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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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지보다 하루하루의 삶이 더 낯설고 위태해지는 나이를, 그런 해들을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23쪽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52-53쪽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득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 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라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64쪽

몹시 차가운 것은 첫 순간 뜨겁게 느껴진다.-68쪽

광고들이 머리를 으깨며 지나간다.-76쪽

잠시의 시차를 두고 전화벨이 끊기자, 여러 조각으로 깨어졌던 정적이 서서히 서로의 몸을 핥으며 물처럼 하나가 된다.-83쪽

존 애덤스가 피아졸라의 음악을 평하며 네루다의 시를 인용한 부분이 있다. 피아졸라의 음악은 ‘흠집 많은 인간의 혼란, 땀과 연기에 찌든, 백합 향기의 오줌 냄새를 맡는, 음식 자국과 피에 물든, 낡은 옷처럼, 주름진 육신처럼, 감시, 꿈, 불면, 예언, 사랑과 증오의 말들, 어리석음, 충격, 목가, 정치적 신념, 부정, 의심, 긍정 따위로 순결을 잃은 영혼’의 음악이라고.-89쪽

모든 언어가 단 하나의 단어로 압축된다면, 그런 단어가 존재한다면,-122쪽

이런 시간. 어린 동물처럼 연약해진 삶이 떨며 손바닥 위에 놓이는 시간.-128쪽

모든 죽은 사람의 관 뚜껑을 닫고, 거칠게 못질을 하고, 영원히 버리십시오. 그 얼굴을. 눈동자들을, 끈덕진 자책과 결의 따위를.-314쪽

우리, 서로 연락하지 말아보자.
그렇게 냉정한 인주의 목소리를 그때 처음 들었다.
……고등학교 때 물리 선생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 기억나니?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외우라고 했잖아.
반쯤 웃으며 인주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렇게 너를 그냥 외워볼게.-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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