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에 관한 페이퍼를 두어 번 올린 바 있는데, 관련기사가 눈에 띄어 다시 옮겨둔다. 하던 일이니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모종의 책임감에 떠밀려서. 일단,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란 제하에 오르는 무대 소개.

한국일보(06. 03. 23)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무대에 오른다. 27일 대학로 라이브소극장에서 열리는 ‘제1회 문학 나눔 콘서트’. 새로운 시 세계를 선보이며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 강정, 황병승, 김민정씨가 나와 자신의 삶과 문학 이야기를 나눈다. 인디록밴드 ‘모레인’이 이들의 시와 호흡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연극연출가 박정의(극단 초인)도 배우들과 함께 시를 테마로 한 퍼포먼스를 선뵐 예정이다. 진행은 소설가 이명랑씨가 맡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사이버문학광장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문학 작품을 책 바깥으로 끌어내 작가와 독자가 서로 소통하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첫 회 참가 시인들은 서정과 서사, 뚜렷한 시적 메시지 등 전통적인 시의 소통 구조를 배격하는 대신 내면에 밀착된 언어에 천착해온 이들이다. 이들을 두고 시인 강정은 “그들은 애당초 공공의 광장이란 걸 믿지 않”으며 “그 허물어진 공간을 제 멋대로 부유하며 (바퀴벌레들처럼) 자신들만의 진지하고도 즐거운 놀이에 전념한다”('한국일보' 12월12일자 ‘강정의 나쁜 취향’)고 말한 바 있다. 첫 회 제목은 그의 이 언명에서 차용됐다. 공연은 무료이며, 모든 관객들은 시인들이 서명한 작품집을 받을 수 있다. 4월에는 소설가 김종광 이기호와 황신혜밴드, 5월에는 젊은 서정시인 문태준 손택수 신용목이 참여해 무대를 꾸밀 예정이라고 주최측은 밝혔다.

그리고 참고자료로서 '젊은 바퀴벌레'의 명명자이자 그 자신 '쇠잔한 바퀴벌레'이기도 한 강정 시인의 기고문 "시인공화국의 젊은 바퀴벌레들"(<무비위크> 199호).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얼마 전, 한 젊은 시인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자리에 갔다가 어질어질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지인 몇몇이 모여 단촐하게 한잔하는 자린 줄 알고 밍밍하게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 모인 사람들의 수와 면면에 새삼 놀란 것이다. 시집출판기념회가 그토록 ‘뻑적지근’하게 펼쳐진 건, 내 기억으론 거의 10년 만의 일이다. 그 잊혀진 10년 사이, 내가 시의 바깥에 있었거나 시가 나의 바깥에 있었거나 둘 중 하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젊은 시인들에게 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어떤 독립적인 삶의 거점처럼 여겨졌다.


-고종석의 표현처럼 우리나라는 이른바 ‘시인공화국’이다. 인구 대비 시인의 숫자를 봤을 때도 그렇고,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와 불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집을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들의 ‘시인 모시기’를 봐도 그렇고, 아주 가끔 특정 시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기이한 독서풍토를 봐도 그렇다. 출판사 입장에서 봤을 때 시집 출간은 숫제 시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가깝다. 이윤은 고사하고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거늘 소위 정통문학을 표방한 출판사들은 끊임없이 시인을 배출하고 시집을 출간한다. 시를 문학의 본령이라 여기고 숭상하는 풍조가 여전히 남아있는 탓이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대한민국 시인공화국은 여전히 번성중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 가을에 출간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유독 많다.


-기형도의 죽음 이후, 대략 15년 동안의 무관심과 침묵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 정도로 최근 젊은 시집들의 득세는 심상찮은 기미가 있다. 이들의 연령대를 훑으면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걸치지만, 나이와는 무관하게 이들의 시 세계는 개인의 경험을 환상적 이미지와 자폐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중음악과 영화, 컴퓨터 문화에 대한 탐닉 등은 이들의 무의식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가 될 만하다. 과잉되거나 뒤틀린 자의식으로 무장하거나, 유약하면서도 섬세한 어조로 삶의 스산한 비의를 읊조리는 이들 감수성의 촉수는 외부세계로 뻗어있기보다는 자아의 심부를 향해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소통불능의 자폐적 진술로 흐르지만, 그 자폐는 의외로 고집스럽고 사나워 역설적인 자기과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시적 에너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시가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는 예민한 성감대’라느니 하는 말들을 믿지 않는다. 시는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기 보다는 한 개인의 아픔과 고뇌를 세상 전체의 아픔으로 변용시키는 힘을 ‘때때로’ (자주 쓸 수 있다면 그건 힘이 아니다)가졌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삶의 무미한 디테일들을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전환시켜 스스로의 내구성을 다지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엿보이는 자폐적인 이기성을 나는 존중한다. 동시에, 천성적인 유약함을 내밀한 읊조림으로 치환하여 스스로의 껍질을 두텁게 하는 그들의 타고난 ‘비사교성’에 더 강퍅한 지지를 보낸다.

 

-대의에 얽매이거나 시류적인 일반론의 강박에서 벗어난 그들의 ‘사적 언어’는 한 개인의 편협한 광증과 무기력함이 편의와 실용으로 무장한 21세기적 속도의식에 맞불을 지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의 경우, 시란 세계보다 먼저 가는 게 아니라 세계보다 늦게 가거나 아예 가지 않음으로써 저 혼자 아득바득 빛나고 저 혼자 용케 신성하거나 철없이 솔직하게 만드는 특별한 자기치장술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왕따’ 당하지만, 그 왕따는 시를 씀으로써 선점하게 된 특출한 고독이나 진배없다. 그 고독은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언정, 적게나마 목격한 이들에겐 일방향의 삶을 근원부터 다시 살피게 하는 끈끈한 설득력을 지녔다. 따라서 나는 시인들의 언어가 좀 더 거칠고 생경하고 느리고 육감적이길 바란다. 극단적으로 말해, 첨단의 주방 귀퉁이에 알을 슨 바퀴벌레처럼 느닷없이 악명 높아지길 바란다.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일말의 악의 없이 파문을 일으키며 미련하게 잠든 세상을 가끔씩 놀래켜 주는 것. 그게 시의 존재의의고 시의 존재방법이며 시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자기방어이다. 시인공화국은 시의 궁창이자 시의 궁전이다.

 

이어서 시인 강정의 신작 시집을 소개한 연초의 기사. <시인 강 정 “나를 뒤집는 전복의 힘으로 시를 쓰지요”>란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국민일보(06. 01. 08.) 지난해 12월말 시인 강정(35)은 홍대 앞 모처에서 인디밴드 ‘모레인’과 특별한 공연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대수의 ‘하루 아침’을 비롯한 올드록 넘버 세 곡을 부르고 자신의 시 두 편을 즉흥연주에 맞춰 낭송했다. 시와 음악과 산문을 아우르는 그이기에 가능한 장면일 것이다. 강정이 10년만에 펴낸 두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문학동네, 2006)은 거친 록 사운드에 실려 전해지는 공연장에서의 그의 격렬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낭송했다는 ‘들판을 달리는 토끼’의 한 대목을 소리내 읽어본다.

“토끼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리는/ 당신이 밤새 두드리는 머릿속의 열기 한가운데 너른 벌판을 열고 뛰어나올지 모른다/ 토끼라는 것이 가벼운 발과/ 소리나지 않는 입과/ 가늘게 찢어진 눈 옆에 길고 뾰쪽한 두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불만을 표시해도 괜찮고/ 박수를 치며 환영해도 나쁘지 않다/ 토끼는 어쩌면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 있으므로”

 

-‘들판을 달리는 토끼’는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겨울호)에 발표했을 때부터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시다. 찢어진 눈이며 껑충한 귀며 강정을 본 순간,어쩌면 우리가 찾던 토끼가 바로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가까운 친구인 시인 이준규가 제목의 영감을 주었는데,30분만에 써내려갔지요. 제목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만든 르네 클레망의 작품에서 따왔어요.”

 

 

 

 

 

 

 

 

 

 

 

-30분만에 무려 80행을 써내려간 그의 머릿속 열기가 훅 끼쳐왔다. 스무 두살에 등단해 1996년 첫 시집 ‘처형극장’을 내놓은 이래 그의 탐미적인 언어는 시를 떠나 음악 미술 영화 등 다채로운 영역을 종횡하며 날카로운 감수성의 표창을 날려왔다. 2000년대에 등장한 황병승 장석원 김행숙 등 젊은 시인이 이른바 ‘미래파’로 지칭되기 전,말하자면 그는 10년전부터 미래파의 선두 주자였다. 그는 한 연재글에서 스스로를 ‘한 쇠잔한 바퀴벌레’라 칭하는 한편 이들 미래파 후배 시인들을 ‘바퀴벌레’라 호칭하며 이들의 약진에 지지와 옹호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바퀴벌레는 낡은 공간을 부식시키고 냄새를 풍기지요. 이 친구들의 존재 방식은 사물을 흉물스럽게 바라보는 느낌 그 자체에 있는데, 일상적이지 않고 낯설다 뿐이지 실은 그들의 시에 새로운 세계의 총체성의 기미가 꿈틀거리고 있어요.”

 

-표면에 떠 있는 감정들을 슬슬 건드려주는 정도의 신서정 계열의 시편들은 비록 대중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진검승부를 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결핍의 언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단이 되어야 해요. 자기가 써왔던 것,했던 것을 까뒤집는 전복이 필요하지요. 요즘 들어 이성복 시인을 제외하고는 선배시인 가운데 그런 전복의 힘을 본 적이 없어요. 근래의 서정시들은 거개가 ‘자기가 눈 똥을 보고 이쁘다’고 자평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하지요.”

 

-이번 시집 가운데 표제시는 빼어난 수작으로 꼽힌다.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강정의 시적 매커니즘은 우주와 몸의 대비에 있다. 빛까지 빨아들이는 우주의 카오스처럼 모든 것을 뒤섞어버리는 혼돈성,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들,성적이고 관능적 환상들,끝까지 규정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색…. 그는 언어가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 감각의 허물을 벗어던진다. “우리 시보다 외국의 번역시를 읽을 때 언어를 뛰어넘는 느낌을 받아요. 언어를 삐딱하게 놓는 행위랄까.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들,뒤섞여 나오는 것들…. 사람도 잡종이 더 이쁘잖아요. 시를 쓰면서 모국어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마음의 모국을 떠나 외계를 발견하는 우주인,그게 시인이지요.” 강정은 우리 시단의 블루칩이다. 

 


 

 

 

 

 

 

 

시인의 마지막 발언에서 시인/평론가 이장욱이 이 '바퀴벌레 시인'들을 다룬 글의 제목을 '외계인 인터뷰 - 시적 윤리와 질문의 형식'라고 붙인 이유가 절실하게 드러난다. 지구 종말 이후에도 살아남을 이 시인들이 굳이 국적에 연연하겠는가?!..

 

06. 03. 23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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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정오의 희망곡'을 읽기 위하여

 

 

 

 

시, 소설, 비평, 게다가 러시아문학 연구자로서 '토탈 플레이'를 펼쳐보이고 있는 이장욱의 신작 시집이 나왔다.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 사실 나온 지는 좀 됐다. 한데, 아직 책을 받아보지 못한지라(저자 사인본을 보내줄 거라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 몇 마디 거드는 걸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언론에서도 비교적 비중있는 리뷰들을 싣고 있어서 일단은 한 곳에 모아놓는다(참고로, 인용하는 일간지들의 게재일자는 인터넷상에서 옮겨왔을 경우 실제 게재일과는 하루 정도 차이가 난다). 개인적으로 부탁을 받은 바 없지만 그래도 좀 띄워주는 게 의리가 아닌가란 생각에서. 그리고, 혹 잠재적인 독자가 <정오의 희망곡>을 읽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서. 인용문에서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중앙일보(06. 04. 21) 2월 14일 정오 서울 프레스센터. 창비 40주년을 앞두고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거기, 백낙청 선생 옆 자리, 공부 잘하게 생긴 청년 하나 앉아있었다. 농 섞어 질문을 던졌다. "거기 앉아있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 대답은, 제법 다부졌다. "제가 여기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오늘 창비의 모습입니다."

-그의 이름은 이장욱. 1968년생이고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87학번이다. 94년 시인이 됐고, 여태 평론집 두 권과 시집 한 권, 장편소설 한 권을 발표했다. 처음 썼다는 소설은 지난해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많지도 않은 나이에 시도 짓고 평론도 하고 소설도 쓴다는 얘기다.

 

 

 

 

-그가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을 발표했다. 시는 각오했던 대로 난해하다. 온전히 해석한다는 게 사실 무리다. 그는 평론가 권혁웅이 명명했던 이른바 '미래파'의 핵심 당원. 다시 말해 그의 시는 소통 기능이 미미하다는 말이다. 인칭과 시제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극단을 추구하는 갖가지 실험 자체가 그의 시 세계란 뜻이다.(*사실 김소월의 어떤 시들도 상당히 난해하므로 '난해성' 자체가 시의 결함은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난해함인가 하는 것.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주는.) 

-굳이 참견한다면, 그에게선 지식인 냄새가 난다.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난무하는 욕설과 흥건한 성적 암시 따위가 그에겐 없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이상의 '오감도'가 연상되는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에서 현대를 사는 도시인의 우울과, '너에게 나는 소문이다./나는 사라지지 않지./나는 종로 상공을 떠가는/비닐봉지처럼 유연해.'('근하신년' 부분) 같은 대목에서 기존 질서를 거역하는 부정(否定)의 시학이 읽힌다고. 그러면 시인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래, 맘대로 해. 나는 너를 피해 먼 곳을 돌아갈 테다. 우리 만나지 말자.'('비열한 거리' 부분)

-이장욱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자투리를 제공한다. 그는 진짜로 공부를 잘한다. 아니 열심히 한다. 그는 집 근처 독서실에서 입시생과 나란히 앉아 시를 짓고 소설을 쓴다(이런 시인, 처음 봤다). 그리고 그는 비밀결사 '빨간 바지'의 조직원이다. 권혁웅.김행숙.장석원.여태천.하재연 등 고려대 출신 또래 시인들의 시 합평회 모임이다.

-권혁웅에 따르면 시 두어 편을 두고 몇 시간씩 토론하는 지루하고 밋밋한 모임이다. 여태 외부에 알려진 적 없어 비밀결사란다. 이장욱은 98년부터 암약했다.(*이들이 '빨간 바지' 마피아들이다. 우리 시단의 전복을 꿈꾸고 있는?) 두 달 전 그는 창비의 신임 편집위원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건 필경 뉴스였고 일종의 난센스였다. 그럴 수밖에. 그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최전방 어딘가에 서있기 때문이다.(손민호 기자)

 

한국일보(06. 04. 22) 이장욱씨의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속의 시적 주체들은 엉뚱하다. 너무 엉뚱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이는 시인의 시적 자아의 엉뚱함이라 해도 무방할 듯 싶다. 그의 시들은 ‘나, 당신, 우리, 그, 그들’ 등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수많은 인물들로 북적거린다. 종잡을 수 없다 함은, 등장인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한 편의 시 속에서도 하나의 캐릭터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표제작)

-‘당신’과 ‘나’의 감쪽 같은 탈바꿈, 혹은 시적 화자의 자리바꿈이 해명되는 유일한 단서라면 ‘우리는 우호적’이라는 아주 느슨한 연대감일 것이다. 그들은 그 느슨한 연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냉소적인 자’들을 어렴풋이 냉소한다. 그 배경 음악은 슬프게도 ‘정오의 희망곡’이다.

-그의 시에서는 시적 주체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역시 엉뚱하다. “오 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결정’)오고, “10년 후의 1루 베이스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10년 후의 야구장’)간다. “여름의 잎새들 사이로 12월의 눈이 내”(‘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메모’)리고, "수도관의 저편에서 빙하의 이동이 시작”(‘지진’)된다. 시간과 공간, 주체가 뫼비우스의 띠로 꼬아놓은 새끼줄처럼 그렇게 종잡을 수가 없다. 그 엉뚱한 시공간 속에서 엉뚱한 주체들은 ‘좀비 산책’을 하고, 길을 가다가 펭귄을 만나기도 한다.(‘엉뚱해’)

-세상이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세상이 그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근대의 이성, 그 강박적 질서의식이 세상의 종잡을 수 없음을 정돈해 우리 인식 속에 체계화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 인식은 질서 강박의 거푸집으로 주조된 가짜일 것이다.

-이들 시적 주체들의 종잡을 수 없음은 그 종잡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거나, 냉소이거나, 위로이거나, 견딤의 방식은 아닐까. 그래서 마치 좀비라도 된 듯 산책도 하고, 도시 한복판에서 펭귄을 만나는 공상도 하고, 코를 맞대는 아프리카식 인사를 해보는 것(‘아프리카 식 인사법’)은 아닐까.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중독’ 부분)

-시집은 엉뚱한 세상을 향한 엉뚱한 저항과 냉소와 위안과 희망으로 풍성하다. 최소 저항으로 그 엉뚱함의 궤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삼차원을 ‘조용한 평면’으로 펴야 할지 모른다.(최윤필 기자)

'정오의 희망곡' 진행자 정선희씨.(라디오를 따로 듣지 않기 때문에, 내가 '정오의 희망곡'을 들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정의 레퀴엠'이나 가끔 들었을까?)

동아일보(06. 04. 27) 

-‘당신은 사랑을 잃고 / 나는 줄넘기를 했다. /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 넘실거리는 음악, /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정오의 희망곡’에서)

-이장욱(38) 씨는 시인이고 소설가이며 평론가다. 등단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 씨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김민정 황병승 씨 등 젊은 시인들의 실험시가 시단의 주요 경향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보다 앞서 쓰인 이 씨의 시도 주목받게 됐다.(*평론가 이장욱은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경향의 시인들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은 그런 실험 정신으로 가득하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언어인데 한 편의 시로 엮이니 낯설게 보이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은 인형처럼 걸어다녔다… 나는 어떤 편향도 없다 / 무슨 말인가 흘러나오려는 순간에 / 조용히 멈출 수 있다.’(‘가을에 만나요’에서) 인형처럼 생각도, 말도 없이 걷던 화자는 시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감정을 갖는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다. ‘드디어 당신의 미소를 느끼며 / 나는 전진하였다 / 당신을 향해 / 한 발 한 발.’

-이런 독특한 작품들은 시에서 메시지를 찾는 데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당혹스러운 경험일지도 모른다. 이 씨도 “내 시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면서 “시 너머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는 편견을 갖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읽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한다. 시에 위대하고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보이는 그대로 읽으면서 언어미를 향유해 달라는 것이다.(김지영 기자)

(*)띄워준다고 해놓고서 시가 난해하다는 리뷰만 나열해놓았으니 이 또한 '수행적 모순'이 아닌가 걱정된다. 걱정을 덜기 위해서 샘플로 올려져 있는 시 '먼지처럼'을 읽어보기로 한다. "시 너머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는 편견을 갖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먼지처럼

나는 코끼리의 귀가 되어 펄럭거리고
너는 개의 코가 되어 먼 곳을 향하고
우리는 공기 중을 부드럽게 이동하였다.

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경이 되어
무한히 지나갔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
우리는 어지럽고 아름다웠다.
먼지처럼
음악처럼

오늘은 누군가 성수와 뚝섬 사이에서 사라지고
누군가 병든 유태인처럼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누군가 박물관의 입구처럼 조용해지고
아침에는 추리 소설 속의 탐정처럼 깨어났다.

노련한 사서들은 언제나 음악의 비유를 경계했지만
우리는 미래와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나는 내일도 기린의 목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너는 모레도 하마의 입처럼 무거워졌다.
우리는 삼십 년 후에도 가득한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

이 시의 퍼즐을 맞춰보기로 하자. 다른 시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에 여기서는 시인 고유의 어휘적, 통사적, 의미적 반복과 패턴을 재구성할 수는 없고, 단지 이 시에 한정하여 '보이는 그대로'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먼저, 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가이다(원론적으로 말해서 리듬은 반복에 의해서 만들어지기에 반복은 시의 필수조건이다). '우리는 이동하였다', '우리는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가 이 시의 핵심 의미소이다. 묘사되고 있는 나머지 대상들은 이 이동중에 보게 되는 '우리의 배경'이다.   

'우리' 자신을 '먼지'에 비유하고 있는 이 시의 시적 세계관은 허무주의이다. 먼지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의 유구한 상징이기에. 어차피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기꺼이 코끼리이고 개이고 기린이고 하마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그 '먼지적 세계관'의 허무주의를 부드럽게 허락하고 수용한다. 그건 이를 테면 체념이다. 이 체념적 정서에서 '욕망'이 배태될 리 없다. 화자는 다만 관조할 따름이다. 바람결에 떠도는 먼지 같은 세상과 세월과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먼지처럼' 그냥 " 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그러한 관조적 허무주의이다(풍경 자체가 허무주의의 산물 아닌가?).

모든 의미가 증발해버릴 만한 의미의 영점, 혹은 '가장 짧은 그림자'를 거느린 정오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용 없는 아름다움'으로서의 음악일 뿐(이런 시의 계보의 우두머리에 김종삼을 앉힐 수도 있으리라. 중간 보스쯤에는 박상순을)."우리는 미래와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포즈를 취하고.

그런데, '피아니스트'로서 이장욱이 연주하는 음악은 지극히 모던해서, 독자의 이지를 자극하기는 하지만 정서적인 감화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한 음악이 '정오의 희망곡'이란 표제로 배달되는 것은 또한 지극한 유머이다. 그 유머에 어떤 트라우마가 배어 있는 것인지는 나는 아직 알지/확인하지 못한다. 하니 나는 당분간 그의 시의 배경으로만 남도록 하겠다...

06.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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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 시인선 315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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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성과 현대적 이미지를 마음껏 교차하는 그의 두번째 시집, 평론가라는 직업도 가지고 있는

그의 두번째 시집은 좋다. 시집을 그저 좋다고 평가하는 것은 정말 허무한 평이지만

그의 시집에는 균형미가 있으며 다른 언어로의 혁신 또한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 답답하고 신선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시집의 부분은 "근하신년- 코끼리군의 엽서"의 마지막 부분에

시로서는 유치할수도 있는 [널 사랑해] 라는 문장을 제일 마지막에 배치했음에도 불구

서정성의 유치함을 담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치함은 그의 모든 시에서 실종되었다. 모든 문장에 붉은 신

호등처럼 마침표를 찍어 놓은 그의 뚝심 또한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다.

신선한 문장들로 약간은 눅눅한 시들을 쏟아낸 그의 시집을 보면서 나는 감탄한다.

이장욱은 좋은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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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문학과지성 시인선 322
이준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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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규 시인의 흑백, 정확히 다 읽었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 시인의 작품에 하나의 리뷰가 달려있지 않은 것이 섭섭해 이렇게 글을 남긴다.

정과리 교수의 해설이 덜 익은 감처럼 달려있는 이 시집은 새로운 언어랄까 아주 새롭지는 않지만

요즘 문단의 기류와 얼추 맞아가는 그런 류의 미래파는 아니지만 따라가는 듯한 시집이다

그러나 정확히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 속에서 서정성은 망각당하고 희망은 늙은 단어 취급 당한다.

문장력의 압도보다는 단어 선택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단어들의 단조로운 배열이 꾀 많은 편인데

그런 배열에도 단어들이 죽지 않고 입속에서 읽혀간다는 것은 좋은 글쓰기라고 보고 싶다.

기대되는 시인이다. 흑백이후의 세계를 더 거대한 세계를 그려주었으면 한다.

별 네개를 준 것은 아직 정확히 그의 시집을 정확히 읽지 못한 나의 불찰일 뿐

크게 관여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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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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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객관화적인 시선으로 일명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일상을 보내는 따분하지만.. 어떤 의미로서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나의 주변에 친구로 존재한다는 것이..나에게는 일단의 의미로서... 축복일지도 모른다..이 친구로 인해서.나는 상실의 시대를 보다 폭 넓게 더 뛰어나게
볼 수 있었다..

와타나베는 성장하여 가는 젊은이 였고 그의 주변에는 변화의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친구의 애인이었던 나오코가 있었다. 나오코는 그에게 객관화의 기준을 흐트러뜨리고 그에게 삶의 의미를 재정립 할 기회를 준다. 절대적 순수 그 것에 가까운 것에 대한 상실로서 그에게 깨달음을 준다. 와타나베는 그가 먼저 접근해서 얻은 인간관계가 없다.. 그는 자신의 영역을 보여주기 보다..타인이 다가오길 봐라는 그런 인물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타인의 다가옴을 그리 원하는 것 같지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여튼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죽음으로서 인생은 객관적으로 나만의 영역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이것에 대한 혼동속에서 안정을 찾기위해... 미도리에게 위안을 찾으려 한다..마지막 장면.'지금 어디에요?'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와타나베는 혼란속에 상실에 대한 슬픔속에서 새장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하는 한 인간의 혼란에 가깝다고 난 생각한다..

그럼 와타나베의 거짓 연인 나오코는 어떤 인물인가..나오코는 불우한 가정사와 자신의 영원한 불멸한 배필이라고 생각했던..자의 죽음으로 서서히 자신의 틀에 갇히다..창살에 찔려죽은 작은 새였다.. 이 작은 새는 자신의 운명에 끼인 불행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불운이 일으킨 살인이였다.. 미도리... 순수의 의미로서 나오코보다 훨씬 자유스로운 여성이다.. 그녀는 와타나베의 영역을 사랑하는 그런 자로서 이 소설의와타나베의 마지막 행로가 된다..

아..이렇게 짧은 분석이 끝났다..그리고 이 이상을 쓰기 위해서 나는 더욱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나는 상실의 시대를 아니 더 많은 책을 나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싶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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