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가 형상화한 '불안'은 요즘 사람들과는 이미 무관한 것인가. 사람들은 '불안'의 형상마저도 대량복제된 캐릭터 상품으로 제공받는 데 익숙해지고 말았는가. 아니면 '불안'이 너무나도 깊이 배어들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장난으로 얼버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일까. 20세기 말을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불안'에서 소외되었고, 결국에는 자신의 '생명'과 '죽음'에서조차 이처럼 철저히 소외되고 말았다.-16쪽
마르께는 화가로서 일가를 이룬 뒤에도 보통사람과 똑같이 입장료를 내고 루브르 미술관에 다녔다고 한다. "남편은 특권이나 우대받을 권리를 자신에게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속에 묻히려 했고, 특별취급을 받으면 오히려 불편해했다. 거창한 신앙고백이나 어떤 형태의 웅변에도 끌리지 않고, 미묘한 뉘앙스와 억눌린 감정에 민감했다. 나는 그런 것에 민감하지 않은 그이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마르쎌 마르께)-39쪽
근대 이후의 예술가에게는 드문 일이지만, 마르께는 자신의 독창성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작렬하는 불꽃 같은 고흐나 에곤 실레의 작품은 훌륭하다. 당당하게 마지막까지 왕도를 걸은 삐까쏘나 마띠스도 훌륭하다. 하지만 나는 이 마르께 같은 화가도 남몰래 사랑하고 싶다.-40쪽
"갑자기 무언가가 파열했다. 내 평생 (그림 수업을 위해) 아버지한테 받은 유일한 도움인 27루블을 지니고, 아직 어린애처럼 통통한 볼과 고수머리를 가진 나는 친구를 따라 쌍뜨뻬쩨르부르크로 도망쳐갔다. 그렇게 결심했다. 나는 얼마나 많은 눈물과 얼마나 많은 용기로 아버지가 탁자 밑에 던진 돈을 주웠던가." (샤갈, <<나의 회고>>)-58쪽
깐딘스끼는 연주회의 정경이나 음악 자체를 '대상'으로 그리려 하지는 않았다. 이 무렵 깐딘스끼는 "대상이 나를 방해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59쪽
"고통은 일정한 한도를 넘으면 표현할 수 없다. 어떤 표정의 일그러짐도, 어떤 아비규환도, 어떤 호소도, 어떤 눈물도, 어떤 미친 듯한 웃음도 그 고통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인간의 모든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고통의 능력만은 한계를 모르는 듯하다. (...) 이런 고통의 불가능한 영역, 즉 감각이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펼쳐져 있는 고통, 그것이 바로 <게르니까>의 고요함이다."(미시마 유끼오, <<반체제의 예술>>)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고요함-나 자신이 처음 받은 인상도 여기에 가깝다.-165쪽
궁지에 몰린 남자는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유대인 증명서'를 내보이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을 '밀고자'의 위치에 놓는다. 궁지에 몰려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시선에 꿰뚫린 우리 쪽이다.-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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