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산을 쓴다 - 2009 원북원부산 후보도서
정태규 외 27인 지음, 정태규.정인.이상섭 엮음 / 산지니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상한 글방, 그 첫 이야기
-봄비는 왜 이다지도 애틋할까요?-
금요일 저녁,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어요. 아니 뉘였다고 해야 할까요?
주말이라는 안도감 때문인지, 버스 차장에 기대어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으니 말이에요.
한참을 달게 잘 잤나 봐요.
문득 눈을 떴죠. 비가 오네요. 어쩌요.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차도 막혀요. 역시 주말인가 보네요. 집까지 갈려면 아직은 한참이나 남았는데..
비가 계속 오려는지, 차는 계속 막히려는지 자꾸만 걱정이 되네요.
창밖을 바라보아요.
창가에 점점이 내려 앉은 비를 보고 있으니
귀엽다는 생각이 문득 쿡하고 웃음이 터져버렸어요.
왜 걱정 했을까요? 비는 그칠 것이고, 난 집에 갈 것인데 말이죠.
아,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구요.
그렇네요. 당신에게 쓰는 편지인데 인사도 없이 내 이야기만 하고 있네요..
오랜만이죠. 잘 지냈어요? 당신이 잘 지내고있단 이야기는 내 귓가에 늘 들리더군요.
아직 당신의 미니홈피 주소를,
블로그 주소를 기억하는 나는 종종 당신의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비가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버스에 훌쩍 올라탄 여전히 덜렁대는 나는
버스 안에서 오랜만에 비를 보며, 책장을 폈어요.
그리고 천천히 내리는 빗방울 마냥 보슬보슬 책장을 넘겼지요.
한 구절 한 구절 읽다 보니, 그래요. 불현듯 당신이 떠올랐어요.
아마, 그래서 일거에요. 당신에게 오래만에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게 말이죠.
호기심도 많고 내 이야기라면 잘 귀기울여주던 당신이라면 지금쯤,
무슨 책이었니? 라고 혼잣말을 하겠죠.
그래요, 이 책이었어요.

실제 장소를 색인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기억과 경험이 없는 장소예찬이 가지는 한계는 분명하다.
작품 속의 장소는 그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나 사건 인물과 유기적 연관성을 지닐 때 의미가 있다.
-<부산을 쓴다> 서문중에서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에서 집이 의미있는 것은 그녀가 살았기때문이고,
우리동네 낡은 놀이터가 내게 의미있는 것은 그곳에서 가장 친한 내친구를 처음 만났기때문이며
부산역 KTX승강구가 내게 가슴아픈 것은 그곳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보냈기때문이다.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아마 다시 물을 거에요. 이 책이 왜? 그러게요.
정말 당신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책인데 말이죠.
사랑이야기도 이별이야기도 아닌 책을 보며 나는 당신을 떠올려요.
이 책엔 "부산"에 명소들이 다 나와있죠. 그곳에 얽힌 사랑이야기,
이별이야기들이 말이에요.
맞아요. 부산은 당신에겐 내가 사는 도시이죠.
그리고 나에겐 당신이 날 찾아 그 먼길을 늘 왔던 도시구요.
당신이 날 만나러 올 때 마다 난 늘 당신 몰래 부산의 여러 장소들을 기억해놓기 바빴어요.
이번엔 당신과 어딜가야하나, 어느 곳에 가서 당신과 밥을 먹을까? 등등
맛집이나 여행코스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심지어 히키코모리냐는 놀림으로 살던 내가
당신을 위해 카페를 누비고 여행정보지를 찾아가며 내가 사는 곳을 그렇게 찾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오면 마치 알던 곳마냥,
자주 오는 곳 마냥 잘난척 해가며 그렇게 당신에게 소개해주었지요.
이건 비밀이었어요. 적어도 당신에게는 말해주고 싶지 않은 비밀...
그래서 일까요?
당신과 내가 누빈 곳곳이 이 책에 있었어요,
우리처럼 어떤 이도 해운대 백사장에서
첫 데이트를 하고 부산 역 앞에서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그리고 수영다리 밑에서 그렇게 이별을 했었나봐요.
내가 그랬듯, 그리고 당신이 그랬듯...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읽은 것은 내 머리 속에 남은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과 나였으니까 말이죠. 그들의 데이트를 보며 우리의 만남을 생각하고
그들의 헤어짐을 보며 우리의 헤어짐을 생각하고
혼자 남은 그녀의 그리움을 보며 나는 내가 했던 남은 그리움의 치유들을 떠올렸어요.
그렇게 장소는 구체화되고 추억은 생생해져서,
책을 덮은 순간에도 알싸하게 마음에 남았더군요.
차는 어느덧 집앞 정류장이네요. 여전히 비는 내리네요.
오늘은 비를 맞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알싸한 마음과 내리는 비는 서로를 잘 보듬어 줄테니까요.
가끔은 추억에 젖어 걷는길도 그렇게 잠드는 밤도 괜찮겠죠.
오랜만이잖아요. 다시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내 마음 속 깊이 넣어둔 당신을
내 스스로 꺼내 만나는건요..
그러니 오늘만 내가 당신을 맘껏 그리워하다
그리 보낸다해도 흉보거나 마음아파하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