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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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 책 제목에서 우리가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나의'이다. 200페이지를 간신히 넘는 이 조그만 책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서양미술'에 대한 지식도 아니고, '순례'의 이국적 내음도 아니다. 조국의 감옥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을 벌이는 형들과 그 형들을 옥바라지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둔 저자의 가족사, 그 가족사를 낳은 분단 조국의 암담한 현실은 유럽 각지를 부유하며 미술관을 돌아보는 내내 그를 괴롭힌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그가 '발견'하는 그림들에 그대로 투사된다.

그가 보는 그림들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예쁘장하고 곱상한 '메인스트림' 서양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책 첫장에 올린 '캄비세스 왕의 재판'은 가죽벗김형을 당하는 시삼네스의 모습을 담고 있고, 그의 책 마지막을 장식한 그림은 뱀과 지네, 지렁이가 썩어들어가는 늙은 노부부의 몸을 파고드는 끔찍한 그림 '연인들'이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를 보며 '노예는 나의 형'이고, '나는 그것을 감상하고 있'다며 통탄하고, 피카소의 '게르니까'를 보면서 '우리들 자신의 게르니까'를 산출하지 못한 민족의 고통과 수난을 아파한다.

그에게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쁘린시뻬 삐오 언덕의 총살'은 1808년의 살육과 저항이 조국에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증명사진이며, 사나이 둘이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허둥지둥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을 그린 외젠 뷔르낭의 '성묘로 달려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은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 하나의 절박함은 너무도 강렬해서, 서점가에 널린 수많은 서양미술기행기들을 '배부른 자들의 유희'로 치부하게 만들 정도다.

저자의 이름은 서경식. 그의 두 형은 서승과 서준식으로 71년 '유학생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20여년을 복역했으며, 출소후 인권운동에 투신했다. 둘째 형 서준식은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으로 다시 한번 유명해졌으며, 현재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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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묵시록 카이지 22
후쿠모토 노부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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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들은 경제학 수업이라고는 정운영 선생의 정치경제학뿐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잿밥에 관심이 더 많았기 때문에, 수업 내용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목폴라와 재킷을 입은 정운영 선생이, 길쭉한 다리로 왔다갔다 하며 학생들을 쳐다보던 멋진 모습만 기억난다(아~창피해). 그렇게 얄팍한 머리속이지만 그래도 내가 부여잡고 있는 게 있다면, 자본주의를 수식하는 '천민'이라는 단어는, 제 몸 편한대로 아무렇게나 뒹구는,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배만 채우면 된다는, 돈만 된다면 시키는 대로 벌벌 기는 '의식없음'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천민성의 정수가 바로 도박이다. 그 속에는 어떠한 땀도, 사고도 없다. 모든 신경회로는 판돈을 따내는 방법으로 집중되고, 큰 돈을 순식간에 따서 인생 역전을 해보겠다는 조바심은 winner takes all의 극단적 자본주의를 지키는 가드가 된다.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가 움트고 있는 지점도 그곳이다. 주인공 카이지가 하는 것은 단순한 도박이 아니라 목숨이 달린 서바이벌 게임이다. 도박에서 잃는 것이 돈이 아니라 목숨이므로, 카이지가 참가하고 있는 도박은 삶 그 자체이고, 그 삶은 철저히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천민적 자본주의에 속해있다. 이곳에서 감상은 금물이다. '기도에 의존하게 되면 그 인간도 볼장 다 봤다는 뜻'이니까 그런 것은 집어치워야 한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짐승같은 본성에 대한 통찰과 철두철미한 전투자세다. 그런 세계에 있다.

우리 삶이란. 이 속에서 일군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어영부영 우왕좌왕하고, 또 다른 일군은 약육강식의 논리로 한 몫 쥐기 위해 (앞서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포함한) 타인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사생결단의 전쟁같은 도박을 벌이는 것을, 단순히 재미로 보고 즐김으로써 권태를 이기려는 악마같은 자들이 있다. 카이지는, 두 손을 놓고 아무것도 안하면서 세상이 뭔가 바뀌기만을 기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상대를 죽임으로써 자신은 살겠다는 악다구니를 부리지도 않는다. 다만,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 논리적으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함으로써 그도 구원하고, 타인도 구원하는 길을 모색하려고 한다. 그것이 묵시록의 유일한 희망이지만, 카이지라는 인간 자체가 쓰레기에 가깝고 그 구원의 길도 속임수와 사기로 점철되어 있다.

자, 이제 어떻게 살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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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거미원숭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사상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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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귀엽다. 하는 짓이 깜찍하기도 하다. 좀 맥락없이 구는 듯도 하지만, 보고 있자니 기분 전환도 되고, 그것이 깜찍함의 원천임을 아니, 못내 토닥여 주고 싶어진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지만, 한번 정서적으로 밀착되고 나면 떼어놓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솔직히 '쓸모'는 없다. 그러나, 쓸모 없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이 쏟아부은 정이 더욱 각별하고 스스로 사랑스러워진다.

이것이 펫이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밤의 거미원숭이>는 그런 면에서 소설로서 완벽한 '펫'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글은 짧고, 터무니 없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만, 깜찍하고 귀엽다. 보고 있으면 기분 전환도 되고, 도저히 무거운 기분을 가질 수 없게 된다. 한번 손에 들면, 대체로 끝까지 읽어내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소설로서 유용성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다. 나는 그가 부럽다.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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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미국 : 할리우드 영화의 문화적 의미 살림지식총서 7
김성곤 지음 / 살림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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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인터넷 핑계를 대고 싶진 않지만 (생각의) 호흡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구어체와 짧은 스크롤에 익숙해지면서 긴 글을 읽는 일은 지겹거나 귀찮고, 긴 글을 읽는 일이 드무니 생각도 진중하지 못하고 산만하다. 인터넷 서점 덕에 책은 쉴 새 없이 사들이지만 몇십페이지만 읽고 던져버리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그런 차원에서, 문고판은 일종의 '전략'이다. 읽기에도, 사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은 책. 한 때 국내외 문학작품들을 값싸게 공급해왔던 문고판들이 이제는 인문, 사회과학의 관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슈 위주로 접근하되 너무 가볍지 않게, 독자들의 무지를 일깨우기보다 지적인 허영을 충족시켜주는 쪽에 무게 중심을 둔 문고판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침체기라는 출판 시장의 돌파구인지, 혹은 출판 시장의 사양(斜陽)을 짐짓 외면하려는 슈가 코팅인지 판단은 아직 유보된 채다.

살림에서 내놓은 '살림지식총서'는, 두어권 읽은 뒤 나온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나, 후자쪽에 가깝다는 의심이 든다. 미국과 신화, 대중문화를 주제로 펴낸 문고판 20여권은 '기획의 승리'임에 틀림없지만, 크고 시원시원한 활자에 100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은 문고판이 부실한 내용의 변명일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다. 아니, 오로지 혐의는 김성곤 선생의 책이 (기대보다) 평이했다는 데 있다.

<영화로 보는 미국-할리우드 영화의 문화적 의미>는 그 거대한 제목에 비해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 정치한 분석보다는 개념적 유형화에 힘쓰다 보니 각 유형별로 수많은 영화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어쩐지 아쉬운 감정을 이끈다. 김성곤 선생은 이 책의 목표를 '영화가 문화 연구의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첫 인식 단계에 독자들을 데려오는 것'쯤으로 잡으신 듯 한데, 선생의 역량에 비해 너무 쉬운 목표가 아니었나 싶다.

그나저나 그 '출발 단계' 언저리를 궁시렁 궁시렁 배회하면서 더 이상 나아가기는 귀찮아 하고 있는 내가, 이러구러 제일 형편없는 문고 사이즈 인간이었던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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