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태고 이래 최근까지도 빈곤이라는 것을 육체적 고통과 결부시켜왔다. 지금은 잘 쓰이지도 않는 ‘헐벗고 굶주린’이라는 형용어구가 바로 이러한 사유 습관을 표출하고 있다. 한편 우울증이나 여러 정신 증세와 같은 것들은 빈곤과 거리가 있는, 즉 ‘배부르고 한가한’ 사람들이나 겪는 것으로 여겨왔다. 이는 하루빨리 고쳐야 할 잘못된 통념이다. 오늘날의 경제에서 빈곤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잠식한다. 사람을 부수고 망가뜨려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똑같지만, 그 주된 대상은 육신이 아니라 정신이다. 하지만 오래된 잘못된 통념 때문에 21세기형 빈곤의 이러한 진실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의 경제 발전이란 최소한의 투입·비용으로 최대한의 산출을 얻기 위한 ‘물질적’ 기술의 발전 과정이었다. 산출이 충분하지 않았으니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기본적인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주거와 의복과 식량의 부족이 주종을 이뤘었다. 케인스 같은 이는 2000년경이 되면 모든 이들이 하루에 4시간만 일해도 풍요로운 삶을 누릴 만큼 생산력이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했고, 이 점에서만큼은 그의 예견이 정확했다는 것이 판명됐다.
하지만 빈곤은 사라지지 않았다. 20세기 말부터 진행되기 시작한 3차 산업혁명은 사람을 끝없는 불안정성과 가치절하의 나락으로 밀어넣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또 바뀌는 경제적 과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가 수익을 창출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자산’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모품’으로 취급된다. 오늘날 식량과 의복은 지천이다. 1000원짜리 두 세 장이면 길거리 어디에서든 ‘일용할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고, 아프리카 오지의 원시 부족들도 나이키 티셔츠를 입고 생활하는 모습을 TV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의 고통은 다른 곳에서 온다. 이 엄청난 시스템 전체에서 나라는 하잘것없는 존재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나마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생활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설령 지속된다고 해도 이게 과연 살 가치가 있는 인생인 것일까. 이 뿌옇게 불확실한 시야 너머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당장 다음 달에라도 잘리면 잘릴 수밖에 없는 대다수 서민들에게 이러한 생각은 절대로 ‘배부르고 한가한 정신적 고민’ 따위가 아니라 너무나 절박한 현실의 위협이다. 시시각각 사람을 주눅 들게 하고 불안으로 영혼과 감정을 갉아먹으며 정신 증세로 몰아가는,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얼마 전 식당에서 일해 두 딸을 부양하던 60대 여성이 가족들과 함께 삶을 마감하는 사건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빙판 길에서 미끄러져 팔을 다치는 바람에 일을 나갈 수 없게 된 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나는 정신병리학자가 아니지만, 이 세 분은 이미 그 전부터 우울증이나 여타 정신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동반 자살은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결정에 속하며, 한 두 가지의 사건만으로 벌어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이 분들은 이미 끝이 보이지 않는 생활고 속에서 오래도록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사회심리학자도 아니지만, 감히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지금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은 정도와 양태는 달라도 거의 모두 경제적 빈곤에서 비롯되는 정신 증세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이다. 근거는? 국세청과 통계청 자료로 파악되는 그들의 소득이다. 월 소득 200만원으로 가족을 일구고 생활을 꾸려보라. 그 돈으로 5년, 10년을 살면서 애도 키우고 집도 장만하고 노후도 질병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영양실조로 죽거나 얼어죽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끊임없는 ‘노이로제’에 시달릴 것이다. 경로와 양태는 다르겠지만 이 ‘노이로제’는 물질적 빈곤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심한 중증이 되면 죽음으로 우리를 몰고 갈 것이며, 그 동안 겪어야 하는 고통도 다르다고 할 수 없다.
50년대의 뉴욕에서는 정신과 상담이 중산층의 새로운 소비 패턴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한국 경제에서는 살기가 고달픈 인구의 절반 이상에게 꼭 정신과 상담과 치료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