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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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 두 가지 있다. “너만 힘든 게 아니야.”라는 것과, “이해해, 나도 우울할 때가 있어.”라는 말이다. 전자의 경우 ‘모두 나와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이런 것조차도 이겨내지 못하는구나. 난 살아갈 가치가 없어. 더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없어.’라는 생각으로 번지게 될 수 있고, 후자의 경우 저 말을 하는 ‘나’의 이야기로 넘어가버릴 수가 있기 때문에 우울증을 호소한 사람이 애써 열었던 입을 영영 닫아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을 만나게 하라고. 『펠리시아의 여정』의 힐디치 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홀로 있을 때면 힐디치 씨는 종종 그의 내면 깊이 존재하는 다른, 더 어두운 면에 가닿곤” 하기에, “외향적”으로 “미소가 필요”한 여건을 만들 필요가 있다.(19면) 그것이 거짓말이라도,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이타성이라도 말이다.


  “수녀들이 항상 엄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성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고 숭상하는 전통을 지키는 수녀들이 펠리시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나중에 좀더 가까워지자 그렇지 않은 수녀들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_ 33면.


  우울증 이야기로 운을 뗐지만, 이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게 우울증이나 우울감에 대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이들이 처한 상황은 비참함 그 자체다. 펠리시아는 남자친구 조니를 찾기 위해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건너오지만 결국 그를 찾지 못한다. 힐디치 씨는 펠리시아를 돕고,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 돈을 훔쳤다가 그녀에 대한 걱정이 커져 “우울한 사람”이(19면) 되고 만다. 캘리거리는 ‘모임의 집’ 사람들에게 돈을 잃어버렸다며 도움을 청했던 펠리시아를 원망했다가, 그 원인이 힐디치 씨였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힐디치 씨에게로 원망의 화살촉을 돌린다. 펠리시아를 제외하고 보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선’을 행한다. 조니는 소외당했던 펠리시아에게 관심을 가져주었고, 힐디치 씨는 영국의 길거리를 헤매던 그녀를 가장 직접적이게 도왔고, 캘리거리는 교리에 맞는 선행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들의 선행이 펠리시아에게도 똑같은 ‘선’으로 가닿지는 못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의 선행은 거짓말에 가까웠고, 타자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 속에서 펠리시아는 흔들리고, 울고, 그간의 신념을 저버리면서도 꿋꿋하게 살아남는다.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_ 312면.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고 확신했던 것을 언젠가 이해하게 될 때도 있듯, 펠리시아는 많은 것을 잃으며 비로소 배우고, 얻게 된다. 자신의 살아있음으로 인해 누군가의 죽음이 야기되었음을 알았고, 아일랜드로 돌아갈 수 없이 어쩌면 평생 영국의 길거리를 배회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소설 전반과 그녀의 여정을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던 “회상”과(74면) 소중한 이들에 대한 추측은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음을 명백하게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하여금 “죽음의 선택”을(315면) 받지 않도록 살핀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펠리시아는 무수히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들에 대한 기억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의 선택을 받아, “그들이 더이상 거기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죽어서도 회상 속에 남아, 충분히 애도 받을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획득하기 위해 펠리시아는 아마 평생을 헤매고 떠돌 것이다. 감히 말해보건대, 이 소설은 저자의 말마따나 “선함”의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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