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 사유하는 인간
린지 스톤브리지 지음, 손성화 옮김 / 사람in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자라 어린나이에 히틀러의 반유대정책으로 쫓겨나 무국적자로 살았지만 미국에서 거주하며 국적을 따고 자신의 신념에 대해 굽히지 않으며 철학자, 교수로서 입지를 늘려갔다.


한나 아렌트는 책의 제목 그대로 끝없이 사유하길 멈추지 않았다. 나또한 그녀를 보며 공감한 부분이지만 이것은 불교적인 것과 맞닿았다. '인간은 질문하길 멈추면 성장과 생각이 멈춰버린다' 이것이 불교, 나, 한나 아렌트의 같은 의견이다.

아렌트는 자신의 발언에 있어서 실험적인 도전을 했다. 자신의 발언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보다는 듣는 사람이 사유하도록 넓은 의미로 말했고, 그것이 잘못 받아들여지면 타 철학자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더욱더 자기뜻을 깊게 밝히기도 했다.

한나 아렌트의 발언들을 볼때는 반유대주의의 피해자들이 보기에는 일부 문제가 있어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글을 쓸 때 자신의 모든 분노를 다 표출하지 않았으며 어찌보면 인도주의자인가 싶기도 하다. "그 놈은 나쁘다" 는 표현보다는 " 이런 면이 있었다" 정도로 비판할 여지를 남겨둔다.

아이히만의 재판에서도 그랬다. "그는 지극히 평범했다" 라고 할 때, 반유대주의자는 그녀의 뜻을 알 수 없었고, 그녀의 분노를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일부는 등을 돌렸고, 피해 철학자들 조차 아렌트의 의사 전달에도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보면서 그녀의 발언엔 일부 오해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사유의 깊이가 깊으며, 의견을 단편적으로 말하지 않아 "과연 철학자다" 싶었다.

그녀의 의견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장을 백인, 유대인, 여성, 무국적자 등의 정체성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사람들에 대한 의견을 전달할 때도 그 사람의 국적과 정체성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짐크로법 사태때는 '니그로 소녀'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 너무 놀라긴 했다)

그녀는 통찰력이 있지만 '올바르다' 고 할수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발언은 현재 사유해야 하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 우물을 파도 얇고 깊게 파기보다는 넓게 파는게 중요하다.

무조건적인 의견보다는 '사유할 여지'를 남겨 둔다는 점에서 그녀가 위대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웅변가가 아니라 철학자였다. 그녀는 일부 망명중인 나치즘과 어울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반유대주의에 찬성한 하이데거와 어울린것도 그랬다.

한나 아렌트가 사유하는 인간이듯, 우리가 그녀를 어떻게 사유하느냐도 결국 우리의 몫이다. 나는 그녀의 발언에 논란을 느껴도 즉각 판단하지 않고 내 안에서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그녀가 그랬듯 평생 사유하고 답을 얻어가고 싶다.
-------------------------------------

- 다른 한편으로 아렌트는 자신이 잃어버린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잘 알았다. 근대의 삶은 아테네 폴리스가 약속했던 자유를 손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버렸다. 20세기 중반에 많은 여성과 노예, 노동자들은 특권을 가진 남성 시민들을 위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노동에서 '해방' 되었으나, 자신들이 전혀 자유롭지 않음을,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피땀 흘려 일했다. 다만 이제는 그들의 노동만이 아니라 가장 사적인 삶의 내밀함까지 착치하는 소비문화에 복무하면서. 아렌트가 보기에 자치와 자결이라는 약속에 넘어가 어둠 밖으로 나오게 된 주변부 사람들에게 현대사회가 제공한 것은, 자유가 허용되는 조건을 세상이 규정해버리는 가운데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써보는' 자유뿐이었다. 여성들과 노예들은 파티에 초대될 때는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는 비싼 교훈을 몸소 경험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