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현대 가족의 야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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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 이가서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현대 가족의 문을 지키고 있는 야누스는 기업이다. 핵가족이건 가사분담, 교육 심지어는 부부의 침대까지 지배하고 있는 기업. 기업 없이는 지금 우리의 가정을 유지하기 어렵다. 우리는 거대한 자본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자본 없이는 유치원도, 소풍도 갈 수 없다. 위대한 오즈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일까. 가도가도 만날 수 없는 오즈의 마법사, 그러나 세상의 끝에서 만난 오즈의 마법사는 오즈의 맙소사 형상을 하고 있어 할 말 없다. 원망의 근원지를 찾다 보면 지구를 떠나야 할 지도 모르니까 이쯤에서 다시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자.
이 한 권의 책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울산 이라는 나라에서 집단 거주를 하고 있는 그들의 일상은 텔레비전에서 지겹도록 보았던, 뙤약볕 아래에서 빨간 조끼, 빨간 띠를 한 사람들의 이유 있는 항변을 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이야기한 것 보다 더 적나라하게 사장된 사장되고 있을 인권의 구린 냄새다. 그러나 어느쪽도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볼 수 없으나, 적어도 인간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기업의 말은 절반 이상이 '구라' 라는 것도 확신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양대 기업중에 하나였던 현대. 그 이름은 요즘 사회에서는 조금 덜 세련되 보이기도 하는 오늘날을 가르키는 명사이기도 하다. 어쨌든 현대에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실질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는 노동자 가족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소설이건 어떤 글이건 사람의 일상이 들어있는 글을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들이 걸치고 있는 옷가지와 그들이 기대고 있는 벽을 상상하게 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상투를 틀고 쪽을 진 얼굴이다. 일하는데 방해되므로 한복을 걸치지 않았고, 집안 일 하고 남편 뒷바라지 하는데 불편하여 간편한 실내복을 입었지만,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 생활 방식은 언밸런스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들을 아직도 그렇게 살도록 만든 것은 결국 컨배이어 벨트가 쉼없이 돌아가야 하는 단순하고 열악한 노동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하는 노동은 그의 의식 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루 종일 단순 반복적인 일에 몰두하다 보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자기 중심적이고 단순한 사고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나는 무조건 가부장적 사회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가부장적 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은 과감히 삭제 시켜야 하므로 비판이 아닌 무시로 일관해버리곤 한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내가 갖고 있던 평소의 생각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적어도 이 책에서 만큼은 나의 주의와 나의 가치관은 떼어놓고 진실의 귀를 열어 놓아야 한다고 말이다. 현대 자동차 노동자 가족들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가벼운 가십거리가 아니라 아직도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유행이 지난 삶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힘들게 일하는 남편을 불쌍히 여겨 아내들은 남편의 말에 복종하여 자연스럽게 위계 질서가 잡힌다. 주야 교대 근무와 철야, 특근 근무로 임금의 액수가 달라지기 때문에 함부로 돈을 쓸 수도 없으며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에나 수영과 운전 같은 것을 배우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머물고 있는 지역적 특수성과 집단성 때문이다. 또한 그녀들의 남편이 일하고 있는 직장, 현대 자동차의 구조적 모순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도 배타적인 성격이 강한데 그것은 그들의 동질성이 가져다 준 결과물이기도 하다. 아이가 없으면 절대로 그들의 그룹에 끼여 수다를 떨 수도 없고, 남편이 가사 분담을 하거나 육아 서적만 쳐다 봐도 남자 망신 시킨다는 소리를 듣는다. 가부장적 성격이 강한 영남권 문화와 현대 자동차 에서 노동자들의 아내를 대상으로 하는 이벤트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아내들은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오면 남편이 어마어마한 대기업 (거대한 규모)에서 일하고 있어 자랑스럽고, 힘들게 일하고 있으므로 더 잘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유명 인사들에게 듣는 재미난 강의에 기업에 유리한 조미료가 가미되있음은 듣지 않아도 자명한 일, 아내들은 집에 돌아와 저절로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현모양처가 되겠다고. 그러나, 구획을 정하지 않고 잘 놀던 아이들에게 울타리를 쳐주었다고 치자. 이후에 아이들은 울타리를 의식하게 될 것이며 울타리에 닿지 않으려고 하거나 울타리를 넘보기도 하며 그전에 없었던 마음을 품게 된다. 기업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이 이 울타리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선진 기업, 돈 많이 버는 기업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슬픈일,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사는게 뭘까. 나는 또 다시 이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마치 이 세상은 영원한 불협 화음의 場 같다. 좋은 어머니를 울부짖지만, 좋은 어머니가 갖춰야 할 요건들은 석박사가 한 우물을 파서 이루는 업적을 능가한다. 환경은 열악한데 한 개인에게 거는 기대는 점점 높아진다. 팔 길이가 틀린 옷을 입고 구부정하게 서 있는 자본의 세상. 교과서의 뒷페이지로 갈수록 필기한 흔적도 밑줄친 흔적도 엷어 지는 것처럼 나는 이 책의 끝맺음에 도달했을 때 어떤 대안도 어떤 대책도 미약하나마 생각해내지 못했다. 역시 이 책이 갖고 있는 단점이기도 한데, 이것은 한 개인의 연구로 나올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들을 가부장적 사회에서 그대로 고여있게 하는 그 원인, 구조적 모순을 찾아 다시 두드리고 재건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오래오래 살아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지켜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