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선택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7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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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버려진 독자였고, 게다가 이상스럽게도 온갖 분야의 책을 다 좋아했으며, 문자화된 단어, 거의 모든 단어에 대단한 친밀감을 느껴서, 책을 읽으면 거의 성애에 가까운 흥분을 느꼈다. 이건 조금도 과장하는 것 없이 말 그대로인데, 젊은 시절에 나처럼 이런 특이한 흥분을 느꼈다고 고백한 몇몇 사람들의 글을 읽지 못했다면, 삼십 분 정도 업종별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며 놀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약간이지만 분명희 눈에 띌 만큼 내 성기가 발기되었던 적도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경멸이나 의심을 자초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27~28쪽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를 매혹시키고 유쾌하게 했던 프로이트식의 대화가 소피에게는 지극히 불쾌하게 느껴져서 네이선과 함께 먼저 자리를 떴던 것이다. "그 이상하고 섬뜩한 사람들은 자기의 작은 상처 딱지들을 뜯어 내고 있어요." 네이선이 곁에 없을 때 그녀가 내게 말했다. "난 그런 식의 노력 없이 얻은 불행-보석 같은 표현이었다-을 증오해요."-237쪽

그리고 그 밖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죄책감이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 단어를 자주 썼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때에는 끔찍한 죄책감이 마음을 억눌렀던 게 분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그때의 일에 대해서 자기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는 그녀와 같은 시련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보기 드문 현상이 아니었다. 시몬 베유(프랑스의 여성 철학자-옮긴이)는 이런 종류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경멸감, 타인과 심지어 자기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죄책감을 인간의 영혼에 깊숙이 각인시킨다. 논리적으로 볼 때는 범죄가 그러해야겠지만 실제로는 고통이 그러하다."-264쪽

다시 한번 시몬 베유의 말을 빌리자면 이 "가상의 악은 비현실적이고 다양하지만, 실제의 악은 음울하고 단조롭고 황량하고 지루하다."-268쪽

아렌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문제는 그들의 양심을 극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물리적인 고통이 다가왔을 때 정상인이면 누구나 느낄 동물적인 연민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용된 기술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그런 본능적인 감정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즉 살인자들은 '내가 이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라고 말하는 대신,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런 끔찍한 일을 지켜봐야 하다니. 이 엄청난 임무가 하필이면 왜 내게 떨어진 것일까!'라고 말하는 것이다."-275쪽

레슬리는 말 그대로 입만 살아 있다. 그녀의 성생활은 전적으로 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녀가 지나치게 활동적인 그 기관을 통해서 내게 전달할 수 있었던 도발적인 약속이, 그녀가 좋아하는 도발적이며 사기성이 짙은 말들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와 함께 앉아 있는 동안, 듀크 대학 시절 이상 심리학 수업에서 읽었던 '추언증(醜言症)'이라는 희한한 병이 떠오른다. 주로 젊은 여자들에게서 나타나며 더럽고 음란한 말을 강박적으로 사용하게 된다는 병이다.-317쪽

레슬리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우울하게도 분명한 아이러니를 발견했을 뿐이다. 즉 버지니아에서 나는 그 불감증에 걸린 여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지금은 레슬리를 통해서 엉터리 같은 프로이트 박사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두 명의 똑똑한 유대인들에게 말이다.-320쪽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소피의 기분이 좀 안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흥분에 들뜬 목소리에서 뭔가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음울한 본론을 바로 꺼내기가 두려워서 유쾌한 듯 편지를 써 내려가다가 추신 부분에 가서야 '우리 이혼합시다.'라고 조심스럽게 붙여 놓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349쪽

나는 그렇게도 잔인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경험, 그 속에서 고통받다가 죽었거나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온전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경험의 영역을 내가 주제넘게 침범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한 적이 많았다. 생존자인 엘리 비젤은 이렇게 썼다. "소설가들은 홀로코스트를 자유롭게 자기 작품 속에서 이용해 왔다. ......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값싼 주제로 전락시켰고, 중요한 본질을 빼버리거나 왜곡했다. 홀로코스트는 이제 엄청난 주목과 즉각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주제가 되어 작가들이 유행처럼 너도나도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390쪽

그것은 이전에 존재했던, 박해에 대해 주저하는 태도를 일거에 타파하는 이론이었다. 서구 세계의 전통적인 노예 소유자들은 과도한 노예 인구 문제로 압박을 받을 때에도 기독교적인 양심의 제약을 받아 그 과도한 노동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종 해법'과 유사한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생산성이 사라진 노예라고 해도 함부로 총살할 수가 없었고, 흑인 노예가 늙고 병들게 되면 평화롭게 죽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정도에 그쳤다. (...) 국가사회주의가 발전하면서 나치에게 남아 있던 인간에 대한 경외감과 신앙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루벤스타인이 지적하는 것처럼, 나치는 인간 생명에 관해 남아 있던 인도적인 감정을 완전히 제거해 버린 최초의 노예 소유자들이었고, "인간을 자신들의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기계로, 심지어 무덤을 파고 들어가 누워 총알을 맞으라는 명령을 받는다고 해도 그대로 복종하는 기계로 바꾸어 버린" 사람들이었다.-419~421쪽

결국 나치는 숙련된 기술로 죽음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잔인한, 삶 속의 죽음을 만들어 냈다. 도착 초반에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앞으로 자신들이 고문과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살다가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루벤스타인은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다. "강제 수용소는 대량 학살장으로서의 역할만을 했을 때 인간의 미래에 끼쳤을 위협보다 훨씬 더 크고 영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대량 학살을 위한 수용소는 시체만을 만들어 내겠지만, 완전한 지배의 사회는 살아 있지만 죽은 자들의 세상을 만들어 낸다......"-421~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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