런 나라의 군대가 어떻게 강화도를 활보하고 약탈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을까, 라는 직업적 생리에서 기인한 다소 핀트에 어긋난 물음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손자는 전쟁 승리의 기본 조건으로 道, 곧 전쟁에서의 명분을 들었다. 명분 없는 전쟁은 얼빠진 군대를 양산한다. 보불전쟁은 그만큼 명분이 실종된 권력가의 정치쇼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적어도 제목이 〈등짐〉이 아니라 〈출발의 찬가〉였으면 더 좋았다. 〈등짐〉은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비판보다는 한 부르주아 청년이 전쟁터의 활란에서 벗어나 일탈을 일삼다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간 안도감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등짐〉으로의 개명은 전략이다. 자신을 자연주의계열로 분류하게끔 하기 위한, 그쪽 방면에서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이 아닐까.

〈부그랑씨의 퇴직〉은 ≪궁지≫의 다른 두 단편에 비해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나왔다. 이 작품을 자연주의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만큼 가장 옅은 색깔의 자연주의 작품일 것이다. 단적으로 부그랑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상식적으로는 말이다. 명퇴를 당한 전직 공무원 부그랑이 자신의 집에 사무실과 유사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사환을 고용해 똑같은 업무를 만들어 한다는 얘기. 이런 인물은 존재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그만큼 더 재밌다. 〈등짐〉에서의 외젠느는 부르조아 청년의 '앙탈'에서 오는 재미를 쪼금 주지만, 이보다 재밌지는 않다. 생각해 볼만한 점도 제공한다. 흔히 노동의 소외라는 말을 많이 한다. 헤겔은 노예조차도 자신과 노동을 동일시한다고 했고, 마르크스는 그런 노동이 더 이상 자신과 일치되지 않을 때 노동의 소외가 발생한다고 말했다던가? 여하튼 한 고귀한 공무원으로 존재의 이미지를 키워가던 부그랑이 더 이상 공무원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됐을 때 느끼는 그 엄청난 소외감, 그것은 부그랑의 목숨까지도 앗아가는 무서운 압박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부그랑의 내면적 소외감, 압박감이 키포인트이다. 비판을 논하기에는 웬지 약하다.

마지막 〈궁지〉는 두 놈의 추악한 부르주아가 마땅히 도움을 줘야할 선량한 숙녀들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얘기다. 앞의 두 작품에 비해 비판 강도가 제일 높다. 부르주아라는 계급, 그들의 악덕이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 그러나 그만큼 재미없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면서 위스망스가 왜 샹파뉴 부인을 속물로 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가 여성에 대한 편향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인가? 억압하는 자들을 비판하면서, 억압받는 자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결국 억압받는 자와 다를 바 없는 자를 속물로 그리다니. 마치 양비론처럼 〈궁지〉의 비판의 칼은 무뎌지는 게 아닌가.

≪궁지≫는 위스망스의 초기작, 빛을 보지 못할 뻔 하다가 겨우 공개된 작품, 당시 별로 주목받지 작품, 이 3개를 묶어 놓은 단편집이다. 이런 작품들을 문지에서 책으로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해설 부분에서 그러한 이유를 잘 납득할 수 없었다. ‘무슨 작품이 당시의 뭐를 비판하고 있으니 위스망스는 비판 정신이 충만해 있다.’ 단지 이것뿐이면 되겠는가? 내가 봤을 때 위스망스의 비판의 칼은 그리 날카롭지 않다. 차라리 ≪거꾸로≫를 읽었으면 좋았다. 소설 읽기에서 재미·처절함을 추구하는 분이라면, 이 책 ≪궁지≫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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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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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읽은 몇 안되는 일본 소설이다. E. H. 카가 말했던가? 문화는 역사가의 시선을 통해 반드시 검토되어야 한다고... 리카는 한국인인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한 일본인이다. 좋은 글은 보편적 감정을 담아내고 있는 거라고 하는데, 나로서는 리카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다케오를 하나코를 통해 정리한다는 얘기. 쉽게 수인되는 얘긴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케오와 리카의 섹스. 이는 완전히 하나코를 위한 행위이자, 리카의 실연의 완성이다. 이 대목에서 난 이책이 완전히 엽기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없다.

내가 여자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가... 아무튼 이 책을 짧은 시간에 읽고 놀란 가슴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하나코의 매력이라는 것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리카가 하나코를 어떻게 해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나코에게 어떤 매력이 있을까. 내 글 읽는 분 중에 그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내게 일깨워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럴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을 해 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언제까지나 난 료코 쪽에 가깝지만 말이다. 남자의 여자 때문에 절연을 준비하는 여성 분들이 만약 있다면, 그 여자가 하나코 정도는 되겠지라고 생각해 보시라. 그러면 마음의 위안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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