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료는 고대 이래 중세까지 동서 무역의 주요 품목이었다. 유럽에서 인기 있던 향신료는 오늘날 카푸치노에 뿌리는 계피, 카레·케이크·비스킷에 들어가는 생강, 맵고 쓴 맛을 지닌 후추, 묘약으로도 알려진 정향, 서구에서 사향호도라고 불리며 푸딩에 들어가는 육두구 등이었다. 성숙하기 전의 열매를 건조시킨 검은 후추는 인도 남부에서 생산되었고, 정향과 생강은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가 주산지였다.
후추, 계피, 생강 같은 향신료를 인도에서 구입하여 로마에 판 상인들은 아랍인이었다. 로마가 몰락하고 이슬람이 등장하면서 양측 간의 직접 교역은 끊겼지만 무역은 중개를 통해 계속되었다. 7세기 아랍인은 이슬람의 전파와 함께 양념 무역을 다시 장악하고 후추와 각종 향신료의 생산지를 비밀로 했다. 그들은 마치 향신료를 얻는 과정에 엄청난 위험이 도사린 듯히 과장하여 더 많은 이익을 남겼다. 아랍 상인은 지배자가 통제하지 않은 덕분에 개별적으로 활약했다.
인도에서 생산된 후추와 각종 향신료는 선박에 실려 아덴과 제다를 거쳐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수에즈에 도달한 후, 거기에서 낙타 대상에 실려 사막을 가로질러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베니스 상인들이 선박으로 물품들을 지중해로 옮겨 유럽에 배급했다.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가격은 로켓처럼 급등했다. 후추는 유럽의 재판 과정에서 판사를 매수할 때 이용될 정도로 사치품이었으며, 지대와 결혼지참금, 세금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부자를 '후추 자루'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줌의 정향은 가난한 사람들의 연간 수입보다 비쌌다. : p110
유럽 세력이 인도양의 지배권을 잡고 인도에 진출하게 되는 서막이 된 가마의 인도 항해는 유럽의 정세를 인도의 부와 연계시켰다. 그의 여행은 인도가 서구의 통치를 받는 불운한 역사의 시발이기도 하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인도는 다양한 수출품을 보내고 유럽의 은을 가져가던 과거와 달리 많은 부를 유럽으로 유출하고 빈곤국이 되었다. 식민 통치는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1998년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 해안에 첫발을 디딘지 5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바스코 다 가마 여행의 종착지와 출발지인 인도와 포르투칼에서는 상이한 성격의 행사가 벌어졌다. 포르투칼에서는 가마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며 대대적인 축하 행사가 벌어졌으나 인도의 말라바르 해안과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 고아에서는 바스코 다 가마의 꼭두각시를 불태우고 검은 깃발을 올리는 등 격렬한 항의 행진이 열렸다. 유럽의 기준으로 세계사적인 인물인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에서는 폭력과 식민주의의 아픈 기억과 연계된 악마였다. 영웅과 악마는 그렇게 종이 한 장의 차이였다. : p127
2001년에 나온 매디슨의 『세계 경제』는 영국인 인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인도와 영국의 경제가 역전된 현상을 수치로 증명한다. 1700년 세계 GDP의 24.4퍼센트를 차지하며 번성을 구가하던 무굴의 인도는 영국이 인도에서 제국의 전성기를 누리던 1870년 그 비율이 12.2퍼센트로 절반가량 줄었다. 반면에 영국 GDP의 비율은 2.8퍼센트에서 9.1퍼센트로 3배가량 늘어났다. 이는 같은 시기에 이뤄진 전반적인 동양과 서양의 역전과 궤를 같이한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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