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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시인의 글이 참 좋아서 가져왔다. 

인간다운 품위와 삶에 대한 통찰과 그리고 귀한 사랑이 있어서

마음이 싸해지면서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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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해 동안 한국에서 발간된 책 가운데 가장 파렴치한 책을 꼽는다면 단연 <아프니까 청춘이다>일 것이다. ‘청년의 지옥’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이 청년에게 할 첫 번째 말은 ‘미안하다’여야 한다. 좀 더 사리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실을 바꾸자, 나도 함께하겠다’여야 한다. 그런데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게다가 저자 김난도는 이른바 소비 트렌드의 권위자로서 매년 ‘트렌드 코리아’라는 책을 내는 사람이고 고급호텔에 사장들을 모아놓고 올해의 장사거리에 관한 세미나와 특강을 하는 사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행태 자체를 비난할 건 없겠지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동시에 소비는커녕 생존 자체가 암담한 청년들에게 그런 설레발을 친다는 건 섬뜩한 일이다. 어찌됐든 그는 청년들의 멘토로 군림했고 제 책을 300만부 넘게 팔아치웠다.


다행스러운 건 청년들이 더는 그런 유의 설레발을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혜민이라는 중은 얼마 전 제 페이스북에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건 자기 중심이 없어서라느니 따위 이야기를 했다가 격렬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으로 큰돈을 벌고 유력한 문화자본가가 되었는데 이 또한 김난도의 것 못지않게 기막힌 책이다. 저야 미국 대학의 교수에 중이니 삶의 번민이나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멈추고 정리하면 되겠지만, 멈추고 싶어도 도무지 멈출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에게 그게 어디 할 말인가. 총각네 야채가게 사장 이영석은 몇 해 전 낸 책 <인생에 변명하지 마라>에 적은 ‘일을 가르쳐주는데 내가 돈을 받아야지 왜 주는가’ 따위의 내용이 새삼스레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언급한 세 책들이 근래 출판시장에서 가장 약진했다 평가받는 한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며, 이 사회를 한때 휘어잡은 어떤 정신적 파행을 드러낸다.



어찌됐든 광장에 세워져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모자랄 파렴치한과 철딱서니들이 청년들의 멘토로 군림하며 그 얇은 지갑을 터는 일은 어려워지고 있다. 청년들의 의식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디자이너 이상봉씨가 열정페이라는 이름의 노동 착취로 비난을 받고 사과를 한 건 물론, 조기숙씨는 갑질하는 고객 앞에서 무릎 꿇은 주차 알바 청년이 청년답지 못하다고 했다가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그런 변화들이 불과 1~2년 사이에 급격하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청년들은 더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감추고 분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실 열거한 멘토들이 파렴치함을 넘어 사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부도덕한 사기행각으로 치부한 걸 넘어 청년들에게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도했든 안 했든 체제의 충직한 주구 노릇을 해왔고 그들의 영예와 안락은 그 대가였던 셈이다. 



멘토 사기꾼들의 활약이 여의치 않아진 상황을 대체하는 신종 사기는 ‘세대론’이다.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란을 비롯, 현재 청년들의 현실을 장년세대와 대비하면서 마치 장년세대가 알맹이를 다 빼먹어 버렸기 때문에 청년세대엔 쭉정이만 남았다는 식의 논리가 득세하고 있다. 과잉생산에 의해 불황과 공황을 반복하는 자본주의 본연의 생리를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청년 현실은 세대 착취의 결과가 아니라 더욱 극악해진 한국 자본주의의 반영일 뿐이다.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 20여년 동안 민주정권, 보수정권을 막론한 한국 경제정책의 뼈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였다.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경제가 살고 일자리도 창출되어 다 잘살게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실제로 만들어낸 현실은 ‘노동하기 나쁜 나라’다. 정규직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중심 틀로 하는 노동유연화 정책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순으로 조직력이 약한 노동 부문과 세대로 내려갈수록 모순을 강화했고 결국 노동의 출발점에 선 청년들 앞엔 비정규직과 알바만 기다리는 극단적 상황에 이르렀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현실은 기업의 두목들, 즉 몇몇 대기업 총수들이 정치도 법도 언론도 지배하는 사회의 왕이 된 것이다. 사회가 그 왕들의 의중에 의해 운영되면서 한국은 더욱 노동하기 나쁜 나라가 되고 있고 다시 그 극단에 청년들이 서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그 청년들은 전체 청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청년들이 모두 88만원 세대라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오해다. 한국 사회의 부의 편중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에 이르렀고 사회복지 공공부문 지출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다. 한국의 한 해 예산은 350조원가량인데 최상위계층 1500명이 300조원의 자산을 독점하고 무리없이 세습한다. 


대다수의 청년이 88만원 세대인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극소수의 청년은 88억원 세대이며 심지어 그 일부는 888억원 세대다. 88만원 세대 청년들은 ‘노동하기 나쁜 나라’의 직격탄을 맞은 청년들이고 88억원 세대 청년들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수혜를 입은 청년들이다. 현재 한국은 소수의 88억원 세대 청년들의 건재를 위해 대다수 청년들이 88만원 세대로 살아야만 하는 사회다. 청년 문제의 진실은 세대가 아니라 계급, 철저하고 처절한 계급적 참상이다.






의견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명쾌한 글이다. 

김규항은 여전하구나 싶었다. 


'계급'이나 '노동'이라는 말은 이 사회에서 금기어인 듯 싶다. 

뻔히 답을 두고도 그 말들을 피해서 답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뻘소리만 난무하게 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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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존재는 알고 있던 <나는 시간강사다>라는 게시물이 있다지방대 시간강사였던 필자의 실상 얘기였다구독하는 매체 슬로우뉴스 편집장님이 정식으로 필자분을 섭외해 코너를 만들어 연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솔직히 본문은 예전에 읽어본 적이 있었다단지 나는 딱 한 가지가 의문이었다과연 독자들이 이것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나는 모종의 비관적인 결론을 가졌고반 정도는 확실히 현실이 되어 있었다.


 

'부조리를 비판하려면 그럴만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명제가 맞냐 아니냐에 대해서나는 그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지와 별개로 최소한 한국인 중 절반이 확실히 맞다 여긴다고 보는 편이다더 나아가면 그 명제는 한국 사회의 아주 일상적 질서 중 하나라고까지 생각할 때가 많다특히 상아탑이 결부될 경우그 명제는 더이상 일상적인 것이 아닌 '절대'를 논할 만한 질서다그렇지 않다면그 게시물의 웹페이지나 페이스북 댓글 일부를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범죄가 된 과거의 무능


 

그 필자는 모종의 죄인이 되어 있었다.그 필자가 어떤 사람들에게 죄인이 된 건 단순한 이유였다그는 돈이 없었다그냥 책을 좋아했고모든 책을 좋아하지는 않았다사실 공부를 눈에 띄게 잘 하지는 않았다단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의 시각에선 잘해야 '적절히노력했고, '평범한결과를 얻어 대학에 들어왔다그 시점에서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다그는 그래서 '당연히그런 처지에 빠진 것이다누구의 탓도 해서는 안 되었다그런데 누구의 탓을 했다구조의 탓을 했다자신이 '착취당함'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떼를 쓰고 있다고 받아들였다그가 어떤 처지에 있든그것은 오롯이 그가 선택한 것이기에 누구도 책임을 질 필요도 없고 오히려 자신의 판단력을 탓하지 않고 남을 탓해 사회를 시끄럽게 한 죄인이 되어 있었다물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항변했다하지만그것은 아마도 인터넷의 동료가 많다는 환상에 불과했을 것이다.

 


시간강사 문제는 이미 10년 가까이 진전이 없고오히려 매체의 성향과 구독자의 주된 성향을 따져 본다면너무나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가 빠진 상황에 대해서 별다른 진지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었다말은 길고 지점들은 조금씩 달랐지만수렴하는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감히 그 정도의 기량과 준비를 갖고 상아탑에 끼어들어 한 자리 해보려 했느냐?"

 

 


항변을 위해 필요한 것


 

한국 사회에서 뭔가를 바꾸려는 사람들은 모종의 장벽에 부딪힌다진정성이다연봉이 너무 적다고 하면 어김없이 더 가난한 사람이 나타난다생활비가 너무 많이 든다 항변하는 지방에서 상경한 대학생은 '어디까지 아끼려고 했는지'를 항목별로 검사받는다비정규직이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하면비정규직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지나간 인생을 검토받는다김영오 씨의 경우세월호 특별법을 해보겠다고 자신이 좋은 아버지였는지 아닌지를 시험받았고 덕분에 통장 내역을 손에 들고 국궁이 귀족적 취미가 아니라 그냥 동네 동호회에서 할 수 있는 것임을 직접 가르쳤다모두 진정성이란 같은 맥락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부조리를 비판하거나 고발하는 데 있어 갖춰야 한다고 평가받는 모종의 '진정성'이라는 건자신이 당한 부조리한 질서에 자신이 시비를 걸었을 때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냐에 달렸다부조리 하에서 견디면 언젠가 얻을 대우계급을 그만두면 비로소 진정성이란 신기한 칩이 생겨난다.


 

비정규직이 자신의 처우에 불만을 드러내면 그것은 떼법이다그에 비해 정규직이 비정규직 차별을 중지하라 요구하면 그것은 연대다. SKY 출신이 학벌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면 '깨인 학생'이지만그 당사자인 지방대생과 고졸이 문제를 제기하면 깨인 학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깨진다.

 


그 차이는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유리한 상황에서 그것을 포기하고 비틀린 질서에 항변하는 것인지아니면 불리한 상황이라서 싸우는 것인지에 있다차별과 부조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을 때 상대적으로 갖고 있던 '편함'을 던져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으로비로소 진정성이란 칩이 손에 들어오고그 칩을 써서 부조리에 대한 항변을 할 권리가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사장님은 돈과 휴가를 풀어 착한 사장님이 되지만일하는 사람이 돈과 휴가를 달라고 하면 '근태'가 등장한다곧바로 진정성의 보유량을 의심받는다어김없이 "회사도 문제지만 노조도 문제죠"가 뒤따라 나온다.


 

사람 사는 게 아니라고 대학 시간강사 문제를 고발한 지방대 시간강사에 대한 비웃음이 넘실대는 이유도 이 흐름에 있다그 사람은 수학을 잘 못했고지방대 출신이며그런 고발이 철저하게 '개인적 이익추구'로 보이기 때문이다그는 뭔가를 함께 추구하거나 나눠주지 않는다그냥 자기가 힘들다고 하며그는 자기가 얼마나 그런 처우를 피하려고 밑바닥까지 노력했는지그 진정성을 입증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항변은 그저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시도로 다수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정규직이 비정규직 문제를 논하면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고 이타적인 사람이 되지만비정규직이 비정규직 문제를 논하기 시작하면 단순히 일베뿐만이 아니라 대략 한국인의 3할 이상이 그것을 '루저의 떼법질'로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이다그는 사회에 존재하는 '분수'를 어겼다그것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하고 엄격한 관습법이다. '행복해질 권리는 모두에게 다르게 존재한다'.

 


예전에 고대 학생이 사회를 거부한다며 대학을 자퇴한 것이 뉴스가 되었다그 학생이 분교 출신이었다면 그것은 얼마나 이슈가 되었을까최경환을 협박했던 대자보가 신촌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지잡대'의 게시판에 붙었다면흔해 터진 주거 문제를 논하는 학생이 신촌에 집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 지방 구석 대학가에서 집을 구해야 하는 것이라면그것은 얼마나 다른 한국인에게 '문제'로 비쳐졌을 것인가?


 

그것은 정말로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같은 무게를 갖는가'? 그리고 주변 사람도 그 판단에 동의할까?

 

 


최저한이 없는 사회


 

부조리와 압박에 대한 항변에 진정성이라는 화폐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결론도 명확해진다사회의 루저들은 동시에 루저이기 때문에 그 사실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어떻게든 자신이'무능력해서', 혹은 어찌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몰려서 루저가 된 것이 아님을 밝히지 않는다면단순히 당신이 경쟁에서 밀렸다는 것이나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돈으로는 월세를 해결하면서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이 겪는 고충을 해결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문제제기에도 모종의 스펙은 필요하다우리 모두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개개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인간답게 살아야 인간이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비판에도 '자격증'이 있어야 함에 공감하느냐 아니냐는 곧 개인이 얼마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질서와 먼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는 가장 확고한 바로미터 중 하나다그 명제가 가진 막강한 당위와 중량감이 곧 수많은 사람들과 담론을 분리했고,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막았으며비판이라는 것을 대중과 멀어지게 했다단순히 그뿐만이 아니라부조리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을 지식인과 중산층의 특권 또는 현실에서는 절대적으로 무력한 룸펜들의 인터넷 놀음으로 여겨지게 만들었고다수에게는 박탈감을 선사했다.


 

그런 박탈감의 기운이 주변을 짙게 감돈다그런 공기 속에서 사람은 지난하고 끈기있는 싸움을 포기하고 속물이 되거나모든 것을 기득권으로 파악하고 파멸적인 욕망을 품는다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인간의 최저한이 없다인간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의 존중을 받고뭐든 일을 하고 산다면 최소한의 존엄은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 없기에사람들은 언제나 패배자를 보고 패배했음을 탓한다.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서 애도를 받고죽었다는 사실이 무언가를 요구하게 되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애도를 거두고 장사치를 보는 표정을 짓는다. 진정성이란 코인 앞에서 모든 비극과 고통은 손쉽게 저울에 달아진다.

 


시간강사는 그래서 누군가에겐 머저리 주제에 감히 학문의 길을 가서 파랑새 증후군에 빠져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죄인이 되었고세월호 유족은 그래서 누군가에겐 세월호 쇼크를 일으켜 '경제를 망친경제사범으로 변했다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산다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살 필요는 없고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그렇다고 모두가 언제든지 동물 이상 인간 미만이 될 이유는 없다.


 

한국 사회는 매번 패배자를와 약자를 아예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것으로 모두의 노력을 독려했다. 우리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지우주선 안에서 고립되어 물과 공기가 한정된 것이 아니다사람에겐 양보할 수 없는 존엄이 조금이라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사소하지만 한국 사회에게 가장 크고 절실한 진보다그것에서부터 모든 인간성은 시작한다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었다가진 것이 사람밖에 없다는 나라에서왜 이렇게도 사람을 궁지로 모는 해결책을 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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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라고 소설가 김훈은 <공무도하>에서 썼다. 지난 4월 16일,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 4백 명이 넘는 승객을 남겨둔 채, 팬티 바람으로 조타실을 빠져나와 해경에게 구조되는 선장을 TV 화면으로 지켜보는데, 그 문장이 떠올랐다. 분명, 그 순간 선장은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을 향해 어떤 조롱의 말도 던질 수 없었다. 대신에 내 눈에는 가라앉는 배만 보였다. 거기 배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숨이 막혀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올해로 나는 45세가 됐다. 세월호의 3층과 4층 객실에 앉아서 구조되기만을 기다리던 아이들만할 때만 해도 이런 나이가 내게도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는 1987년으로, 그 해에는 유난히 충격적인 죽음들이 많았다. 서울대생 박종철 씨는 물고문을 받다가, 연세대생 이한열 씨는 시위에 나섰다가 최루탄을 맞고 숨졌다. 11월에는 대한항공 858편이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되면서 탑승객과 승무원 115명이 전원 사망했다. 아, 여름에는 용인의 한 공장에서 35명이 자살하는 괴사건도 발생했다. 바로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2학년이라면, 그런 사건들이 아니라 일년 내내 교실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무채색의 기억을 배경으로 그 해 가을 수학여행지였던 설악산 여관촌 마당에서 빨갛게 타오르던 캠프파이어 불꽃이 먼저 떠오른다. 그때 우린 기껏해야 열일곱 살이 아니면 열여덟 살이었고, 지금 누군가는 죽어간다거나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도 괜찮았다. 저마다의 꿈에만 몰두해도 좋은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그런 시절은 곧 지나가고 아이는 성인이 된다. 성장한다는 건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같은 것이라고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이제 그 새는 타인의 세계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그렇게 관계는 형성되고 우리는 책임이라는 단어의 뜻을 배운다.

 



대학에 들어간 나는 수강신청을 하기도 전에 타인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부터 먼저 배웠다. 당시의 선배들은 유별났다. 입학하자마자 잘못 배운 게 많다며 스터디를 시작할 정도였으니.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 배웠느냐고 물으면, 곧바로 “전부 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때로 그런 확신이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때 한국 사회가 오랜 미몽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 미몽이란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 무지, 혹은 망각의 상태를 뜻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어 한국인들에게는 일종의 처세술에 가까웠다. 예컨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 등의 속담으로 압축되는. 그런 처세술을 소설화하면 채만식의 <태평천하>가 나오리라.

 



1937년을 배경으로 주인공 윤직원은 지주이자 고리대금업과 부동산 투기를 통해 부를 쌓은 부자다. 그에게는 괴로운 기억이 하나 있으니,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다. 구한말 고을 수령과 화적떼에 시달리던 아버지 윤용규는 화적떼의 요구에 돈을 내놓지 않고 버티다 죽고 말았다. 이에 윤직원은 피에 물들어 참혹히 죽어 넘어진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면서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라고, 또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라고 소리친다. 이 소설에 따르면, 윤직원의 처세술이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우리만’ 잘 사는 일이다.

 



대학시절, 아버지 세대까지 면면이 이어온 이 처세술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학생들을 많이 봤다. 자신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에 가 닿으려면 타인의 고통과 연대해야만 하는데, 그러자면 이 처세술을 뛰어넘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고난을 자처했는데, 그건 <태평천하> 식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삶을 반복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적 행동과 같았다. 나는 그게 우리 세대의 선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제는 안다. 우리 이전의 모든 젊은 세대들이 그렇게 선언했고, 또 거의 대부분 실패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사실을 이렇게까지 뼈저리게 확인할 줄이야. 그로부터 채 3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 눈 앞에서 배가 가라앉았다. 우리가 꿈꾼 새로운 세상 역시 그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가장 뼈 아픈 것은 거기에 우리의 아이 세대가 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벽한 실패다. 이 실패 앞에서 신속한 위로를 원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의 분석으로, 하루밤의 토론으로, 신문의 특집기사로 단숨에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포기해야만 한다. 미심쩍은 부분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까지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낫다. 만약 이것이 적폐의 소산이라면, 기꺼이 이 적폐를 마주하되 요령부득의 문장을 읽을 때처럼 꼼꼼히 따져봐야만 한다. 아주 작은 진실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가장 어두운 무지의 상태도 마다하지 말아야만 한다. 완벽한 실패에서 빠져나오는 통로는 완벽한 절망뿐이다.

 



이 완벽한 절망 속에서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왜 실패한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게 만들었을까? 지금 우리의 당면문제이자, 시급한 현안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대선에서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그 순간, 어쩌면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암시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현실은 우리가 예전의 삶을 반복한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탱한 기본 원리에서 우리가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니, 이 반복은 스스로 적폐가 되는 반복이다. 적폐는 적폐를 청산할 수 있을까? 국가는 국가를 개조할 수 있을까? 책임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오랜 적폐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1987년의 대학생들도, 채만식도, 연암 박지원도 알고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 무지, 혹은 망각을 기반으로 축적된 부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부의 축적을 위해 한국 사회는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관리한다. 물 속 아이를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부모들에게 미개하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들을 ‘순수한 유가족’이라고 일컫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이들의 고통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한, 지금까지의 관행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적폐는 적폐를 청산할 수 없고 국가는 국가를 개조할 수 없다. 오직 타인의 고통을 향한 연대에서 나온 책임감만이 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그러니까 30대를 지나는 동안, 우리 세대는 경제적 행복을 가장 큰 가치로 삼기 시작했다. 그건 이제 가족을 이끌게 된 세대가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무지하거나 망각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어떤 풍요인가라는 질문 없이 경제적 풍요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이 끔찍한 실패 앞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사회 불안과 분열을 야기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정부를 투표로 뽑은 것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다시 20년이 지나 평형수를 줄이고 더 많은 화물을 적재한 위태로운 여객선을 계약직 선장이 운행한다고 해도, 그래서 20년 전의 서해 훼리호와 마찬가지로 20년 뒤의 또다른 여객선이 우리의 손자들을 태우고 가라앉는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하나도 없다.

 



결국 이런 사회밖에 못 만들어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아이들은 우리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라앉는 세월호의 모습을 보고 또 보기를, 그리하여 우리처럼 망각하지 말고 어른이 되어서도 꼭 기억하기를. 그 배에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죽어야만 했는지. 세월호라는 이름이 잔인하게만 들리는 건,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세월이 약이라거나 세월이 가면, 모든 게 잊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은 가지 마라. 아직은 잊을 때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 진실을 모두 알아낼 때까지 대한민국의 시간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수학여행지인 제주도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2014년 4월 16일 아침에 멈춰있어야만 한다. 가라앉는 그 배는 이제 우리가 지킬 테니, 봄꽃처럼 짧은 생을 살다 가버린 아이들은 부디 우리를 용서하지도 말고, 이 땅에 미련을 두지도 말고, 좋은 곳으로 떠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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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태고 이래 최근까지도 빈곤이라는 것을 육체적 고통과 결부시켜왔다. 지금은 잘 쓰이지도 않는 ‘헐벗고 굶주린’이라는 형용어구가 바로 이러한 사유 습관을 표출하고 있다. 한편 우울증이나 여러 정신 증세와 같은 것들은 빈곤과 거리가 있는, 즉 ‘배부르고 한가한’ 사람들이나 겪는 것으로 여겨왔다. 이는 하루빨리 고쳐야 할 잘못된 통념이다. 오늘날의 경제에서 빈곤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잠식한다. 사람을 부수고 망가뜨려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똑같지만, 그 주된 대상은 육신이 아니라 정신이다. 하지만 오래된 잘못된 통념 때문에 21세기형 빈곤의 이러한 진실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의 경제 발전이란 최소한의 투입·비용으로 최대한의 산출을 얻기 위한 ‘물질적’ 기술의 발전 과정이었다. 산출이 충분하지 않았으니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기본적인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주거와 의복과 식량의 부족이 주종을 이뤘었다. 케인스 같은 이는 2000년경이 되면 모든 이들이 하루에 4시간만 일해도 풍요로운 삶을 누릴 만큼 생산력이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했고, 이 점에서만큼은 그의 예견이 정확했다는 것이 판명됐다.

 

하지만 빈곤은 사라지지 않았다. 20세기 말부터 진행되기 시작한 3차 산업혁명은 사람을 끝없는 불안정성과 가치절하의 나락으로 밀어넣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또 바뀌는 경제적 과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가 수익을 창출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자산’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모품’으로 취급된다. 오늘날 식량과 의복은 지천이다. 1000원짜리 두 세 장이면 길거리 어디에서든 ‘일용할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고, 아프리카 오지의 원시 부족들도 나이키 티셔츠를 입고 생활하는 모습을 TV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의 고통은 다른 곳에서 온다. 이 엄청난 시스템 전체에서 나라는 하잘것없는 존재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나마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생활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설령 지속된다고 해도 이게 과연 살 가치가 있는 인생인 것일까. 이 뿌옇게 불확실한 시야 너머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당장 다음 달에라도 잘리면 잘릴 수밖에 없는 대다수 서민들에게 이러한 생각은 절대로 ‘배부르고 한가한 정신적 고민’ 따위가 아니라 너무나 절박한 현실의 위협이다. 시시각각 사람을 주눅 들게 하고 불안으로 영혼과 감정을 갉아먹으며 정신 증세로 몰아가는,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얼마 전 식당에서 일해 두 딸을 부양하던 60대 여성이 가족들과 함께 삶을 마감하는 사건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빙판 길에서 미끄러져 팔을 다치는 바람에 일을 나갈 수 없게 된 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나는 정신병리학자가 아니지만, 이 세 분은 이미 그 전부터 우울증이나 여타 정신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동반 자살은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결정에 속하며, 한 두 가지의 사건만으로 벌어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이 분들은 이미 끝이 보이지 않는 생활고 속에서 오래도록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사회심리학자도 아니지만, 감히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지금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은 정도와 양태는 달라도 거의 모두 경제적 빈곤에서 비롯되는 정신 증세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이다. 근거는? 국세청과 통계청 자료로 파악되는 그들의 소득이다. 월 소득 200만원으로 가족을 일구고 생활을 꾸려보라. 그 돈으로 5년, 10년을 살면서 애도 키우고 집도 장만하고 노후도 질병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영양실조로 죽거나 얼어죽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끊임없는 ‘노이로제’에 시달릴 것이다. 경로와 양태는 다르겠지만 이 ‘노이로제’는 물질적 빈곤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심한 중증이 되면 죽음으로 우리를 몰고 갈 것이며, 그 동안 겪어야 하는 고통도 다르다고 할 수 없다.

 

50년대의 뉴욕에서는 정신과 상담이 중산층의 새로운 소비 패턴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한국 경제에서는 살기가 고달픈 인구의 절반 이상에게 꼭 정신과 상담과 치료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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