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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한공주>를 봤다.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이 영화가 왕따를 다루는 영화인 줄 알았다.
물론 영화가 시작되고 곧 깨달았지만...
이 영화는 실제 벌어졌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
나는 그 사건에 대해서 쓰고 싶지는 않다.
정확히는 흔히 우리가 부르는 그 명칭으로 부르고 싶지 않고,
그 사건에 부질없는 분노 따위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쓰레기같은 가해자들과 부끄러움은 모르되 지 자식들은 사랑하는 그들의 부모와
아이의 울타리가 되어주기는 커녕 아이의 고통으로 돈을 버는 아버지와
자신의 안위만이 중요할 뿐 아이에겐 관심도 없는 어머니와
피해자에 대한 보호보다는 자신들의 평화로운 안위와 알량한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천박하고 이기적인 어른들이 제대로 처벌받은 가해자 하나 없이 끝내버린 사건을,
10년 전 우리 사회의 천박하고 이기적인 맨 얼굴을 보여준 그 사건 따위를
이제와 언급하고 싶지 않다.
기사에 의하면 가해자들은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사건의 경과와 결론을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반성하거나 후회할 필요가 없었겠지... 이미 지나간 옛 일이겠지...
가해자들의 시간 속에 그 일이 기억이나 되고 있을까...
2.
영화는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인 공주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간 후의 생활과 과거의 사건이 교차돼서 보여진다.
공주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공주의 마음을 잘 읽을 수는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말간 얼굴로 수영을 배우고, 함께 지내게 된 선생님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도 새로운 생활에 담담히 적응한다.
자신의 꿈이었던 노래도 몰래 해보고, 불안하지만 친구의 성화로 카메라 앞에서 노래하는 연기도 해본다.
친구가 인터넷에 올린 영상때문에 화를 내기도 하지만 친구에게 사과하려고 수첩에 미안하다고 적기도 했다.
가해자들의 부모들이 학교로 공주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 쪽지를 전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공주는 짐을 싸는 아이로 기억된다.
영화가 시작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짐을 싸고,
선생님 어머님 댁에서 어머님의 치부를 본 날도 조용히 짐을 싸고,
어머님이 자신의 치부를 알게 됐을 때도 짐을 싼다.
나는 불륜으로 몰려서 길에서 봉변을 당한 선생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날
공주가 짐을 싸서 나오던 모습에 혼자 울컥했다.
왜 그 때 공주는 짐을 쌌을까.
공주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가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 공주는 짐을 쌌다.
본능적으로 공주는 알았던 것일까.
치부가 드러나는 순간 세상은 공주를 내쫓고 그 세계와는 단절된다고 공주는 생각했던 것일까.
그 사건을 겪고 공주가 알게 된 세상의 이치는 무엇이었을까.
짐을 꾸리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공주도 모르고 주변의 어떤 어른도 모른다.
"사과를 받는 건데 왜 내가 도망을 가야 해요?"라는 공주의 말처럼 공주는 피해자지만 어디론가 가야 하는, 사라져야 하는 아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선생님도 모두들 공주를 부담스러워 할 뿐이니까.
다시 시작하고 싶어질 지 모른다고 수영을 배우려 애쓰던 공주인데 공주는 어디로 가야 했을까. 어디로 갈 수 있었을까.
3.
영화에서 가장 기가 막힌 두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공주의 학교로 쫓아 온 가해자들의 부모들 중에 한 명이 공주 앞에서 주저 앉아 울면서 이렇게 말할 때였다.
"오늘이 우리 아들 생일인데 너 때문에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을 못 먹이고..."
그 부모의 말은 너무 진심이었다.
아이 생일에 미역국도 못 먹이고 떨어져 있는 것이 가슴에 사무치는 것이다.
나는 정말 소름이 돋았다. 너무도 순수한 이기심과 뻔뻔함에 기가 막혔다.
다른 하나는 동윤이 아버지가 동윤이를 데려 가는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그 지옥에 공주도 화옥이도 모두 버려 두었고 가해 학생 어느 하나 혼내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아이만 데리고 나갔다.
자신이 자신의 아이만 데리고 나간 후에 어떤 일이 계속될지 그는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윤이 아버지는 오로지 동윤이만 데리고 갔다.
내가 이 두 장면을 꼽은 것은 아마 그들의 행동에 사랑도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관심이나 냉대, 편견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식만을 사랑했다. 남의 아이는 무슨 일을 당해도 상관이 없었다.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진 장면이어서 그렇지 영화 속 모든 인물들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해도 된다. 나만 아니라면, 내 가족만 아니라면.
내 학교의 학생이 무슨 일을 당했건, 내 지역의 아이가 무슨 일을 당했건
내가 곤란하고 불편하고 피해를 입을 수는 없다는 어른들이 공주를 내몰았다.
학교는 전학을 시키고, 시에서는 공주의 생활비를 대주지만 동시에 가해자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도 함께 한다.
피해자는 없던 사람인 것처럼 치워버리고, 사건은 적당히 묻고 그저 평화로웠던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고 그런 세상에서 한공주들은 살고 있다.
4.
영화를 본 후 나는 어디쯤 서있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전학 간 학교로 쫓아와서 탄원서에 서명을 하라고 공주를 닥달하는 가해자들의 부모들은 문자 그대로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내가 그 가해자들의 부모였다면 나는 어땠을까.
다른 아이는 돈으로 탄원서를 받았다는데 내 아이를 위해서 받아내고 싶지 않았을까.
나는 공주의 새 학교로 찾아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건방진 말이지 모르지만 나는 혐오스러운 가해자들의 부모처럼은 안 할 것 같다.
최소한 그렇게는 안하고 살고 싶다.
그런데... 그 다음은 모르겠다.
천하의 나쁜 놈들이라며 가해자들을 비난해 놓고도
짐을 싸서 나가는 공주를 잡지 않은 선생님의 어머니나
공주가 안쓰럽기는 하지만 부담스럽고 골치아파 보이던 선생님이나
인터넷으로 공주의 피해 영상을 보고 결국 공주의 전화를 받지 않은 친구나
내가 그들이었다면 달랐을까.
나는 달랐을 거라고 말 할 수가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영화를 본 후 더 마음이 무겁고 슬펐다.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해도,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세상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하지는 못하겠구나.
내가 나와 무관한 이들을 위해 애써본 적이 없고,
세상의 편견과 다른 시선으로 그들에게 손을 내민 적이 없으니
최소한 세상에 도움을 청하고 세상이 야박하다고 탓하지는 말자 뭐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비겁한 패배주의자지만 최소한의 염치는 있는 인간이고 싶으니까...
5.
영화의 마지막에 그렇게 항상 꾸리던 짐을 두고 공주는 물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공주를 응원하는 듯 "한공주! 한공주! 한공주!..." 하는 목소리가 들리면서 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공주의 모습이 잠깐 보였다.
공주는 과연 다시 살고 싶어졌을까. 그랬다면 제대로 헤엄을 칠 힘은 있었을까.
'give me your smile, let me smile' 이라고 공주는 노래했다.
내가, 우리가, 우리 사회가 이 노래에 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