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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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날개에 실려 있는 작가 소개글에 작가가 ‘목소리 소설’을 창시했다고 해서 이것은 또 무슨 장르인지 궁금했는데, 내가 보기엔 인터뷰 모음집과 그리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다만, 이야기하기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숨겨져 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는 점이 이 책을 여느 인터뷰집과 구별해준다.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도 없었지만, 러시아 여성들이 이렇게 많이 그것도 ‘자발적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엄청난 사상자가 났다는 사실은 러시아 역사책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사상자 숫자에 0이 너무 많이 붙어 있어서 일십백천만.. 하면서 세 보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러시아 사회 분위기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여성들(그것도 열여섯, 열입곱의 어린 소녀들)이 어떻게든 전쟁으로 나가기 위해, 나아가 전방으로 가기 위해 입대를 거부하는 군정치위원회를 제 발로 찾아가는 모습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스스로 원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어떻게든 전쟁터로 나아갔고 그곳에서 남성들도 하기 힘든 여러 보직(저격병, 통신병, 위생사병, 간호병, 고사포병, 지뢰제거병, 세탁병 등등..)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그들도 예뻐 보이고 싶어하는 여성이었고 어쩔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하이힐과 원피스 차림으로 입대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행군 중에 생리가 터져 바닥이 피로 물들고 피가 얼어 살을 베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같은 여성일지라도 제각기 다른 개개인이어서 개인마다 저마다의 전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이들은 전쟁 이후에 받은 훈장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부끄러워하며 아예 버렸다고도 했다. 또 어떤 여성은 전쟁의 참상을 작가에게 열심히 토로한 후, 나중에 정리한 글을 보내주자 언제 이런 내용을 이야기했냐며, 대조국 전쟁은 신성시되어야 하는 것처럼 모두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고도 한다. 아마 스탈린 체제 하에서 애국심과 공산주의는 개인의 목숨, 가족의 목숨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였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난 후 남편이 돌아왔지만 독일군 포로로 잡혔기 때문에 사상을 의심받아 바로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일화는 무척 억울하게 느껴졌다. 스탈린은 포로로 잡힐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며 포로가 된 자기 아들도 내버렸다고 한다.


 그 밖에도 자기 가족들이 포로로 잡혔지만 마을 주민들을 위해 가족들의 목숨을 저버린 가장의 일화나 엄마가 포로로 잡혀서 독일군들이 엄마를 방패막이로 내세웠는데 독일군을 쏘라는 지령이 떨어져 엄마를 쏠까봐 괴로워하는 여성의 일화가 무척 끔찍했다. 그리고 전쟁 이후 피 냄새를 맡지 못해서 장을 못 본다거나 빨간색 옷도 못 입는다는 이야기, 전쟁 이후 돌아왔더니 아들이 엄마를 ‘아빠’로 착각했다는 이야기.. 등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용감한 여인들이 전쟁이 끝난 후 정숙하지 못한 여자로 손가락질 받았다는 이야기도 놀라웠다. 전쟁에서 여성들의 사랑을 다룬 챕터를 보니 직급이 높은 남성들이 성관계를 강요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부 여성들은 처자식이 있는 남성과 관계를 맺은 것도 같다. 물론 전쟁 중에 성폭행이 분명히 있었을 테고 극소수의 여성들이 매춘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운 여성들이 스스로의 과거를 감추고 부끄럽게 여기라는 식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만약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러시아 사회의 여성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물론 그 상황이 닥쳐봐야 알겠지만, 아무리 조국을 위해서라도 공산주의 이념과 스탈린 동무를 위해서라도 내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바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어쩌면 전쟁기간 내내 숨어 있다가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여성 동지들을 손가락질 했을지도 모르겠다. 참전한 여성으로서 느끼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 간접적이나마 알게 해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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