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속성은 부정확한 언표만을 만드는 데 있다. 언어의 이런 실패로부터 남은 흔적이 바로 '근사해'란 말이다('근사해'의 올바른 라틴어 번역은 '입세(ipse)'일 것이다. 그런데 '입세'란 자기 자신, 혹은 그/그녀 자신이 몸소란 뜻이다). - p41
그렇지만 정념을(다만 그 지나침을) 완전히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추는 것이 보여져야만 한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걸 좀 아세요, 이것이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능동적인 패러독스이다. 그것은 동시에 알려져야 하고, 또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것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 p72
마음은 욕망의 기관이다(마음은 섹스처럼 부풀어오르거나 오그라든다). 마치 상상계의 영역 안에 사로잡혀 마술에 걸린 것처럼. 사람들은 혹은 그 사람은 내 욕망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걸까? 바로 거기에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마음의 모든 '문제점'이 집결되는 불안이 있다. - p85
표면적으로 어떤 결과도 가지지 않을/않는 것이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나에게는 새로운 것, 방해하는 것은 모두 사실의 범주가 아닌, 해석해야만 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은 이내 기호로 변형되며, 그리하여 결과론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결과론적인 것은 사실이 아니라 기호이다(그 울림에 의해). 그 사람이 내게 새 전화번호를 주었다면, 그건 무엇의 기호였을까? 시험삼아 지금 곧 사용해 보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필요에 의해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하라는 것이었을까? 내 대답 또한 그 사람이 필연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기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이미지들의 소란스런 교차가 폭발한다. 모든 것은 의미한다라는 명제가 나를 사로잡아 계산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할 뿐 즐기지 못하게 한다. - p97
사랑의 아토피아, 즉 사랑을 모든 논술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속성은 아마도 그것이 최종적으로 담화의 엄격한 한정에 의해서만 말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이 찰학, 격언, 서정시 또는 소설이든 간에, 사랑에 대한 담론에는 항상 그 말의 대상인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다. 비록 이 사람이 유령이나 미래의 창조물 형태로 바뀐다 할지라도,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으리라. - p112
반전(retournment):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 p196
당신의 욕망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조금 금지하기만 하면 된다(금지 없이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라면). X...는 내가 그를 조금 자유롭게 내버려두면서 그의 곁에 있기를, 때때로 자리를 비우면서 '멀리도 가지 않는' 그런 유연성을 갖기를 바랐다. 즉 내가 금지로서는 현존하지만(금지 없이는 좋은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또 그 욕망이 형성되면 내가 그를 방해할지도 모르므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어머니가 평온하게 뜨개질을 하는 동안 아이가 주위에서 노는 그런 좋은(너그러우면서도 보호할 줄 아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공적인' 커플의 구조일 것이다. 약간의 금지와 많은 유희, 욕망을 가르쳐 주고, 다음에는 내버려두는. 마치 길은 가르쳐 주지만, 같이 따라나서겠다고 고집 부리지 않는 저 친절한 원주민들처럼. - p199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 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