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상처받지 않을 권리, 강신주, 2009, 프로네시스>


사람이 화폐를 수용하는 것, 즉 자신이 소유물을 파는 것은 그 화폐를 수용할 타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신뢰에는 궁극적인 근거가 없다) 즉, 화폐를 화폐이게 하는 것은 (그 화폐에 대한) 타자의 욕망이다. 자신의 욕망은 여기에 직접적으로 개재할 필요가 없다. 자신은 단지 타자가 화폐를 욕망하기 때문에 화폐를 욕망한다. 다시 말해 자신은 타자의 욕망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완결되지 않는다. 자신과 똑같은 사정은 화폐를 받게 되는 타자에게서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즉, 타자가 화폐를 받는 것은, 그 외부에 역시 화폐를 받게 될 타자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폐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이 ‘타자의 타자’의 (화폐에 대한) 욕망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당장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즉, 화폐를 화폐로서 기능케 하는 것은 임의의 화폐 수취인(타자)에 대해 그 화폐를 받게 될 후속의 타자(타자의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p59


이처럼 백화점은 고가의 상품을 사는 사람과 그것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그런 이유로 자본주의적 욕망을 훈련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주목받는다는 도취감, 그리고 주목받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지가 암묵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 바로 백화점입니다. : p134


패션은 개인적인 동기가 아니라 사회적 동기를 갖고 있으며, 이를 올바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패션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상류계급이 하류계급, 좀 더 정확하게는 중간계급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 지으려는 노력이 바로 패션을 구성한다.……패션은 끊임없이 해체되기 때문에 항상 새롭게 세워지는 장벽이며, 이를 통해 상류 세계는 중류 사회와 스스로를 차단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신분상의 허영심이 쳇바퀴 돌듯 하는 현상이 무한대로 반복된다. 한 집단은 뒤에서 쫓아오는 자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려고 노력하고, 다른 집단은 최신 유행을 즉각 받아들여 그런 차이를 다시 없애려는 것이 그것이다. : p136


예링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다른 종과 달리 패션에 대한 원초적 본능이 있습니다. “변화욕, 미적 감각, 겉치레를 좋아하는 것, 모방본능” 등은 패션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규정하는 성격들이기도 합니다. : p138


벤야민이 인용한 패션에 대한 예링의 주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 패션은 상류사회로부터 기원합니다. 상류사회는 스스로 하류사회와 구분하기 위해서 새로운 패션이 필요했습니다. 둘째, 패션은 중간계급이 상류사회의 패션을 모방하자마자 곧바로 소멸됩니다. 중간계급이 상류사회의 패션을 모방하게 되면, 특정한 패션은 상류사회를 중간계급으로부터 구별할 힘을 상실합니다. 셋째, 중간계급에게 패션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폭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스스로 상류계급을 지향하는 중간계급으로서는 상류계급이 택한 패션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 p139


푹스에 따르면 패션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합니다. 첫째, 패션은 예링이 지적했듯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계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 또한 중요합니다. : p141


욕구나 욕망은 모두 어떤 결여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욕구가 단순히 부족함을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욕망은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여전히 충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욕구보다 좀 더 복잡합니다. 욕망이란 욕구가 기묘하게 뒤틀려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욕망은 동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지요. : p144


욕망이란 욕구에 기생해서 작동하는 메타적 욕구라고 불립니다. 가령 결여를 느낄 때 그것을 곧바로 충족시켜버리면, 욕망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이런 이유로 욕구를 계속 뒤로 미루다 보면 욕망은 욕구보다 훨씬 더 커지게 되지요. 물론 욕망의 힘이 너무 강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때, 우리는 그것과 관련된 욕구를 충족시켜 그 욕망의 힘을 잠재워버립니다. : p144


옷은 성적 욕망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요. 성적 욕구의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더욱 강한 욕망을 발산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옷이 이런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옷은 아예 성적 욕구, 즉 성적 결핍감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패션과 관련된 산업자본이 우리에게 개입하는 결정적 대목입니다.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옷을 만든다면, 그것은 곧바로 매출로 이어지겠지요. : p145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가 현실이라면 종교란 현실과 무관한 공상입니다. 그러나 벤야민은 마르크스와 달리 자본주의 자체가 현실이고 동시에 공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벤야민의 입장이 옳다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과가 도출됩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종교적으로 작동하므로 만일 자본주의의 종교성이 사라질 수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도 근본적으로 폐기되겠지요. : p175


벤야민은 대도시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행동이 돈이라는 신에게 바치는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자본주의의 종교적 성격은 도박과 매춘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 p178


슈조는 “우연성이 경이로움이라는 흥분적 감정을 자아내는 것은 문제가 미해결된 채로 ‘눈앞에’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지요. : p182


매춘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통해 정당화되는 강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동시에 사랑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 p189


매춘이란 결국 사랑이 자본주의에 지배될 때 파생되는 현상입니다. : p191


도박장에서 보들레르는 자본주의가 숨긴 종교적 성격을 직감했다면, 사창가에서 그는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위력을 느꼈습니다. : p200


들뢰즈는 동일성이란 다양한 타자 그리고 사건들과의 우발적 마주침으로 형성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동일성이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효과일 뿐입니다. : p206


노인들 지위가 이렇게 격하된 데는 자본주의 사회가 현재와는 다른 미래를 기획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 p222


부르디외는 “경작이나 수확과 같은 농업 작업”은 ‘공물과 대응 선물’이라는 박자로 진행되는 “우주적 주기의 내부에서 달성되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무나 의례와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자연이 표상되기 때문에, 농민들의 노동은 강박적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농부들은 만약 자신들이 끊임없이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신이 어김없이 분노를 드러내리라고 믿습니다. : p232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종 목적이고 인간은 언제든 수단으로 전락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인간을 최고의 목적으로 간주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되겠지요. 그렇다면 앞서 인간을 단순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강조한 칸트는 자본주의 사회를 폐기하자고 주장한 것일까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한 수단’이라는 칸트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실 인간을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도 포함된 수단’, 다시 말해 인간을 좀 더 ‘복잡한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 p267


칸트 철학을 독해할 때 우리는 그의 철학이 근대사회의 한 특징인 직업의 전문화 및 세분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선미의 구분을 통해서 칸트는 전문화된 직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전문직 종사자들, 즉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그런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능력은 대부분 부모나 가족의 역량에 따라 후천적으로 재생산된 것입니다. : p271


부르디외는 미적 성향, 즉 취향의 차이가 어떤 계급이 자신을 다른 계급으로부터 구별짓게 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원리라고 주장합니다. : p279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가 문화자본(capital culturel)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학력자본(capital scolaire)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입니다. 이것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p284


인간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찬양하고 칭찬해주는 특성을 자신들의 본성이라고 믿습니다. : p287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산업자본주의가 허영이라는 인간의 치명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 p290


산업자본주의는 상류계급의 구별짓기의 욕망 혹은 허영의 논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상황은 이전과 달라집니다. 이제는 주어진 선천적 신분이 아니라 경제적 자본을 확보해야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적 자본이 있다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별도로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틈을 파고들면서 산업자본주의는 화려한 소비사회를 만듭니다. 경제적 자본을 확보한 부르주아 계급은 소비라는 과시 행위로 자신들이 남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갖고 있음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지요. : p292


자본주의나 기독교는 모두 현재의 순간보다는 미래를 더욱 긍정합니다. : p300


하지만 이미 로빈슨은 알아버렸습니다. 자신의 삶에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내재적 목적이 있다는 것,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결코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삶의 철학자 니체라면 놀이의 아비투스를 획득한 로빈슨을 초인, 즉 위버멘쉬라고 불렀을 테지요. : p303


니체는 현재라는 시간 그리고 내재적 삶을 부정하는 모든 초월주의를 허무주의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말한 초인은 바로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초인은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않습니다.” 니체의 말대로 그는 하늘이 아닌 대지의 아이입니다. 이제 로빈슨이 자신을 떠받친 스페란차의 대지와 자신을 비춘 태양을 가리키고자 했던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것은 니체의 말처럼 대지에 충실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 삶 자체를 수단이자 나아가 목적 그 자체로 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초월적 가치나 목적에 현혹되지 않는 삶, 그 자체로 긍정적인 삶을 되찾습니다. : p304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 즉 “암시적 의미의 영역”에서 사물은 ‘기호(sign)’의 가치를 갖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기호의 차원이 바로 산업자본주의가 소비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증거로서, 보드리야르는 그 사례의 하나로 세탁기를 언급합니다. 보드리야르는 세탁기가 “도구로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보드리야르가 주목한 것은 세탁기가 상징하는 ‘행복, 위세 등의 요소’라는 다른 가치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세탁기의 사용가치와 무관한 이런 관념적 가치를 ‘기호’라고 부릅니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소비의 논리란 바로 이 ‘기호’를 구매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 p329


산업자본주의는 소비자들이 아직 사용가치가 채 소멸되지도 않은 수많은 상품을 스스로 폐기 처분하게 만드는 체계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 p333


1970년에 출간된 『소비의 사회』에서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주의 발달의 핵심에 기술 개발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이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적인 소비사회의 논리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 p334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까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상품을 필요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보다는 상품의 기호가치를 강조할 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 p345


보드리야르는 선물로 받은 것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떠나 자율적으로 작동했을 때, 그런 선물을 ‘물건-기호’라고 규정합니다. 예를 들어 선물로 받은 다이아몬드를 가게에서 화폐로 바꾸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다이아몬드를 화폐로 바꾼 사람이나 그것을 받고 화폐를 내준 사람에게 다이아몬드는 그저 높은 교환가치를 가진 단순한 ‘물건-기호’일 뿐입니다. 이제 내 손을 떠난 다이아몬드는 부유함과 여유로움을 나타내는 것, 즉 소비의 대상으로 변환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선물이 ‘물건-기호’로 타락해버렸다면, 그 반대 또한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단순한 ‘물건-기호’는 어느 때에 고유한 선물의 의미가 될까요? 이것이 바로 보드리야르가 오랫동안 치열하게 모색해온 문제입니다. 그는 기호가치, 교환가치, 사용가치라는 산업자본의 논리를 넘어서서 상징적 교환가치의 세계로 이행하고자 했습니다. 이제 산업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평생 고민했던 노년의 보드리야르는 우리에게 선물로 상징되는 ‘불가능한 교환’을 수행해야 한다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깁니다. : p401


교환의 논리가 작동하려면 우선 인간의 추상적 사유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추상적 사유는 결국 이성의 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 p405


이성의 추상성이 구체적 감성으로 포착되는 사물과 사건들의 생생함과 다양함을 부정한다면, 결국 추상적 교환 논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미적 감수성을 복원하는 데 있습니다. 이때문에 나와 타자 사이의 상징적 교환에 대해, 혹은 불가능한 교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드리야르는 미적 감성을 언급하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교환될 수 없는 것’과의 관계는 다름 아닌 미적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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