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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 반비 / 2025년 12월
평점 :
얼마 전 『에세이즘』이란 책을 사들이면서 말했지만, 언제부터인지
에세이는 내 촉수에 걸리지 않는 장르가 되어버렸다. 어쨌거나 경험에서 의미를 길어올리는 게 중요한 장르인데, 요즘 들어 개인적인 경험에서 사소한 의미를 애써 부풀리는 에세이들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내 시야가 좁은 걸 괜히 남탓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읽어야 할 책도 많은 마당에 굳이 찾아 읽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내 마음에서
에세이는 점점 멀어지나 싶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이 거대한 세상의 조각 하나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편견은 반드시(!) 깨지게 마련이다. 이번에 읽은 『그저 하루치의 낙담』은 내 편견을 (꼴 좋다는 듯) 비웃는 책이었는데, 이런 에세이를 얼마만에 읽었는지 모르겠다. 책에 대략 백번쯤 나올 법한 “엉엉 울었다”는, 그 단순한 문장에 눈이 덩달아 시큰해진 적이 있었나? 한참 기억을 뒤져봤지만 딱히 건져내진 못했다.
이 에세이에서 느낀 그토록 커다란 매력은, 나와
같은 고민을, 현장에서 치열하게 이어가며, 나름의 해답까지
명쾌하게 내렸다는 점이었다.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내가
이곳에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떠드는 주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공존’이다. 익명성 덕분에 좀 뻔뻔하게 떠들고는 있지만, 온라인 바깥 세상에선 그런 이야기를 떠들어도 괜찮은 사람인지 자꾸만 검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공존을 위해 딱히 한 일도 없고, 자칫 적자생존의 대한민국에서
그저 생존이 목표인 이들에게 모욕처럼 들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혹은 사람이라면 응당 가질 수밖에 없는
결점 하나를 발견할 때마다 ‘역시 세상은 어쩔 수 없다’는
냉소를 더하거나.
이 책을 통해 저자와 나는 이 고민을 함께 나누게 된 것이다.
공존, 윤리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가슴
위에 올려둔 벽돌 같은 고민을. 게다가 저자는 ‘기자’였고, 그 직업에 대한 이미지는 누구나 다 안다(굳이 그 별명을 여기에서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아서). 입만 열지 않으면
그럭저럭 괜찮을 수 있었던 나와 달리, 그는 일선에서 화살 십 만 발을 받아가는 중에도 치열하게 윤리를
고민했으니, 나 같은 소시민은 이런 책을 읽으면서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이건 선택이 아닌 의무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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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게 그렇다. 아무리 읽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마음가짐이나 태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생각과 결론을 다 내것으로 만들지는 못하겠지. 열에 하나라도 건지면 다행이 아닐까? 나름의 방식으로 딱 하나만 건져보겠다는 결심과 함께 책을 덮었다. 이
정도 결기를 안겨 준 것만으로도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 할
일을 다 해냈다. 그래서 이 책은 좋은 에세이의 모범사례로 남길 수밖에 없다.
내가 써온 아름다운 문장들이 언젠가부터 견딜 수 없이 싫어졌다. 나는 나의 미문을 자랑하기 위해 사안에 대해, 사물에 대해, 사람에 대해 필요 이상 격찬했다는 혐의를 스스로 벗기 어려웠다. 대상이 사람으로 오면 특히 심각했다. (… …) 세상을 향해 나팔을 부는 일, 나 가진 가장 좋은 것들만 전시해야 하는 공연장.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결국은 거짓말이 되어버리는 그 본질적인 속성은 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운 것이었다. 가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헛되도다, 헛되고, 또 헛되도다. - P58
더 슬프고 더 현명한 사람. 깨달음이란 기쁨과 함께 오지 않고 슬픔과 함께 온다는 것. 사람을 더 현명해지도록 만든다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것. (… …) 나는 삶을 잘 살고 싶다. 진짜 삶을 살고 싶다. 삶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삶의 폭력을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고 싶다. 그러려면 슬퍼야 한다. 슬픔에 귀 기울여야 한다. 슬픔만이 나를 그 길로 안내할 수 있다." - P106
한 예술가가 모든 장르에서 최고인 경우는 없는 것처럼, 인간도 모든 장르의 용기를 다 갖추고 있는 경우는 없다. 그저 나의 장르에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면 된다. 나는 인생을 똑바로 살아보려고 한다. 뭐 대단히 훌륭한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도덕과 지성의 영역에서만큼은 쫄보가 되지 않겠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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