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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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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에 사족을 붙이는 몇몇 책들이 있다. 천선란의 『나인』도 마찬가지로 아주 약간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본문으로 넘어가야 할 듯하다. 나는 서평을 쓸 때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는 정도로 작성한다. 그렇게 해야 내가 어떤 부분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아주 솔직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서평에서는 스포일러를 모두 배제해야 할 것 같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의 흐름을 차마 미리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문에 가까웠던 기존의 서평보다는, 감상 위주의 글이 될 것 같다.

📔진실은 무섭다. 뒤늦게 깨달은 진실은 더더욱 무섭다. (1부 「속삭이는 잎」 중)

‘식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설정과 소재가 신박하다. 보통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판타지의 경우 ‘인간’이라는 틀을 유지하면서 독특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등의 전개를 펼치는 경우가 많은데, 인간인 줄 알았던 존재가 ‘외계인’이라고 상정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그렇다고 주인공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것도 아니었다. 현재와 미래, 승택 등 다양한 인물을 제시하며 숨기는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10대의 순간순간들을 생생하게 포착해낸 것이 좋았다.

📕학교 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보았다. 여기에 붙여 봤자 아무도 안 본다고 했는데 아저씨는 기어코 붙였고, 나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 바깥에라도 그 이름을 붙여 두고 싶은 것이라고. 파도에 휩쓸릴지라도 모래에 이름을 적어 두는 것이라고. (2부 「심장을 삼킨 나무」 중)

영상화될 여지가 충분한 작품들을 보여준다는 소설Y 시리즈의 취지에 맞게 ‘대본’의 초안이라 생각하고 읽었다. 시간의 흐름이나 대사 및 주제의 무게를 봤을 때 드라마나 다른 극장르보다는 영화에 더 적합해보인다. 비슷하게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 중, 분위기는 다르지만 《우아한 거짓말》이 계속 떠오른다―신기하게도 두 소설 모두 창비 출판사의 도서이다. 여담으로 일반 영화 중 떠오르는 건, 조금 옛날 작품이긴 하지만 《가려진 시간》.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 두루두루 좋아할 것 같다.

📗“금옥아, 나는 나인이야. 아홉 개의 새싹 중에 가장 늦게 핀 마지막 싹이라 나인이 됐어. 더는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나는 가장 마지막에 눈을 떴어.”
그러니까 나인은, 기적이라는 뜻이야. (3부 「파도가 치는 숲」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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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추정경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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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비단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욕망과도 같은 이 생각을 부드럽게 융해시켜주는 장르로 SF와 판타지를 꼽고 싶다. 그 중에서도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는 시공간을 뒤틀고 이동할 수 있는 초능력을 주요 이야깃거리로 삼고 있다.


RPG 게임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 한 번쯤 해볼 거다. 나도 텔레포트를 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라고 말이다. 이 책에 나오는 '포트'가 텔레포트와 비슷한 개념이다.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도박이 가능한 곳, 강원도 정선의 '강원랜드'에서 전당포 일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포트 사용자이다. 다만 어려서부터 포트의 존재를 몰라 기면증으로 알고 지냈던 탓에 각성이 늦어져 불완전하게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소설 전체를 아울러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인과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수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간 내가 가지고 있던 평범함의 일부를 떼어내야 할 수도 있다. 매너리즘 대신 부적응을 앓게 될 수도 있다. 능력을 두고 '저주'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쓰이는 이유가 그러할 것이다. 일상을 유지하는 힘이란, 얼마나 평범하고 특별한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캐릭터들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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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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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 두 가지 있다. “너만 힘든 게 아니야.”라는 것과, “이해해, 나도 우울할 때가 있어.”라는 말이다. 전자의 경우 ‘모두 나와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이런 것조차도 이겨내지 못하는구나. 난 살아갈 가치가 없어. 더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없어.’라는 생각으로 번지게 될 수 있고, 후자의 경우 저 말을 하는 ‘나’의 이야기로 넘어가버릴 수가 있기 때문에 우울증을 호소한 사람이 애써 열었던 입을 영영 닫아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을 만나게 하라고. 『펠리시아의 여정』의 힐디치 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홀로 있을 때면 힐디치 씨는 종종 그의 내면 깊이 존재하는 다른, 더 어두운 면에 가닿곤” 하기에, “외향적”으로 “미소가 필요”한 여건을 만들 필요가 있다.(19면) 그것이 거짓말이라도,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이타성이라도 말이다.


  “수녀들이 항상 엄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성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고 숭상하는 전통을 지키는 수녀들이 펠리시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나중에 좀더 가까워지자 그렇지 않은 수녀들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_ 33면.


  우울증 이야기로 운을 뗐지만, 이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게 우울증이나 우울감에 대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이들이 처한 상황은 비참함 그 자체다. 펠리시아는 남자친구 조니를 찾기 위해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건너오지만 결국 그를 찾지 못한다. 힐디치 씨는 펠리시아를 돕고,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 돈을 훔쳤다가 그녀에 대한 걱정이 커져 “우울한 사람”이(19면) 되고 만다. 캘리거리는 ‘모임의 집’ 사람들에게 돈을 잃어버렸다며 도움을 청했던 펠리시아를 원망했다가, 그 원인이 힐디치 씨였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힐디치 씨에게로 원망의 화살촉을 돌린다. 펠리시아를 제외하고 보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선’을 행한다. 조니는 소외당했던 펠리시아에게 관심을 가져주었고, 힐디치 씨는 영국의 길거리를 헤매던 그녀를 가장 직접적이게 도왔고, 캘리거리는 교리에 맞는 선행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들의 선행이 펠리시아에게도 똑같은 ‘선’으로 가닿지는 못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의 선행은 거짓말에 가까웠고, 타자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 속에서 펠리시아는 흔들리고, 울고, 그간의 신념을 저버리면서도 꿋꿋하게 살아남는다.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_ 312면.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고 확신했던 것을 언젠가 이해하게 될 때도 있듯, 펠리시아는 많은 것을 잃으며 비로소 배우고, 얻게 된다. 자신의 살아있음으로 인해 누군가의 죽음이 야기되었음을 알았고, 아일랜드로 돌아갈 수 없이 어쩌면 평생 영국의 길거리를 배회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소설 전반과 그녀의 여정을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던 “회상”과(74면) 소중한 이들에 대한 추측은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음을 명백하게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하여금 “죽음의 선택”을(315면) 받지 않도록 살핀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펠리시아는 무수히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들에 대한 기억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의 선택을 받아, “그들이 더이상 거기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죽어서도 회상 속에 남아, 충분히 애도 받을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획득하기 위해 펠리시아는 아마 평생을 헤매고 떠돌 것이다. 감히 말해보건대, 이 소설은 저자의 말마따나 “선함”의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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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팬데믹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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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시작과 현재, 이후를 더듬는 작업은 다양한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다. 최근 나는 문학계에서 다뤄지고 있는 팬데믹 서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문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팬데믹이 불러온 변화, 그 중에서도 ‘감정’의 변화다. 불안감, 우울, 체증과 같은 감정 상태는 팬데믹 이전에도 여러 상황에서 나타났으나, 팬데믹이 고착화됨에 따라 ‘코로나 때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일정한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예컨대 불안은 누군가로부터 바이러스가 옮아올 것이라는(또는 내가 누군가에게 옮길 것이라는) 불안으로, 체증과 우울은 한없이 연장되는 거리두기 체제에 느끼는 감정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밀도를 가지게 되고, 포화상태가 되며, 우리는 이 감정을 표출할 창구를 찾게 된다. 그 감정은 대개 분노로 드러날 때가 많고, 창구는 빈번히 타자가 되곤 한다.


“진행 중인 팬데믹은 표면 아래에서 항상 끓고 있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갈등을 불러내고, 엄청난 정치적 문제를 맞닥뜨리게 했지만 단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팬데믹은 시간이 갈수록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를 둘러싼 전 지구적 전망들이 실제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_ 24면.


감정을 표출하는 과정과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시대가 ‘일상’의 범주 바깥으로 발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리두기로 인해 신체적·정서적 접촉이 필요한 이들은 고립되었고, 스트레스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이들은 보균자가 되기를 자처하기도 한다.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외출해야 하는 사람도, 외출을 삼가다 졸지에 면역결핍을 앓게 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비(非)일상 속에서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나, 슬라보예 지젝은 다른 시선을 제시한다. “‘(낡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대신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건설하는, 힘들고 고통스런 길로 나서야만 한다.”는 것이다(166면). 실제로 그러하다,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은 소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이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신규 확진자만 1615명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배경을 이루는 적대와 위기의 난맥상은 팬데믹의 딥 웹과 같아서 단순한 사회적 분석만으로도 풀릴 수 있지만, 팬데믹이 촉발한 초월적이고 존재론적인 재난은 다크 웹과 같아서 우리 대부분은 알 수조차 없는 영역이다.” _ 185면.


과거로 거슬러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고, 팬데믹이 하나의 시대로 자리잡아버렸기에, 회귀를 바라기보다는 지금 상황에서 나아가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불가해성의 세계다. ‘이 시국에 왜 저러는 걸까’라는 말이 나오도록 만드는 누군가가 있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에 그 누구도 답하지 못한다. 이 시대를 언제부터 어떻게 진단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사유(思惟)하고, 사유(私有)해야 할 것이다. (낡은) 공동체가 무너졌으니, 우리는 조금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 시작에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팬데믹으로 인해 공동체적 삶에서 격리된 삶으로 이동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친밀성과 거리두기가 하나의 양상에서 다른 양상으로 복잡하게 변화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_ 194면.


그러니 함께 ‘선택’해봤으면 좋겠다. “무지에의 의지라는 유혹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팬데믹을 사유할 것인가? 팬데믹을 생화학적 건강 문제만이 아니라 자연에서 우리 인간이 점유하는 위치와 우리의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포괄하는 복잡한 총체성에 뿌리를 둔 어떤 것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 이 선택으로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일상성을 만들어내는 결정을 해낼 것인가?”(20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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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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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건 다리와 바보들과 인질극과 오픈하우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여러 편의 사랑 이야기다.”(309면) 저자 프레드릭 배크만은 『불안한 사람들』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는 듯하다. 맞는 표현이다. 이는 다리에서 투신한 사람과 투신하고자 한 사람의 이야기이고, 은행 강도가 오픈하우스를 찾아온 사람들을 두고 벌이는 인질극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바보들이란 무엇인가? “남들을 바보로 단정하기는 쉽지만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바보같이 어려운 일인지 잊어버린 사람이 아닌 이상, 남들을 바보로 단정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미리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15면) 그래, 서로를 바보같이 사랑하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모든 이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는 누구나 어떻게 하면 계속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경험이 있다.” (16-17면)


집을 사기 위해 오픈하우스에 방문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돌연 들이닥친 은행 강도에 의해 인질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은행 강도를 무서워하진 않는다. ‘그’가 들고 있던 총은 가짜임에 틀림없었고, 돈을 강탈하고 인질을 잡아놓기에는 강도가 너무 허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다 같이 피자를 시켜 먹자고 말하고, 돈이 없어 피자를 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은행 강도를 달래가며 ‘그’의 몫까지 시켜버리고 만다. 은행 강도는 그들을 두고 ‘최악의 인질’이라고 말하지만 분위기만큼은 아늑하다.


“가끔 ‘스톡홀름 출신’이라는 것이 칭찬일 때도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좀 더 넓은 곳. 갈망하지만 감히 저지를 수 없는 어떤 일. 아파트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사연과 씨름하고 있었다.” (230면)


은행 강도를 비롯한 인질들은 모두 오픈하우스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피자로 배를 채웠고, 남은 피자를 랩으로 싸 냉동실에 넣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경찰들은 그들 중에 ‘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목격자들을 심문한다. 하지만 별 소득은 없다. 경찰들이 청취한 이들 중에 은행 강도는 없었다. 단지 많은 인질들이 있었을 뿐이고, 또 다른 ‘인질’이기도 한 은행 강도는 무사히 다른 곳으로 탈출했기 때문이다. 오픈하우스-특히 워크인 클로짓은 가장 참된 거짓으로 점철된 공간이었다. 거짓으로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은 이들이 있다.


“과거가 모든 것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절대 견질 수 없을 것이다. 어제 저지른 실수들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선택, 다가올 미래도 우리의 전부라고 말이다.” (462면)


“실제로 도면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넓”은(249면) 벽장이 있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외롭고 불안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화를 하고, 서로의 상처를 알아가고, 의도와는 달리 그 상처를 헤집기도 한다. 그런 실수들이 쌓이고 쌓여 ‘다리’를 만든다.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라는 것”을(473면) 곱씹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구해내기로 한다. 아파트의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도, 안쪽에서 인질이 되어 있던 이들도, 모두가 한 명의 사람을 구해내기 위해 마음을 모았다. 이 소설은 거기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우리는 누구나 인질이고, 바보고, 서로의 스톡홀름 출신이다. 스톡홀름은 이해를 가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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