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 믿음 사건 - 기독교 8대 난제에 대한 유명 저널리스트의 탐색
리 스트로벨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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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전통적 기독교와 같은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이기에,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같은 책이 유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회의론, 혹은 불가지론자 涌“?기독교의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하는 것은 실천신학의 한 과제이고, 그 주요한 축이 바로 ‘기독교변증’이라는 분야이다.

리 스트로벨이 쓴 특종 믿음 사건은, 기독교 신앙에 관한 난제들로 인해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기독교 변증서이다. 악과 고난, 기적, 창조와 진화, 폭력적인 하나님, 예수의 유일성, 지옥, 교회역사, 그리고 회의론 등, 쉽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질문을 하고 여러 ‘전문가’의 답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려고 시도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는 ‘순진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위안이 되겠지만, ‘Great questions with no intelligent answers’라는 한 아마존 독자 평처럼 지적으로 불성실한 답만을 주는데 그치고 만다.

이 책이 이렇게 피상적인 답에 머무는 이유는, 저자가 인터뷰한 학자들이 거의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으며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는 보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 진영에 속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달라스, 탈벗 신학교 등에서 주도하는 이러한 기독교 변증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서양 기독교의 체계를 바탕으로 한 자신들의 도그마를 변호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기에, 도그마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회의론자들을 설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저자가 좀 더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더 깊은 통찰을 가진 (진보적인 학자를 포함한) 이들과 인터뷰를 했을 것이고, 더 심도 깊은 내용을 이 책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이러한 류의 기독교 변증은 근본주의자들의 관심사이지, 진지한 신학자들의 관심사는 아니기에 그 작업도 쉽지 않았으리라.)

진지한 질문과 논리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의 맹점을 여러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을텐데, 그 중 몇 가지만 언급하기로 하자. 먼저, 2장의 ‘비 과학적 기적, 믿을 수 있는가’를 보면, 저자가 인터뷰한 ‘전문가’는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토대로 논리를 전개하는데, 몇 가지 기초적 논리를 바탕으로 그 기적들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유주의’적 신학자 불트만을 언급하며, 그 조차도 기적을 인정했다고 이야기하며 기적은 가능함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진술은 자기가 유리한 대로 사실을 왜곡하는 전형적인 조선일보의 논리다. 불트만은 오히려 성서에서 기적이라는 신화를 제거하려는 ‘비 신화화’ 작업을 수행했었고, 기적의 사실성이 아니라 기적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학자였음을, 신학공부를 조금만 해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증명’ 될 수 없는 논리가 회의론자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과학적 사실로 증명될 수 없는 사건을 논리적으로 변증하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시도일 뿐이다. (이러한 작업이 무의미 한 것은, 아마존의 서평에서 여러 회의론자들이 이 책을 웃음거리로 여기는 데서도 드러난다.) 회의론자들에게는, 차라리 역사비평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성서 안에는 신화와, 고백과 믿음이 뒤섞여 있음을 말하며, 기적의 사실성이 아니라, 기적이란 사건의 의미, 그리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임을 말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유치한 수준의 변증보다는, 차라리, 비 이성을 넘어서는 초 이성적인 믿음을 권고하는 것이 그나마 적절한 접근이다.

또한3장에서는 진화론의 허구를 말하며, 창조론이 더 논리적이라는 전형적인 ‘창조과학자’의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 둔) 최대한 증명이 가능한 사실을 찾는 노력이고, 그러한 과학적 결과로 진화의 증거가 존재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이러한 과학적 상식을 그저 하나의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자들의 궤변보다는, 창조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에, 창조는 믿음이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 타당하다. 창세기의 창조사건을 고대의 신화와 사실이 뒤섞인 하나의 고백으로 읽지 않고, 그 것을 문자 그대로 믿고 과학으로 증명해 내려는 저들의 노력은 가상하나 측은한 시도이다. 창조를 믿는 창조론자는 가능하지만, 창조를 증명하려는 창조과학은 불가능함을 알 때, 진화가 창조의 한 과정이 될 수 있는 ‘유신론적 진화론’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궤변이 담겨져 있는 곳은 4장, ‘폭력적인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가’ 이다. 근본주의 진영의 기독교 변증가로 널리 알려진, 노만 가이슬러는 구약에 등장하는 폭력적인 하나님, 아말렉의 어린 아이까지 죽이라는 하나님을 변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이 절대적으로 거룩하시며,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 분이기에 취하는 것도 정당하고 말한다. 또한 그 타락한 문화 속에 있던, 타락의 영향을 깊이 받은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취한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더 나을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 놓는다. 이러한 변증에 고개를 끄덕이는 회의론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러한 하나님이라면 나부터 믿지 않겠다는 쪽을 선택 하겠다.

구약의 폭력의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쉽지 않은 문제다. 하나의 해석 방법을 제시하자면, 역사비평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그러한 시대 속에 있었다. 자기 종족의 생존을 위해서는 타 종족과 생사를 건 전쟁을 벌여야 했고, 불안의 씨를 없애기 위해 어린 아이들까지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자신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그들은 역사적, 신앙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졌음을 서술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잔인한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기 보다, 이스라엘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고백과 선언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무엇이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투영시킨 것이냐는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이유로, 더욱 엄밀한 비평적, 해석학적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해도, 여전히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문제는 존재한다.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하기에 '성경적'이라는 말도 조심해서 써야한다.) 결국 문제는 해석이다. 해석에 있어 커다란 전제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의 정신으로 폭력의 하나님을 해석할 때 사랑의 정신에 위배되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이라기 보다, 이스라엘 자신의 폭력성이 투영된 것으로 보는 편이 더 낫다.

저자가 ‘모든 것을 종합할 때 가이슬러의 말이 옳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순진하고 단순한 결론을 내리는 대목에선, 정말 허파에 바람이 빠지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이렇게 이 책의 변증이 피상적인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이 ‘전문가’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으며, 도그마를 지켜내려는 근본주의자들의 변증은, 회의주의자들에겐 웃음거리일 뿐 설득력이 전혀 없다. 진리의 기초를 지켜 내면서도, 포용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변증해 내는 것이 어쩌면 이 시대 기독교의 과제이리라. 이 책은 이러한 과제들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하기에, 차라리 고전적인 C.S. 루이스나 존 스토트의 책들, 혹은 스탠리 그랜츠나 다니엘 밀리오리의 균형잡힌 조직신학 서적을 보는것이 훨씬 나을 것이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다른 시각을 알기 원한다면, 진보적인 관점의 마커스 보그, 돈 큐핏, 존 쉘비 스퐁 등을 만나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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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의 기도
김영봉 지음 / IVP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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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매우 중요한 신앙행위이다. 그러하기에 진지한 신앙인이라면 기도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당연한 것이고, 그 관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에 대한 여러 책들을 섭렵하기 마련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기도에 대한 책 중에는 영혼의 양식이 되는 좋은 고전도 있지만, 근래에 유행하는 것 중에는 균형잡힌 신앙성장에 유익하지 않은 것도 꽤 있다.

기도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기복주의와 성공주의를 대놓고 조장하는 '야베스의 기도'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고, '무조건 하면된다', '기도하면 형통한다'는 식의 유치한 인본주의적 기도를 가르치는, '히스기야의 기도'나, '강청기도의 능력'등이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책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영적 어린아이들이나 읽을만한 동화같은 책들에 무언가 부족한 갈증을 느끼는 이라면, 읽어볼 만한 유익한 책이 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으로 '청부론' 논쟁에 불을 지핀, 김영봉 목사의 '사귐의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에는, '기도로 흥한 한국 교회가 기도로 망할 위기에 직면했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진지하고 진실한 마음이 녹아있다. 그러한 저자의 고민은, 깊은 학문적 연구와 영성에 대한 오랜 시간의 탐구를 통해 기도의 본질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본질을,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정의한다. 저자는 바른 기도를 위해 우리가 잘못 오해하고 있는 문제들을 지적하며, 기도에 대한 배경신학과 실제적인 지침들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또한 역사 속에서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추구했던 영성이 '사귐의 기도'였음을 말하며, 그 유익한 열매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하고픈 말을 대신 해주고 있는 듯한 저자의 서술에 여러 번 감탄을 하였다. 저자가 지적하듯, 기도는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지니를 불러내 듯 하나님을 불러서 자기 욕구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다. 그것을 '인격적인 관계', '친밀한 만남', 혹은 '깊은 교제', 그 무엇이라고 부르던, 신앙생활의 핵심은 바로 사귐이며, 그것을 기도라 불리는 영적대화를 통해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 본질인 '사귐'을 회복하기 위한 안내서 역할을 해주고 있는 이 책은, 우리의 정서를 이해하는 한국사람이 썼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 주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정말 쉬운 글로 씌여져서 읽기가 매우 편하다는 것이다. 그 쉬운 글 속에는 영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담겨져 있어 책 읽기를 자주 멈추게 되지만 말이다. 좋은 책들은 대개 어려운 책들이 많아 쉽게 선물하지 못했었는데, 당분간은 이 책이 친구들을 위한 나의 선물이 될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움은, 각 주제들에 대해 좀 더 많은 양으로, 더 깊이 들어갔으면 하는 점이었다. 몇 몇 주제들은 그저 양념역할 정도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기도에 대한 개론서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진지한' 기도 생활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앞에서 이야기한 류의 책들을 덮어 버리고 당장 이 책을 구해 읽어라. 책을 읽는 도중, 기도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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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하나님의 신비
마이클 프로스트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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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말이 있다. The Three Princes of serendip이라는 인도의 옛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로, '예기치 못한 귀한 것을 우연히 발견하는 기쁨' 혹은 '뜻밖의 깨달음'을 뜻한다. 호주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는 Morling 신학대학의 교수 마이클 프로스트 (Michael Frost)가 지은, '일상, 하나님의 신비' (IVP) 라는 책은 많은 이에게 이러한 Serendipity가 될 수 있을 듯 싶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 중 하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더 깊이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 묵상과 일상의 묵상을 통해 그분의 뜻을 더 깊이 알아가기를 훈련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매우 유익한 일상생활의 영성에 관한 책이다.

일상생활의 영성을 이야기하니,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은 매일의 일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임재를 그의 고백과 기도로 잔잔하게 잘 묘사하는 반면, 이 책은 좀 더 신학적인 바탕과 원리로 일상의 영성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신학적'이기는 하지만, 그리 딱딱하지도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인 이분법에 지배받으며 살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예배, 기도, 성경읽기등은 경건한 것이나, 친구와의 만남, 영화와 음악등의 대중문화를 즐기는 것, 건강을 위한 운동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건과 관계없는 세속적인 것으로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것을 '이목집중의 훈련'이라고 정의하며, '산문체 일색의 구태의연한 공식, 즉 하나님이 종교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일하신다는 고정 관념을 버리고, 창조에 바탕을 둔 접근을 수용하여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서 자기를 계시하고 계심을 인정'하는 훈련을 하라고 한다. 그렇게 삶의 모든 순간들 속에서 성'과 '속'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성육신'이라는 기준으로 모든 사물과 사건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 삶의 평범한 일상에서도 매일 매일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 있음을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매우 의미 있었던 것은, 요즈음 고민하던 부분들, 예를 들면 종교적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 것, 마음의 눈을 뜨고 살아가는 것, 세상과 문화를 바라보는 기준들에 대해, 저자는 마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산문체 일색의 무미건조한 세상에서 시를 창조'하고, '이목집중의 훈련'을 하며, '창조와 성육의 기준'을 가지라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위에서 말한 우연의 일치로 깨달음을 얻는 '세렌디피티', 기독교적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세렌디피티'라는 표현은 이 책에 등장한다.)

본서는 가격도 적당하며 (5,500원) 분량도 약 200페이지 정도로 부담도 없고, 재미도 있기에 하루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아쉬움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앞부분에 비해 저자의 통찰력과 구성의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전형적인 단순명료형 서술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는 그러한 단점을 충분히 넘어설만한 통찰력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하겠다. 이 책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발견하는 '하나님의 신비'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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