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림 읽기 - 알베르토 망구엘의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미경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4년 3월
품절


그(프랜시스 베이컨)는 "플라톤은 모든 지식이 기억에 불과하다고 믿었으며, 솔로몬은 새로운 것은 잊혀졌던 것이 다시 떠오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이미지들 안에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13쪽

그(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눈에 비치는 이미지를 통해 사물을 지각한다. 인간은 주어진 이미지를 선하다고 판단하기도 하고 악하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은 정신적인 이미지가 없으면 사고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그림도 말처럼 인간의 실존을 표현하는 수단임에는 틀림없다.-14쪽

윌리엄 블레이크는 "하늘을 가로질러 나는 새들 외에 당신이 어떻게 알겠소? 이 광대한 기쁨의 세계가 당신의 오감(五感) 안에 갇힐 것 같소?"라고 물었다.-17쪽

그녀(조앤 미첼)는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자였으며, 폴록이 원했던 것처럼 '행위를 의식하지 않고' 그림 그리기를 원했다. 언젠가 그녀는 "나는 나 자신을 잊고 싶었다. 자의식을 갖는 순간 나는 그림을 중단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의 그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어떤 것도 표현되어 있지 않다.-50쪽

그(피렌체의 대주교 안토니우스)는 "(…)그들은 삼위일체를 머리가 셋 달린 동물, 즉 괴물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 안에 셋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괴물의 형상으로 묘사한 것은 (…)고대부터의 전통이다. (…)물론 이러한 초기 이미지들은 머리가 셋 달린 신이나 괴물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시간의 동시성과 통일성을 묘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88쪽

그들은 결코 잊지 않았네.
어딘가 후미진 구석, 불결한 장소에서
여전히 끔찍한 순교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곳에는 개들이 득실거리고,
고문자의 말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처럼
나무에 그 등을 긁고 서 있다네.
-오든(W.H.Auden, 1907~1973. 시인이자 저술가)-94쪽

땅을 굳게 딛고 서 있는 젊은이의 발은 스스로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권위가 그에게 주어졌음을 상징한다. (…)모도티의 작품에 소개된 농부의 발은 삶의 의지와 책임을 주장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129쪽

미국의 비평가 제프리 하트먼은 잔인하고 노골적인 장면들을 무차별 방영하는 텔레비전 뉴스에 대해 '무익한 폭력'을 즐기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하트먼은 지나칠 정도의 현실적 이미지로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통속문화는 "비판적인 사고를 더욱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환상을 키울 수도 반대로 뭉개버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녀(모도티)의 사진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불행을 고백한다.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빠르게 의미를 전달하지도 않는 그녀의 사진작품은 하트먼의 말대로 관찰자로 하여금 '잔잔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131~132쪽

귀신·야만인·신 혹은 자연의 오류에 의해 생겨난 야생인간과 같이 문명 밖의 세상에서 온 생명체들은 우리와 다른 모습이지만, 분명 우리 자신의 그림자들이다. 이에 대해 화이트는 "비인간적인 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170쪽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낯선 이방인, 곧 괴물('우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존재'라는 의미의 괴물)과 같은 존재를 라비니아의 토니나의 경우처럼 사회의 대표적인 존재가 차지하는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들도 당당히 인류의 한 종족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킨 셈이다.-214쪽

가트너의 네 사람은 관찰자에게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네 사람의 모습보다 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없다. (…)가트너의 그림에 등장하는 네 인물은 신과 같은 속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일 뿐이다.-228쪽

우리는 이 부조에서 죽은 시인이 세상(일종의 무대)에서 사는 동안 착용했던 가면들, 즉 그의 자아가 반사된 형상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 부조는 '현실'과 현실을 반영한 형상이 죽음의 순간에 일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245쪽

우리에게 반사되어 오는 형상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즉 거짓인지 진실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놓고 사는 얼굴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는 암시가 짙게 깔려 있다.-247쪽

앞서 말한 대로, 피카소는 마르를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괴롭혔다. 피카소의 잔인한 성품에서 비롯된 작품이 전쟁의 잔악상을 단죄하는 공공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283쪽

즉 그 이전에는 수도사들의 행렬이 정해진 지점을 통과할 때 대중이 이를 지켜보며 종교적인 의미를 되새겼지만, 알레이자디뉴의 조각상 덕분에 이제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언제라도 수난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알레이자디뉴의 조각상들은 마치 좌에서 우로 혹은 우에서 좌로 쓰여진 책에 비유할 수 있다.-320쪽

이들 선지자들이 보여주는 '억제된 격정'은 '전율'로 대표되는 르네상스시대의 예술적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알레이자디뉴의 선지자들은 극도의 격정을 억제함으로써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바로크'라는 말의 어원 (…) 가운데 하나는 '가공하지 않은 진주'이다. (…)바로크 예술도 진주조개처럼 숨기는 듯 하면서 내비치기도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형태와 개념 위에 다른 형태나 개념을 덧입혀 표현해 내기도 한다. 이처럼 바로크 예술은 여러 개의 동적 이미지와 개념과 상상력이 층층이 쌓여 있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그 복잡성 때문에 핵심사상을 놓칠 수밖에 없는 효과를 연출한다.-331~335쪽

케베도(스페인 시인)는 "견고했던 것은 결국 사라지게 마련이고/ 덧없는 것만이 남아 영원히 지속된다"고 결론지었다. 뒤 벨레(프랑스 시인)도 "견고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 파괴되지만/ 일시적인 것은 시간의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말했다.-378쪽

홀로코스트 기념관 건립 계획이 처음 발표된 이후 독일에서는 이런 문제를 둘러싸고 무수한 논쟁이 벌어졌다. 건립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기념관이 망각에 대한 면죄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죄의식을 느끼면서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또 어떤 기념물도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해 내지는 못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나아가 (…)악의 미학은 과연 어떤 식으로 존재할 수 있느냐는 의견도 있었다.-383쪽

무릇 진정한 기념물, 즉 기억과 반추의 역할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기념물은 디드로의 소설에 나오는 프랑스 어느 성의 벽에 적힌 글을 입구에 새겨넣어야 한다. "나는 아무에게도 속해 있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속해 있다. 이곳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부터 당신은 이미 이곳에 있었다. 이곳을 떠난 후에도 당신은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394쪽

극장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자비가 베풀어지는 장소인 카라바조의 무대에는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판가름하는 관찰자가 포함된다. (…)즉 그는 관찰자에게 배우의 역할을 맡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행동이 결여된 연민은 자비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420~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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