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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인형 도시의 살생부 사건
팀 데이비스 지음, 정아름 옮김 / 아고라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표지와 제목만 보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는 내용이었다. 귀여운 곰 인형, 토끼 인형이 등장해 여느 추리소설처럼 범인을 쫓는 내용이겠거니, 했지만 좀 더 무게감 있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배경묘사가 세밀하다. 봉제인형들이 살고 있는 네 도시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도시나 도로와 같은 큰 배경 이외에도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해도 좋을만큼 건물이나 인물묘사가 세세하다. 앞날개에 나온 작가 소개를 보니 작가는 20세 이전에 책을 읽은 적이 없다는데, 책을 읽지 않고도 이런 묘사와 줄거리를 쓸 수 있다니 신기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가 아닌가 싶다. 우선 '인형(사람)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우리가 항상 고민하는 철학적 문제이다.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나이들어 병들거나 사고로 목숨을 잃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봉제인형은 녹색 트럭이 각 가정을 방문해 아이를 배달하고 마찬가지로 빨간 트럭은 목숨을 앗아간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태어나는 것은 공장에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죽는 것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만약에 살생부가 존재한다면 그 명단을 작성하는 존재는 신인가, 사람인가? 사람이라면 사람인 그에게 신처럼 전능한 힘이 부여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갓 사람인 그가 타인의 죽음을 결정한다면 종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또는 그가 타인을 죽이기를 멈춘다면 모두가 천년만년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 쌍둥이 곰돌이와 인형 친구들은 내게 여러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다음으로는 선과 악의 문제이다. 쌍둥이 중 동생인 테디는 어렸을 때부터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계속 둘의 의미를 밝혀내려 하고 악인의 유형까지도 -독재자, 사디스트, 사이코패스 세 유형으로- 분류한다. 그는 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이지만, 그가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알겠지만 딱히 착해 보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이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는 않으며 시점에 따라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쌍둥이 형이며 주인공인 에릭조차도 유년 시절 카지노에서 방탕한 시절을 보냈으며 이후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인형을 위해 다른 인형은 포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에릭의 아내인 토끼 엠마도 에릭과 테디에 의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인형(여인?)이지만 소설 후반부에 그녀의 시점에서 드러난 엠마는 요즘 '된장녀'로 불리는 여성들을 연상하게 한다.
테디는 "악은 결과"이며, "피해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나쁜 일"(p.130~131)이라고 정의한다. 어쩌면 작가는 테디의 입을 빌려 악은 의도한 관념이 아니라 결과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듯싶다. 그렇다면 악한 의도를 품은 독재자, 사디스트, 사이코패스는 악인이 아닌 것일까? 내 머릿속에 개념과는 또 다른 의미여서 나는 자꾸 머리를 굴려야 했다.
결말 역시도 뭔가 완결되지 않은 느낌이 있었는데 알라딘 리뷰 쓰신 분의 글을 보니 4부작을 예정으로 쓴 글이라고 한다. 다음 작품에는 또 어떤 묵직한 주제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