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전출처 : 끼사스 > [퍼온글] 젊은 문인들이 생각하는 문학

요즘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는 젊은 문인들은 문학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유용한 지표가 될 만한 조사결과가 나왔다. 교수신문이 대략 1970년 이후 출생하고 2000년 이후에 등단한 신진문인들을 상대로 가장 과대평가된 문인은 누구인가, 다시 주목해야 될 문인은 누구인가, 가장 주목하는 동료 문인은 누구인가 등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를 짚어보는 특집기사들을 옮겨온다. 소위 '2000년대 문학'의 판도와 실상을 이를 주도하고 있는 젊은 문인들의 의식과 시각을 통해서 이해하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될 만하다. 기사에서의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교수신문(06. 09. 23) 유사이래 문학작품의 물량이 지금처럼 넘쳐나는 때가 없었다. 몇년 전에 비해 발표지면이 10배 이상 늘어난 탓이다. 그만큼 새로운 신진들의 작품도 쏟아져 나오고 그에 대한 비평적 리뷰가 필요한 시점이다. 교수신문은 외재적으로 신세대를 조명하기보다는 이들 신진문인 95명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았다. 과연 이들은 전세대 문학전통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문학적 모티프를 어떻게 만들어왔고 또 만들어나갈 예정인지를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고 이를 통해 향후 한국문학의 전개를 엿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편집자주)

[특집] 신진문인 의식조사(1) 조사결과를 보고

문학사가 보여주듯 어느 시기에나 문학의 새로움은 신진 세대들의 몫이었다. 2000년대 이후 문학판의 크고 작은 지각 변동 역시 기성문인보다는 새로운 세대들의 주도적인 움직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데 비평가의 촉수는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문학판의 흐름에 대해  이 새로움이 과연 어떤 진정성을 갖고 있느냐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그 진정성을 따지는 작업은 신진으로 부상한 문인의 작품을 읽고, 그 시비를 따지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길만이 전부는 아니다. 작품보다는 신진 세대의 문학적 의식의 근저를 훑어보는 방법도 매우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그들의 문학적 토대를 형성한 선이해의 바탕과 그들이 선망하거나 비판하는 작가들을 눈여겨 살피는 길이 그 중의 하나이다.

물론 한 작가나 시인의 문학적 의식의 근저를 더듬는 작업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들의 문학적 의식의 토대를 형성한 요소들이 다양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수신문’에서 젊은 문인들에게 설문으로 들고 있는 항목들은 이들의 문학적 의식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징검다리가 강을 건너는 훌륭한 다리가 되듯, 여기의 항목들이 비록 일부일지라도, 2000년대 새로운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지향 전체를 암시할 만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번 설문이 지닌 의미가 있다.

설문 중 필자의 관심을 끄는 항목은 우선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반응이다. 소설가들의 답변 비율이 동의 쪽으로 기울어진 듯하지만, 시인이나 비평가들의 입장은 동의할 수 없다는 쪽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보면,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문학판의 상황이 위기감으로 팽배해 있지만,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의식의 근저는 무엇일까. 이는 자기세대의 문학에 대한 당위성과 함께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은 아닐까. 문학은 소생 불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고 진화해야 할 시대의 명확한 목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체는 물론 젊은 작가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세대 의식’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젊음을 갱신과 진화의 무기로 인식하고 있다. 기력이 쇠한 늙은 문학이 아니라, 젊고 건강한 문학을 통해 시대에 대한 전망을 이끌어내려 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그 젊고 건강한 문학이 과연 어떤 문학인가. 신세대의 화살이 어느 과녁을 겨냥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물음에 간접적으로 답변을 얻을 수 있는 설문이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문인들, 과대 평가되어 비판이 필요한 문인, 새롭게 조명받아야 할 문인, 마지막으로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동료문인’ 등의 질문이다. 여기에 대한 신진 작가들의 답변은 매우 흥미롭다.

먼저 젊은 비평가들의 응답이다. 이들에게 비평을 문학의 한 장르로 인식하게 해준 김현의 존재는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김현은 우리 비평사에서 비평도 문학작품임을 실천비평을 통해 확인시켜 준 비평가다. 그런데 젊은 비평가들이 김현의 비평적 작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비평을 창작의 한 장르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비평 행위를 작품에 대한 단순한 해석과 평가만으로 인식하는 선이 아니라, 문학예술의 장내로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비평이 지닌 매혹을 경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비평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긍정적인 측면으로 이해된다. 시나 소설처럼 가독성을 지닌 비평이 존재할 때, 비평은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평이 창조적 비평만을 추구할 때는 텍스트에 대한 분석력과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방기할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젊은 비평가들이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자들이 텍스트를 현실과 관련시켜 구심적이면서 원심적으로 꼼꼼하게 읽는 김우창이나 유종호 같은 비평가들과 현실 인식과 예술성을 함께 보여주는 황석영 같은 작가들이란 점이다. 이런 비평가나 작가들의 영향권을 무시할 수 없다면, 이들이 생산할 비평적 작업의 방향은 일방적으로 텍스트 자체에 함몰되거나 텍스트가 현실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전락되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비평가들이 자기세대의 문인으로 전성태에 주목하고 있는 점도 이런 측면에서는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의 소설이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리얼리즘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성과 함께 새로운 소설미학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비평가들의 고민은 자기세대의 모든 작가나 시인들이 문학성과 함께 현실성이 잘 융합된 작품만을 만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젊은 시인들의 설문응답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만난다.

시인들의 응답에서, 자신들이 영향을 받은 시인들의 공통된 사항은 치열성과 실험성이다. 현존하거나 작고한 시인 중 영향을 많이 받은 시인들은 이성복, 김혜순, 백석, 김수영, 이상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에게서는 현실성의 문제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세대의 주목받는 시인으로 오면, 시의 경향은 실험성을 지닌 쪽으로 기울어진다.

젊은 시인들은 김경주, 황병승, 김행숙 등을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시가 지닌 상상력을 통한 실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의 영역에서 실험성 짙은 작품들이 성행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위 리얼리즘 시의 경향이나 서정시 계열의 시인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이미 주류에서 멀찌감치 밀려나 있는 형편이다. 영향을 받은 외국 문인으로 보르헤스나 보들레르를 우선 들고 있다는 점도 이들이 시에서 상상력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과장 평가된 시인의 첫 자리에 고은 시인을 두고 있음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젊은 시인들이 내세우는 새로운 형식과 실험 정신을 소위 미래파라고 명명하며, 그 가능성을 긍정하는 논의들이 일고 있지만, 아직 소통의 시문법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문학 위기론의 가장 큰 이유로 젊은 문인들 역시 독서인구 감소에 의한 문학시장의 협소 침체로 들고 있는데, 시의 영역에서 시도되고 있는 실험시들이 지닌 소통불능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런 현실적인 과제를 풀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의 응답에서는 시에서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본다. 영향을 받은 주요 작가로 김승옥, 오정희, 조세희, 이상 등을 들고 있다는 것은,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의식의 근저가 현실에 뿌리를 내린 상상력을 통한 소설미학을 추구한 작가들에 가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젊은 작가들이 자기세대의 작가로 주목하는 대상을 살펴보면, 김애란, 김중혁 등에 관심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 방식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민석, 김윤영 등 자기세대의 젊은 작가를 새롭게 조명해야 할  대상 작가로 내세우는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된다.

설문 응답에 나타난 결과들의 개관을 마치면서 내리는 결론은, 젊은 문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지향점은 새로움이란 것이다. 이 새로움의 추구는 새로운 세대가 응당 져야할 작가의 몫이다. 자기세대의 문학판을 만들어 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자들이 문인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새로움의 추구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진정성을 지니는 작품으로 읽히느냐 하는 점이다.(남송우 / 부경대, 국문학)

[특집] 신진문인 의식조사(2)소설가

젊은 작가들은 아고타 크리스토프, 파스칼 키냐르, 레이먼드 카버에서 오르한 파묵, 살만 루시디, 프랑코 모레티, 척 폴라닉까지 퍽 다양한 독서편력을 보여줬다. 선호하는 국내 문인도 박상륭에서 김승옥, 오정희, 이인성, 장정일, 천운영 등 범주가 넓다.

그러나 “문학사적으로 과대평가된 외국 문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7명이 공통으로 “하루키”를 꼽았다. 응답자들은 하루키에 대해 “초기작은 좋은데 후기로 갈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아쉬움 겸 불만을 표했다. 이는 그만큼 “하루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들의 삶”과 연관되는 부분일 수도 있다. 몇몇 작가들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하루키를 꼽기도 했다.

현존 국내 문인 중 ‘과대평가된 문인’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이는 이문열이다. “작품의 질에 비해 지나친 문학 권력을 보유”했고, “매체들이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해 반감이 든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의 문학에서 ‘문학적인 무엇’을 바라는 일에 회의적”이며 문학 자체에 대한 “정밀한, 문학적 평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하루키와 이문열에 대한 평가는 상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춘원 이광수 또한 3명이 ‘비판이 필요한 문인’으로 꼽았다.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과장된 수사로 점철된 문인”이라는 것. 김동인에 대해서도 2명의 작가가 “작가적 이데올로기의 실체가 보이지 않”고 “습작기적 자태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라고 평했다. 비교적 젊은 문인으로는 소설가 한강이 “특색이 없”어 “간혹 ‘누구의 목소리’인지 헷갈린다”고 언급됐으며, 김영하에 대해서도 “그의 문학에는 시대적 진정성이 없으며 그것은 전략적으로 제거된 것이 아니라 김영하 자체의 불완전함 때문이다”라는 일침이 가해졌다(*김영하에 대한 평가도 상식적이다. 다만, 한강에 대해서는 내가 별로 읽어본 바 없어서 잘 모르겠다. 최근에 읽은 그녀의 단편은 수작이었다).

문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해야 할 문인에는 세 명의 작가가 이승우를 거론했다. 이승우는 영향을 많이 미친 작가로 거론되기도 했다. 1981년 스물 한 살에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등단한 그는 이후 <생의 이면> 등의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이를 작품을 통해 명쾌하게 결론내린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가볍지 않아서인지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는 않은 편이고, 평단에서도 인기 주제는 아니었다. 이외에 젊은 작가들은 제3세계 문학에 목말라했다.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문학에 대해서는 알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며 보다 많은 번역·연구·관심을 주문했다.

“주목하는 동료 문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5명이 ‘김중혁’을 꼽았다. 한 작가는 김중혁에 대해 “작품의 소재는 아날로그적인데 이것이 또 디지털적이기도 하다”며 “디지털 요소와 아날로그적 요소가 잘 결합돼 있다”라고 밝혔다. 이는 작가적 테크닉에 대한 부러움으로 보인다. 평론가 김형중은 “기능적 가치로부터 해방된 사물들을 작품 속에 수집함으로써 인간까지 해방시킨다”고 ‘김중혁 論’을 펼친 바 있다(*<문학동네>의 가을호 특집이 김중혁을 다루고 있다. 젊은 세대, 혹은 '레고블록 세대'의 감성이 나와 다르다는 걸 알겠다).

<달려라 아비>의 주인공 김애란은 주목받는 만큼 평이 엇갈렸다. “젊고, 잘 쓰고, 인기많은” 김애란에 대해 몇몇 작가들은 “지금의 평가는 80년대 출생이라는 문학 외적 사실, ‘아버지를 부정하는 방식’에만 과도하게 치중됐다”라거나 “잘 읽힌다는 점으로 과하게 주목받고 있다”라며 ‘김애란’ 자체보다는 ‘김애란’에 과도하게 주목하는 평단을 비판했다(*김애란은 주목할 만한 작가이다. 다만, 평단의 그 주목이 다른 작가들에게도 두루 할애되고 있지 않다는 건 문제를 제기할 만하다). 

신예 작가들은 몇몇 작가들에게만 주목하는 비평에 불만이 많았다. 한 작가는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문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조명은 누가 하는 것이냐”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했다. “조명 자체가 문학이라는 사건을 ‘무대화’시키는 것이며 누군가를 새롭게 조명하기보다는 조명받을 기회조차 없는 신인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문학판 또한 얼마간은 '스타 시스템'에 의존한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문학판은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또한 ‘문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문인’으로 공선옥과 전성태를 꼽은 한 작가는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지평에서 담론을 펼치기 쉽거나 혹은 적합한 문학에만 먼저, 자주 손을 대는 경향이 있다”며 “김영하, 성석제, 전경린, 배수아 등이 그런 점에서 많이 노출된 반면, 훨씬 공력이 높은 공선옥, 전성태 등은 비춰지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문학의 위기를 초래하는 내적 요인으로 “몇몇 문예지와 비평가 중심으로 문학 판도가 좌우되는 것”을 꼽기도 했다(*공선옥에 대해서는 판단유보이지만, 전성태가 공들인 작품들을 쓴다는 건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한국 문학 위기론의 이유’에 대해 신진 소설가들은 “독서인구 감소에 따른 문학 시장 협소”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 외에 “문학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 “왜 한국 문학을 접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하는 현 교육 시스템의 결함”을 꼽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의 위기란 문학 내생적인 것”, “세계문학사에 비춰보더라도 한국문학은 이제 시작인데 위기라고 생각하는 인식 자체가 문제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문학이란 더 이상 ‘위기’라고 부를 만큼 커다란 것이 아니며 개인적인 향유와 소통의 차원의 것이다”라는 답변도 나왔다.(박수진 기자)

[특집]신진문인 의식조사 (3)시인

젊은 시인들은 공교롭게도 애증의 사제지간으로 얽힌 고은과 서정주를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시인으로 평가했다(*이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이다. 고은에 대한 평가에는 나도 동의한다). 한편, 주목하는 동료시인으로는 황병승과 김경주를 많이 꼽았다. 2000년 이후 등단한 시인을 중심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현존하는 작가 중에서 과대평가된 시인으로는 4명중 1명이 고은을 꼽았다. 이는 설문조사 문항 자체가 보기 없이 주관식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젊은 작가들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여겨진다.

고은 다음으로 이문열, 김영하, 신경숙 등 기존 문단에서 문학성과 상업성을 겸비했다고 인정받던 소설가들이 각각 2명으로부터 “과대평가 됐다”고 거론됐다. 작고한 문인으로는 “작품성보다는 권력 편에 선 삶의 과오가 컸다”는 이유로 5명이 서정주를 지목했다. 전세대를 매료시킨 서정주의 미학적 魔力은 통하지 않았다. 이 외에 기형도와 윤동주(3명), 김소월·한용운(2명) 순으로 나타났다. 교과서 첫머리를 장식하는 이들이 젊은 시인들의 의식 속에서는 ‘제대로 청산해야 할 과거’가 되고 있었다. 

70~80년대 민중시단을 선도했고,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고은을 과대평가 됐다고 평가한 주된 이유는 “목청과 활동반경에 비해 그다지 개성적이거나 뚜렷한 문학적 성과를 남겼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창비가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인 '신화'가 아닌가도 여겨진다). 실제 작품보다 ‘주변인’들의 주관적 평이 고은의 ‘이미지’를 굳혔다는 얘기며, 나아가 “근작들이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혹평도 더러 있었다. 시인 서정주는 “작품성만으로 평가하기에는 민족에 대한 과오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과대평가된 문인에 올랐다. 이처럼 신인들은 ‘민족’을 중요시 여겼다.

결국 고은과 서정주는 사회적 활동이 작품을 압도한 경우로 해석된다. 기형도에 대해서는 “요절시집에 붙은 문학평론가 김현의 해설이 크게 작용”했고 이후 “요절의 상징이 됐다”, “작품의 폭이 넓지 않고, 암울하며 서술적이다”는 평가가 주어졌다. 한 응답자는 시인 진이정이 기형도 못지 않게 뛰어나지만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기형도와 진이정에 대해서는 나도 짤막한 페이퍼를 쓴 바 있는데, '기형도 못지 않게 뛰어난 진징정'이란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윤동주에 대해서는 “유약한 센티멘털리즘에 도취된 청춘”, “혁명가와  저항시”라는 수식어가 과장됐다는 평가다. 외국 작가로는 “태작이 많고, 상업추수주의”인 점을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4명)와 무라카미 류(2명)를 꼽았다. 작품활동을 하는 데 있어 영향을 받았거나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는 백석(10명), 김수영(8명), 이성복·李箱(6명), 보르헤스(5명), 김혜순(4명), 보들레르(4명) 등을 꼽았다.

지난해 ‘시인세계’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현대시 1백년 최고의 시집으로 백석의 <사슴>이 꼽히기도 했는데, 한 젊은 시인은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만 단단한 갈매나무”라는 싯구로 백석의 시세계를 묘사했다. 고향과 추억, 언어의 순도, 유랑자의 시선으로 백석의 시는 많은 젊은 시인을 매혹시키고 있다. 이는 도회적 시가 유행하는 현대 시단에서 젊은 시인들이 향토적 서정을 갈망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시인 김수영에 대해서는 “현실에 직면하는 詩作”, “치열함에서 오는 새로움”, “첨예한 의식으로 구성된 산문”이란 평가가 뒤따랐으며, 시인 이상에 대해서는 “치열한 부정과 혁신정신”, “실험정신과 문제의식”이란 수식어와 함께 “청소년기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문학정신을 배우고 싶다”며 거론됐다(*20세기 한국시는 점차 '백석이냐 김수영이냐'로 정리되는 듯하다).

현존하는 시인 가운데 젊은 시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 이성복에 대해서는 “문학에의 진정성이 돋보인다”, “치밀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섬세한 감수성과 실험정신, 전통의 조화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현실에 대한 비유의 다양성과 시간초월성이 탁월한 작가”라는 추천사를 받은 보르헤스는 이 세대만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다(*개인적으론 80년대의 이성복이 그러한 문학사적 평가를 감당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시인 김혜순에 대해서는 “초기작에 비해 최근의 시가 더 좋은 시인” , “최승자와 더불어 늙지 않는 시세계” 등 의 이유가 조심스레 들어졌다. “천상의 노래를 지상으로 끌어내린 시인”, “현대성, 현실에 가장 탄력적 반응을 보인 시인”으로는 보들레르가 꼽혔다. 이밖에도 신경림, 김지하, 박상륭, 오규원 등에 각 2명씩 답했다. 하지만 이성복과 더불어 80년대 시단을 양분했던 황지우 시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탈-황지우'는 모처럼 눈에 띄는 현상이다).

새롭게 조명해야할 작고문인으로는 손창섭, 김종삼, 백석, 리처드 브라우티건 등을 각각 3명씩 거론했으며, 현존 작가로는 “노동과 삶의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준” 시인 김신용과 “도시적 감수성에서 자연, 사물의 존재성으로 돌아간 변화에 대해 주목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오규원이, “자기철학을 운동으로 밀고 나가는 신념에 동감한다”는 이유로 김지하가 나란히 2명씩 추천됐다.

낯선 이름인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깨끗한 스타일, 전혀 다른 새로운 소설”이란 이유로  몇몇 젊은 시인으로부터 주목받았다.올 7월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 중앙)를 펴내 문단 안팎으로 주목을 받았던 시인 김경주는 동료시인들로부터 “서정과 실험이 적절히 어울어진다”, “철학적 사유가 독특하다”, “땅에 발 딛고 쓰는 시인이 없는 세상에서 대비되는 시인이다”라는 평을 얻었다. 이밖에도 김행숙, 이준규, 김애란, 진은영, 김언이 2명으로부터 추천됐다.

한편 ‘‘근대문학의 종언’에 동의하는 가’라는 질문에 젊은 시인들 21명은 동의하지 못한다고 답했으며, 12명은 동의 내지 부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했다. 기타의견 2명은 문학은 ‘종언’이기보다는 ‘항상 시작’으로 여긴다는 마음가짐으로 답을 대신했다.

‘한국문학의 위기론’을 묻는 질문에는 “독서인구 감소에 따른 문학시장의 침체화”를 들었으나, “사적 생활로 흐르는 문학적 테마”, ”해외 유명작가들 베끼기에 급급한 상상력 부족”, “매너리즘 답습” 등도 문학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으로 파악됐다. “인터넷 문화 약진으로 인한 문학의 위상 변화”, “변화에 인색한 문단”, “편가르기와 특정작가와 평론가의 상호인정으로 인한 권위 독점”, “저질 작품 과잉생산” 등의 의견도 잇달았다. 하지만 “위기론은 일상적 수사일 뿐, 한국문학은 독자와 너무 많은 소통을 원하는 건 아닌가”, “자본주의 구도에서 자리변화일 뿐 생산담론 형성이 더 중요하다”는 등의 희망적 견해도 있었다.

젊은 시인들의 주요 창작 모티프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 및 ‘독서’가 가장 많았다. 독서는 대부분 문학 외에 철학서와 예술, 영화관련서들을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상의 모든 것이 모티프”라고 말한 시인도 있었다.(신정민 기자)

[특집]신진문인 의식조사 (4)평론가

30대 젊은 문학평론가들은 현존 문인 가운데 소설가 이문열과 무라카미 하루키를, 작고한 문인 중에서는 시인 李箱과 서정주를 과대 평가된 문인으로 꼽았다. 최근 가장 주목하고 있는 문인으로는 소설가 전성태와 시인 황병승을 추천한 평론가들이 많았다. 이번 교수신문이 실시한 의식조사에서 문학평론가는 모두 31명이 참가했다. 30대를 중심으로 40대 초반까지 평단에서는 젊은 편에 속하는 평론가들이다.

문학평론가 31명 가운데 7명은 국내, 국외에서 과대평가된 문인으로 각각 이문열과 무라카미 하루키를 들었다. 소설가 이문열은 △정치적 발언의 의미 파장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의 결여 △초기의 탁월한 미적 재능이 단조롭고 틀에 박힌 정치적 의식으로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한 점 △정신과 지향의 불구성 △봉건성 등 주로 보수 우파의 입장을 대변했던 정치적 행보에 따른 ‘과대평가’ 요인이 많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는 지나친 상업성에 대한 지적이 많았는데 상품으로서의 문학, 세계시장과 문학의 관계에서 그가 미친 영향에 대한 성찰 필요, 일시적 유행 모드라는 지적이었다. 20살 초반의 감수성에 기댈 뿐이라는 혹평도 있었다.
이문열에 이어 고은(3명), 문태준(2명), 신경숙(2명), 공지영(2명)도 과대평가 문인으로 꼽혔으며, 답변이 적었던 외국에서는 하루키 외에 귄터 그라스(2명)도 비판이 필요하다는 응답이었다.

작고한 시인 李箱과 서정주는 각각 5명이 ‘과대평가’ 됐다고 말했다. 李箱은 그의 시세계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명과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인식이 많았고, 작품에 대한 신비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정주는 친일 행각과 전두환 정권 찬양 등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실에 영합하는 태도와 문학권력에 의해 그의 작품들이 교과서를 비롯 대중들에게 많이 소개되는 바람에 다른 뛰어난 시인들의 작품이 사장되거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새롭게 조명해야 할 문인으로 소설가 박태순이 유일하게 중복(2명) 답변이 나왔고, 공선옥, 김애란, 배수아, 임헌영, 장정일 등 23명이 거명됐다. 작고한 문인 가운데서는 김사량, 김종삼, 김소진이 각각 2명씩 의견이 모였다. 이태준 등 월북 작가 재평가 지적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김사량은 식민지적 삶의 극단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문학적 성과에 비해 전집조차 발간되지 못한 상황이 한심스럽다는 평가가 나왔다.

평론가들이 최근에 가장 주목하고 있는 문인으로 꼽힌 소설가 전성태(3명)는 종전의 리얼리즘과는 달리 그의 소설은 환상을 품고, 공간도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않는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크게 봤다. 여전한 문제의식을 다른 각도로 볼 여지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 모순의 진중한 고민도 한몫을 했고,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이유로 들었다.

시인 황병승(3명)도 주목하고 있었는데 시의 새로움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시의 정치성에 대해 새롭게 사고하게 해준다고 평가했다. 한 평론가는 “시는 황병승 전후로 나뉜다”라고 극찬했다. 생물학적 성을 넘어선 여성적인 비평, 폭넓은 교양과 작품을 보는 깊은 눈과 유려한 문체 등을 이유로 신진 평론가 신형철(2명)도 주목을 받았다.

문학평론가들이 시인, 소설가와 달리 가장 두드러진 의식을 드러낸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데 대한 동의 여부 였다. 소설가는 동의한다는 입장이 앞섰고, 시인은 두 배 정도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으나 평론가들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21명)이 ‘동의한다’는 답변(4명)보다 압도적이었다(*나로선 동의한다는 쪽이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자체가 고진의 관점에 원용하자면 이미 근대문학의 종언을 함축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제기의 진정성엔 동의할 수 있지만 한국적 맥락에서 굴절돼 논의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가타라니식 의제 설정 자체에 동의하기 힘들다는 이유를 제시했다.

‘한국문학 위기’의 원인을 묻는 질문엔 낯익은 비판들이 쏟아졌다. ‘독서인구 감소에 따른 문학시장의 협소·침체화’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으나 기타 의견도 많았다. “위기를 늘 품고 있어야 모색도 치열해 질 수 있다는 문인들의 자기 암시도 한몫을 한다”, “문학만 위기일까”를 들기도 했다. 또, 문학의 권력화와 아카데미화(대학중심의 문학판)에서 찾을 수 있다는 지적도 어김없이 나왔다. “절대적인 독서 인구는 결코 줄지 않았다. 한국문학은 지식독자층 뿐만 아니라 대중으로부터도 ‘왕따’를 당하고 있다. 작가들은 대학교수(평론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쓰고, 평론가는 그 장단을 맞추고, 그들이 쓴 평론(논문)은 오직 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만 읽힐 뿐”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문학평론가들이 가장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선배 문인으로 황석영(4명)이 가장 많이꼽혔다. 다음으로 유종호, 오정희가 3명씩, 김우창, 백낙청, 조세희, 최인훈도 2명씩 응답했다. 외국의 문인 중에서는 밀란 쿤데라(4명), 가라타니 고진(2명), 귄터 그라스(2명), 마르께스(2명)가 ‘영향’을 많이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 작고한 문인중에서는 ‘비평도 문학작품임을 일깨워 준’ 김현이 6명으로부터 헌사를 받았다.(김봉억 기자)

설문에 참여해주신 분들
고인환, 권오현, 김나정, 김대산, 김동윤, 김미정, 김양선, 김영찬, 김정남, 김종욱, 김형중, 류신, 복도훈, 안미영, 엄경희, 오윤호, 오창은, 이경수, 이선영, 이성혁, 이수형, 이재영, 이현식, 이희환, 장일구, 정재림, 조강석, 허병식, 허윤진 이상 30명. 가나다순.

06. 09. 23-24.

 

 

 

 

P.S. 결론 삼아, 젊은 문인들이 주목하는 동세대 작가/시인들을 꼽아보자면, 소설가로는 김중혁과 김애란(비록 논란의 대상이지만)이 대표주자라 할 만하다. 더불어, 앞세대 작가로서 <생의 이면>의 작가 이승우가 시에서의 이성복만큼 높이 평가된 것은 이 설문의 '수확'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주목하는 작가로 전성태, 시에서 황병승이 꼽힌 것은 수긍할 만하다. 김경주 시인이 거론된 것이 뜻밖인데, 내가 아직 접해보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어서 그렇다(참고로, 최근에 내가 주목한 작가/시인은 백가흠과 이근화이다). 맛보기로 한 편을 인용해놓는다. 이게 또 왜 목련인가?!..

목련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십 이년동안 자취(自取)했다

삶이 영혼의 청중들이라고
생각한 이후
단 한번만 사랑하고자 했으나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戀人)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요즘 시 어떻습니까?"

오늘자 한국일보 문화란에 '요즘 시'의 경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오늘이 '시의 날'인 걸 기념해서인 듯한데, 며느리도 모를 법한 이 날의 유래는 이렇다고: "11월1일은 제19회 '시의 날'이다. '시의 날'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린 것을 기념해 1986년 제정됐다." 1986년이면 전두환 정권하이다. 5공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 장관을 한 적도 있으니 그 분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 이어령표 마인드의 산물 같다. 어쨌거나, 그런 날이 벌써 19번째이건만, 무슨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시한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기념일을 챙기는 건 문화부 기자의 본분에 충실해 보이며,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요즘 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예인들만한 사이즈로 지면에 오른 요즘 시인들의 면면들을 구경해볼 수 있었다. 혹 기사를 지나쳐버린 분들을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챙겨두도록 한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을 짚"고자 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다른 말로는 '엽기시'라고 한다.

 

 

 

 

얼마전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수상자는 작년에도 시인들이 뽑은 최고작을 쓴 바 있는 문태준 시인이며 수상작은 <누가 울고 간다>이다. 짧은 시이므로 옮겨본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특별히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소품인데, 사실 이런 정서와 리듬감, 시상 전개 등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해왔다(문태준 이전에는 장석남이 있었다). 기형도 이후에, 혹은 장정일, 유하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퇴행'이면서도 '관례'이다. 유구한. 그리고 그런 시인과 시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2000년도 이후에 나는 시도 쓰지 않고 읽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지만(나는 시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요즘 동태를 보아하니 그 사이에 꽤 특이한 젊은 시인들이 여럿 등장한 모양이다. 세태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아나선 이들의 이름은 김행숙 황병승 김민정 김근 김언 이민하 김이듬 등이다. 기사에는 8명의 시인들이 8인방처럼 거명돼 있는데, 요약하면 1:8이요,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엽기들'이다. 이들을 차례로 호명해보자.

 

 

 

 

 

 

 

 

 

 모두가 올해 데뷔시집이나 새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이다. 김이듬, <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 김근,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김언,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민하, <환상수족>(열림원, 2005);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김행숙,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5)

(평론가 이장욱에 의하면) '외계어'로 시를 쓰는 이들은 (평론가 권혁웅에 의하면) 우리 시단의 '미래파'이다. 물론 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외계인들끼리는 소통가능한가?) 하여간에 앞에서 인용한 문태준류의 시와는 달리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기자도 이 점을 표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변화의 선두에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문학사에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1930년대의 이상이 '욕먹는' 시 <오감도>를 썼다. 195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시'를 쓴 조향 시인 같은 분도 있었고(<조향 전집>(열음사, 1994)),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 시들도 다 낯선 시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는 주류적인 시였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엽기시' 경향에 대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최근의 나온 시집들이 주된 경향을 이루면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뿐. 더불어, 현란한 이미지들이나 수사의 국적, 계보, 혹은 전통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이채로울 뿐. 해서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강조는 나의 것) 참고로 기자가 나열하고 있는 찬반론은 이렇다.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김이듬, ‘시와 반시’여름호-현대시와 퇴폐)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김언, ‘웹진 문장’ 10월호-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권혁웅 비평집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긍정적인/전향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경향을 바라보는 세 평자의 의견: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최근 낸 비평집에서 이들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미래파’라 명명한 권혁웅(시인ㆍ평론가)씨는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미래파’ 171쪽)

이어서 기자는 두 편의 시를 예시하고 있다. 나의 독후감으론 황병승과 진수미의 예시된 시는 종류가 좀 다르다. 그것은 시가 그 독법에 있어서 어느 만큼의 논리를 허용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논리를 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 더불어, 시의 난해성이 시적 주체의 개성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성 이전의 전주체성(presubjectivity)과 연관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요즘 시'를 한번 읽어보시라. 그리고 해독/해석해 보시라. 나의 생각은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05. 11. 01.

P.S. 다시 생각해보니까, '시의 날'은 5공때 문공부 장관을 지낸 정한모 시인의 '작품' 같다. 이어령 선생은 노태우 정권때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 기억이 말해주는 건 거기까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판다는 팬더곰의 일종이지만 메마르고 쓸모없는 땅을 팔 때도 유용한 단어다. 그것은 깊이를 가지고 있고 적당히 윤기를 두를 수도 있으며 뙤약볕 아래 구릿빛으로 빛나는 신성한 노동을 뜻하기도 한다. 적당히 포장되는 만큼 올라가는 가격이 판다에는 이미 들어가 있다. 판다는 그래서 그것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제 자신의 뜻을 물건값으로 교묘히 위장하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에 현혹되는 사람이 간혹 학문에 매진하는 이유를 캐내어 물어보면 평생을 다 보낸 뒤에도 나온다는 대답이 늘 그 모양이다. "한 권의 책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습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이 나를 여기로 보내었을 테지요, 그는 위인입니다." 그가 잊어버린 것은 책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위인의 이름도 아니다. 그는 단어 하나를 망각하고 이름 그대로 매진해왔을 뿐이다. 그가 기댄 것은 학문이지만 학문 이전에 그를 사로잡았던 단어를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젊은 시절 그가 결심하였던 그 단어를. "저를 탓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 행위에 열중했을 뿐입니다." 붙잡혀온 사람들의 하나같은 변명이 그 단어에 매달리고 또 애걸하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상행위에 열중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잡상인의 얼굴과 대답이 빤한 노학자의 얼굴. 판다에 열중하는 얼굴과 판다를 까마득히 잊고도 여전히 매진하는 얼굴의 모양새. 희끗희끗한 그 머리결이 또 잊어먹고 있는 장면은 맨 처음의 구릿빛 피부와 곡괭이 자루에 빛나는 저무는 태양의 굵은 땀방울 같지만 판다를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그걸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팬더곰의 일종이라는 그 단어를 무한히 파들어가는 사람의 얼굴. 얼핏 봐서는, 두더지의 일종;판다.

 

 

 

 

 거인,김언.랜덤하우스 중앙,2005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가 퍽,난해하다고 생각되요.제가 최근에 읽은 젊은 시인들의 경우,가령 김민정,이기인,황병승,김언 시인까지..무엇을 시라 딱히 정의할 순 없겠지만..시라기 보다는 어떤 중얼거림,에 가까운 암호라고나 할까.그 암호를 풀기엔 저는 너무 인간적(?)인데 말이죠..


최근에 읽은 문예지의 제목이 ‘외계로부터의 타전’이었는데 말이죠..평론가 이장욱은 아예 외계인 인터뷰:지버리시 훈련-이란,부제를 달기도 했더라구요.지버리시 훈련이란 의미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연기훈련.


문제는 이러한 형식적 시도(상당히 낯선)를 저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것이에요.사실 뭔 말인지,잘 모르겠어요.그래도 읽게되는건 젊은 시인들에 대한 기대죠.시대가 바뀌고,또한 시대가 요구하는 것도 달라지고,많은 것들이 변하니 시인들의 글쓰기도 달라지는게 맞을테지만..우리가 어떤 시를 읽었을때..가슴에 와닿는,그 뜨끈한 무언가는 솔직히 느낄 수 없었습니다.아직 낯설어서 그런지 몰라도요.


이렇게 될 경우에,저는 예전보다 평론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고 생각해요.가령 그들을 외계시인(?)이라 명명한다면 중간에서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쉽게 전달해줄 수 있는 통역이 ,결국 가교자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근데 우리 평론가들도 실은,너무 어렵게 써서,사실 해설을 읽다보면 더 난해해지는 경우도 많지요.


암튼 일시적인 유행인지,그것이 하나의 주류가 될지는 조금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평범한 독자들이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참으로 궁금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시인공화국의 토끼와 바퀴벌레들

한파(寒波)라고 하기엔 포근한 감이 없지 않지만 예년보다 내려간 기온을 핑계로 겸사겸사 외출을 포기했다(외출이라고 해야 학교에 나가는 거지만). 그럼 집에서 뭐하는가? 빨래하고 대충 청소도 하고 라면 끓여먹고 신문 본다. 화요일이라 편의점에서 한국일보를 사들고 와 본다. 로버트 러플린 카이스트 총장의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를 고개를 끄덕이며 읽는다. 199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면서(1950년생이니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정상'에 올랐다) "그는 작곡에도 관심이 많으며 그림그리기도 좋아"한다고(올해 피아노 연주회도 가진 적이 있다).

 

 

 

 

지난 여름에 나온 <새로운 우주 - 다시 쓰는 물리학>(까치글방)이 바로 그의 책이며 그 삽화들을 직접 그리기도 했단다. 역시나 노벨화학상 수상자이면서 '시인'인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까치글방, 1996)의 저자 로얼드 호프만만큼이나 다재다능한 석학인 듯하다. 러플린의 기고문은 그 자신의 교육 체험담이면서도 우리의 교육관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데, 후반부를 잠시 옮겨오겠다(인터넷판에서 가져오는데, 실제 지면에 실린 것보다 몇 문장이 보태져 있다. 아마도 분량상 지면에는 누락됐던 모양).

-위대한 과학자들이나 발명가들은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에서 다른 사람들이 겪는 창조성에 대한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 사람들로 보인다. 때로는 괴팍함과 결합한 덕분에. 그들은 스스로 게걸스럽게 배우는 자들이기도 하다. 토마스 에디슨은 교사가 산만하다고 평가해서 어머니가 집에서 교육을 시켰다. 그는 대학에 가지 않고 대신 문학책이나 과학책을 호기심 가는대로 읽었다. 빌 게이츠는 엄마가 공부하라는 것을 거절하고 마이크로 소프트를 만들기 위해 하버드를 중퇴했다. 아이작 뉴튼의 선생은 그를 매우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평가했으나 그의 끊이지 않는 공상과 그의 관심사를 꾸준히 기록한 것이 큰 일을 해냈다. 뉴튼은 혼자서 유클리드의 '원리'와 데카르트의 기하학을 숙독한 끝에 미적분을 창안했다.(*이 단락은 전체가 지면에서 누락돼 있다.) 

-불행하게도 이런 지적인 독립성은 현대 한국에서는 장애물이 많다. 우선 학교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부담스러운데다 국제어인 영어까지 익혀야 한다. 이것은 작은 나라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창의성 세금' 이다. 만일 국제언어를 습득하는데 실패하면 어린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수입이 적다. 그래서 북동아시아에는 뉴튼과 에디슨이 드물다. 문화 때문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에너지를 언어를 배우는데 가장 많이 써야 하는데 따른 부작용이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아, '창의성 세금'이여!)

 

 

 

 

-대신 북동아시아의 예술가들은 언어습득에 많이 투자하지 않고도 성공한다. 작곡가 가와이 겐지는 '공각기동대'에 음악을 맡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일본에서는 그만의 텔레비전 쇼를 갖고 있다. 오모토 가츠히로는 '아키라'가 서양에서 인기를 끌면서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이 소개되는 문을 열었다. 몇 년 전 나는 '아키라'의 한 장면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 썼다가 반응이 좋길래 코단샤 출판사에 오토모씨와 서명본을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시장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젊은 예술가의 값 차이를 알게 됐다.(*이 단락도 지면에는 누락돼 있다.) 

-이런 걸 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교육열은 좋은 것만은 아니다. 경제활동에는 좋겠지만 다른 것에는 나쁘다. 기술과 창의적인 독창성을 필요로 할수록 나쁘다. 금융이나 반도체 연구와 같은 복합적인 업무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영화나 첨단과학 같은 예술적인 활동에는 불리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고등학생들은 오직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려고 공부를 하고 대학생은 오로지 시험을 잘 치려고 공부를 한다. 지적인 내용은 점수나 등수보다 덜 중요하다. 좋은 시험성적과 등수는 첫번째 직업은 보장해주겠지만 40년 동안의 경제생활을 지탱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가족부양을 위한 재정적인 책임이 최고조에 이른 후반생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경제는 너무 빨리 변해서 익힌 기술은 금새 쓸모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는 일생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데 성실하고 꾸준하게 투자를 해야 한다.

로버트 러플린 KAIST총장 

-비행기는 자리를 잡기까지 그 둔한 몸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매우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바퀴가 땅을 박차는 순간 비행기는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을 나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뇌와 몸도 이와 같다. 젊었을 때는 매우 이상하지만 어른으로 가는 시기가 오면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뇌와 몸도 배우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뉴튼과 에디슨 같은 이들에게는 성공은 멋진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니 보기에도 참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공부와 창조도 역시 중요한 것이니 우리들의 끈기있는 노동이 경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뉴튼도 에디슨도 그것은 못했다.(*강조는 나의 것이며, '뉴튼과 에디슨' 이하의 문장들은 지면에서 누락돼 있다.) 

 

 

 

 

마지막 단락의 비유가 아주 시적이며 인상적이다. '배우는 인간은 비상하는 비행기처럼 행복하다'란 큼지막한 타이틀은 거기에서 뽑은 것이겠다. 활주로에서만 뭉개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래도 좀 위안이 되겠고(관제사들이 파업이라도 하는 건가?).  

이어서 읽은 연재가 '강정의 나쁜 취향'이다. 43번째니까 거의 1년이 돼 가는 이 연재의 이번호 타이틀은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하고도 폭넓은 사생활'이다. 이전에 한국일보 지면의 문학기사를 따다놓고 '요즘 시 어떻습니까?'란 페이퍼를 만든 인연도 있고 해서 강정의 글이 더 눈에 끌렸다. 이번에 사진과 함께 그가 거명하고 있는 네댓 명의 젊은 시인들, 혹은 젊은 '바퀴벌레들'은 흔히 '엽기시적' 경향의 대표 주자들이다.

 

 

 

 

김민정, 김근, 황병승, 유형진, 이민하 등이 그들, '바퀴벌레들'이다. 강정의 설명: "몇 달 전 어느 매체에 ‘시인공화국의 젊은 바퀴벌레들’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젊은 시인들에 관한 생각을 짤막하게 밝힌 적이 있다. ‘시인공화국’이란 말이 매주 수요일 본 지면에 연재되는 소설가 고종석의 연재 타이틀을 빌린 것이라는 건 새삼 밝힐 필요도 없을 테지만, ‘바퀴벌레’라는 표현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을 듯싶다. 그다지 좋은 뉘앙스가 아닐지 몰라도 내 본의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퀴벌레’를 상찬의 용어로 쓰는 것도 썩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해명컨대 내가 쓴 ‘바퀴벌레’엔 최근 젊은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차가운 개인성과 예측불허의 감각적 주파능력 및 그들을 바라보는 문단 안팎의 전반적인 시선 등이 포괄적으로 겹쳐 있다."

그러니까 표현은 '바퀴벌레'이지만 거기엔 '상찬'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 이들이 요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올 한해 불현듯 방생된 물고기떼처럼 득시글거린 바퀴벌레들의 공통된 특징을 찾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초반 위대하시고 저명하신 프로이트 박사님께서 ‘빙산의 일각’이라 아슬아슬하게 표현하신 그 지점이 바퀴벌레들에겐 별다른 강박으로 다가오지 않는 듯하다. 통상적으로 무의식은 존재의 내부에 잠재된 외부적 존재라 여겨지지만, 인간의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본원적으로 분리할 수 없듯 무의식을 의식의 대자(對自)적 영역으로 파악하는 건 보다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인간 이해를 방해하는 선험적인 금 긋기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바퀴벌레들은 기존의 인문학이 도구함 정리하듯 배치시켜놓은 인간 개념으로부터 일탈하여 자유롭게 날뛰거나 오로지 그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자기만의 사적 신화에 골몰한다. 소위 영상세대니 인터넷 세대니 하는 말들은 그들을 수식하는 가장 손쉽고도 책임 없는 분류법에 불과하지만, 바퀴벌레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하고 명명할 줄 안다는 데 있다."(강조는 나의 것)

요컨대, '나는 내가 명명한다' 혹은 '내 이름은 내가 불러준다'는 것. 뭐라고? '고슴도치'(김민정)라고, '뱀소년'(김근)이라고, '여장남자 시코쿠'(황병승)라고, '피터래빗'(유형진)이라고, 그리고 '환상수족'(이민하)이라고. 강정이 예로 들고 있는 시는 이민하의 '사진놀이'인데, '엽기'의 사례로선 너무 얌전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튼 이런 종류이다: “사진을 찍었다 필름을 화분에 심었다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화분을 내놓았다 화분 속에서 주렁주렁 사진들이 익어갔다 너무 익은 사진은 바닥에 떨어져 짓물렀다 방안 가득 단물이 고였다 물컹물컹 사진들이 내 발목을 핥았다 한 달 전에도 사진을 찍었다 어제도 찍었다 난간에 매달려 찍었다 화분에서 흘러넘친 필름은 창을 향해 넝쿨처럼 뻗었다”(야콥슨에 근거하면, 시인들이란 인접성 장애를 앓는 실어증 환자들과 유사한데, 가령 그들은 '강낭콩' 대신에 '필름'을 언어의 화분에 심고 '사진놀이'하는 자들이다.)

 

 

 

 



비록 사진놀이하는 바퀴벌레는 다소 귀엽게 보이지만, 이 '바퀴벌레'들이 거북하고 불쾌하며 혐오스러운가? '한 쇠잔한 바퀴벌레'로서 강정이 옹호에 나선다(그는 한때 <처형극장>의 영사기사였다): "시에 대한 유구한 상식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에겐 여전히 곤혹스럽고 위험천만하게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시를 특정한 언어적 형식과 문학적 불문율 아래 가둔 채 공허한 자기위안만을 반복하는 거짓된 물아일체(物我一體)에의 환상이 내겐 더 곤혹스럽고 위험천만한 시적 무사안일주의라 여겨진다. 내가 아는 한, 대상은 결코 주체에 편입되지 않고 주체 또한 그 자체로 완벽한 통일체로서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다. 시가 궁극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건 그 통합되지 않는 자아와 대상 사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종의 에너지덩어리로써의 불가능성뿐이다."

이 노땅 바퀴벌레께서 입은 쇠잔하지 않았는지 어려운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만약 당신이 '바퀴벌레들의 사생활'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시적) '무사안일주의자'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들뢰즈식으로 거들자면, 자신의 존재/거처에서 복지부동, 무사안일 만땅으로 안주하는 당신은 모든 (가면적) '생성'의 거부자이며 따라서 반동 꼴통이다! 그러니 받아들여라! "시적 자아란 그 불가능성을 잠정적으로 지시하는 순간적이고도 영원한 가면에 불과하다. 시인에게 시는 늘 삶의 저편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자기 자신의 불분명한 미래이자 수시로 시간 경계를 초과하며 재생성되는 과거일 뿐"이라는 걸.

그런 식으로 당신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언어의 세상은 바퀴벌레의 온상이 된다: "지구가 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바퀴벌레들처럼 시인이 추구하는 불가능성의 추구는 그 불가능성 덕분에 영원히 유효하다. 그리고 그 유효성은 모든 공식적인 말들을 궁극의 무효로 환원하는 언어의 이중성과 파탄성을 통찰할 때에야 비로소 유효해진다." 만세, 우리의 시인들이여, 우리의 따라깐 따라까노비치여!('따라깐'은 러시아어로 '바퀴벌레'란 뜻이다.) 

 

 

 

 

이상에서 젊은 '바퀴벌레들' 얘기를 소개한 건 공연한 일이 아니다. 내 생각에 그 비유는 제법 적절해 보이며, 한편으론 고전적인 시인관과 분명한 대조를 이룸으로써 시대의 변화를 징후적으로 드러내준다. 어떤 시인관인가? 얼마전에 <김종삼 전집>(나남, 2005)이 새로 나왔지만, 이전까지 김종삼(1921-1984) 문학의 최고 독본은 장석주 편집의 <김종삼 전집>(청하, 1988)이었다. 그의 시 전부와 대표적인 김종삼론을 망라해서 실은 책인데, 소설가 강석경의 인물 스케치는 '문명의 배에서 침몰하는 토끼'란 제목을 갖고 있다('잠수함 속 토끼'는 한때 유행이었으며 박범신은 소설집 제목을 아예 <토끼와 잠수함>이라 붙이기도 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인에 관한 말 중 인상적인 것이 하나 있는데 시인을 토끼에 비유한 말이다. 잠수함에는 늘 토끼가 승선해 있다 한다. 산소량을 측정하기 위해서이다. 산소 희박을 인간이 알아챌 정도면 더이상 손쓸 수 없는 악화된 상태여서 토끼의 호흡으로 그 경계선이 측정된다. 산소가 모자랄 때 토끼가 먼저 질식하기 때문이다.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일 것이다. 하나는 문명이나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본질의 생명을 시의 몫으로 돌려왔던 고전적 해석에 다름 아니고 또 하나는 속죄양의 측면에서이다. 시인이 삶의 높이, 그 척도가 된다는 것은 큰 은총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또한 형벌이기도 하다. 오염된 현실에서 시인은 누구보다 먼저 고통의 제물이 될 것이므로..."

그런 토끼들은 어떤 시를 썼었나? 김종삼의 '서시'이다(학부 1학년때 국문과에 다니던 한 친구가 기숙사 자기방 관물함에 붙여놓은 시여서 특히 인상에 남았던 시이다. 황동규 시인의 의하면 김종삼의 시들은 '잔상의 미학'으로 수렴되는데, 이 시 또한 그러하다).

헬리콥터가 지나가
밭이랑이랑
들꽃들일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갔으리라.

얼마전, 그러니까 지난달 말쯤에 강정의 글에도 언급된 고종석의 '시인공화국 풍경들'(39)에서는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민음사, 1979)를 다루었다(황동규의 '잔상의 미학'은 이 시선집의 해설이다). 고종석은 '정신적 귀족주의자의 세계'로 김종삼 문학을 요약하는데, 그것은 달리 '북치는 소년'의 시구처럼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차라리, 김현의 짐작과는 반대로, 김종삼이 추구한 것 자체가 바로 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이 시의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만이 아니라 김종삼의 시세계 전반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시 말해 무구한 아름다움으로 반짝인다. 그 아름다움은 무구한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다. 김종삼의 육체는 남한 땅에 발을 딛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이 땅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따금 그 마음은 두고 온 북녘 고향 땅을 향했고, 자주 위대한 예술가들의 고향인 유럽 땅을 향했다. 아니, 유럽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그의 마음은 그 예술가들의 상상된 마음에 들려 거기 갇혀있었다.

-아니, 이 말도 옳지 않다. 그의 마음은 예술의 세계에 갇혀 있으려 애썼으나, 그는 오르페우스가 되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 우주복처럼 월곡(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환 시각 미정”(‘올페’ 전문). 김종삼은 시의 세계에서조차 둥둥 떠 있었다. 그러니까 김종삼을 실향민이라고 할 때, 그가 잃어버린 고향은 황해도 은율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본적이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그는 (거의) 단독자였고, 무적자(無籍者)였다. 사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깨닫지 못할 뿐, 단독자와 무적자는 우리 모두의 처지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슈만의 노래도, 조반니 팔레스트리나의 미사곡도 들어보지 못한 독자가 김종삼의 시에 푹 빠져들기는 어렵다. 어쩌면 시인은 그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젠체하기는 얄팍한 속물근성이라 비판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 외롭고 가난했던 시인의 속물근성에는 좋은 의미의 댄디즘(당디슴)이, (부르주아의 반의어로서)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적 귀족주의가 버무려져 있었다.(*참고로, 김종삼의 생업은 음악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한 '귀족주의'에 상응하는 것이 남들보다 일찍 죽을 토끼들의 운명이다. 해서 시인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태도는 바로 그들을 (잠수함 속) 토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젊은 바퀴벌레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갖게 된 시인의 모델은 전통적인 '토끼로서의 시인'과 새로운 세대의 '바퀴벌레로서의 시인'이다. 전자는 가장 먼저 고통의 제물이 되길 감수하는 자들이며, 후자는 지구가 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자들이다. 이들이 시인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종족들이고 부락민들이다. 장차 공화국의 패권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당신도 나처럼 혹 그런 게 궁금하다면 좀더 오래 살아두어야겠다...  

05. 12. 13.

P.S. 강석경 선생의 글이 에피그라프로 쓰고 있는 것은 에밀 시오랑의 단장이다. 대화체의 이 단장은 이런 내용이다."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나 자신을 견딥니다." 오늘 하루도 남은 시간, 마저 견디시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지난번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려간다"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에 실린 에세이 '문학과 삶'  읽기인데, 지난번 브리핑에서 다룬 건 <비평과 진단>의 서문이었다. 텍스트 '문학과 삶'의 국역본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가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번역서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에 실린 것이고(15-24쪽), 다른 하나는 계간 <세계의 문학>(2000년 봄호)에 실린 것이다(246-253쪽). 이 후자에 붙여진 제목이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이다.

발행년도는 갖지만 후자가 먼저 출간되었는데, 가독성이 앞엣것보다는 낫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예비적인 정보 없이 두 텍스트를 읽어본다면, 후자가 전자를 교정한 번역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데, 문장이나 문투가 유사한 대목이 많다. 나는 <비평과 진단>의 번역이 <세계의 문학>의 번역을 베꼈을 거라는 의혹을 갖고 있다. 동일한 오역이 발견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나는 년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세계의 문학> 번역이 <비평과 진단>을 베끼면서 교정한 것인 줄 알았다). 한데, 흔히 공부 못하는 학생이 컨닝하는 식의 번역이어서 베끼면서도 더 알아먹을 수 없도록 개악한 형국(그러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아무려나 들뢰즈의 문학론을 집약하고 있는 텍스트를 정리해보도록 한다. 내가 주로 인용하는 것은 <세계의 문학>의 번역이며, <비평과 진단>은 필요할 경우에 대조하는 방식으로 글은 전개될 것이다. 처음 몇 문장은 이렇다.

  

 

 

 

"확실히 글쓰기는 체험한 재료에 표현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곰브로비치(Gombrowicz)의 말과 행동처럼 오히려 비정형이나 미완성을 향한다. 글쓰기는 늘 미완성으로 끝나는, 늘 일어나고 있는 생선/변화의 문제이다. 그것은 체험할 수 있거나 체험된 모든 재료를 벗어난다."(246쪽) 맨마지막 문장만 <비평과 진단>에는 "살기에 편하거나 체험된 모든 재료를 벗어난다"로 옮겨져 있을 뿐 두 번역본이 동일하다. '체험할 수 있거나/살기에 편하거나'는 불어의 le vivable(영어의 the livable)의 번역인데, 나는 언젠가 (<세계의 문학>에 대한 참조 없이도) '살기에 편하거나'란 번역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가능한 삶'이란 함축을 갖는 '체험할 수 있거나'가 내가 보기엔 더 정확한 번역이다.

Gombrowicz photo

 

 

 

 

 

 

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1904-1969)의 작품은  <페르디두르케>(민음사, 2004)와 <포르노그라피아>(민음사, 2004)가 거의 동시에 출간됨으로써 국내에 소개되었다(<비평과 진단>에는 생몰년대가 '1905- '로 역주에 표기돼 있는데 무얼 참조한 것인지 모르겠다). 알라딘에 소개돼 있는 간단한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04년 폴란드 남부의 말로시체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뜻에 따라 귀족적인 가톨릭 학교를 거쳐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법학에 흥미가 없던 차에 대학 졸업 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하고 귀국했다.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는 틈틈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서 1933년 첫 작품집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평단의 비난과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작가의 길을 결심하고 희곡 <부르고뉴의 공주 이본>과 첫 장편 <페르디두르케>를 발표했다. 1939년 아르헨티나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다음 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했다. 그 후 그의 작품은 나치에 의해 긴 판금에 들어갔다. 지방 신문사와 은행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리면서 두 번째 장편 <대서양 횡단선>을 완성했다. 1933년부터 잡지 <쿨투라>에 관여하면서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자 다시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 1957년 폴란드 자유화 운동의 결과 일시적으로 검열이 약화되면서 몇몇 작품들이 출간되었지만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다시 금서로 묶여 1960년대 중반까지 판금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고국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세 번째 장편 <포르노그라피아>를 발표한 후 1963년 포드 재단의 기금을 받아 아르헨티나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네 번째 장편 <코스모스>를 발표하고, 1968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1969년 프랑스 방스에서 별세했다."

그러니까 네 편의 장편소설이 그의 주저인 듯한데, 작년에 출간된 이 번역본들을 나는 아직 안 읽어봤기 때문에 논평할 처지는 못된다. 하지만 작년 모스크바 체류시에 러시아어로도 번역본들이 나와 있는 걸 확인했었다(기억에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참고로, 최근에 폴란드 문학의 거장 헨릭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 1846-1916)의 노벨문학상 수상작(1905) <쿠오바디스>(민음사)가 수상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됐다(폴란드어 완역본은 최초가 아닐까 싶다). 라틴어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란 뜻이다. 오래전 내가 본 영화에서는 라스트 신에서 베드로의 대사였다.

1905년이면 곰브로비치가 한 살 때이고, 프랑스에선 사르트르가 태어나던 해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10살이었고, 그해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닥터 지바고>의 초반부에 묘사된다). 아래는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차르 군대에 의한 시민 학살 장면이다(올해가 가기 전에 기억해 두도록 한다).  

Bloody Sunday Attack

아무려나 그해 가을 러시아와는 역사적으로 앙숙인 나라 폴란드의 작가 시엔키에비치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건너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 그리고 곰브로비치는 그 폴란드 문학의 또다른 거장이라는 것. 다시 들뢰즈로 돌아오면 첫문단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것은[글쓰기는] 과정, 다시 말해서 체험할 수 있거나 체험된 것을 가로지르는 삶의 이행이다. 글쓰기는 생성/변화와 불가분의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여성이 되거나 동물이 되거나 식물이 되기도 한다. 또한 미립자가 되어 지각 불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여성-되기, 동물-되기, 식물-되기, 지각불가능한 것-되기 등은 들뢰즈 문학론의 '표지' 같은 것이어서 요즘은 우리 주변의 비평이나 논문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구호들'이다(가장 쉬운 안내는 콜브룩의 <질 들뢰즈>를 참조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작품론에의 적용은 <들뢰즈와 문학-기계>에 실린 글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되기'의 사례들로 최근 시의 경향들을 분석해 보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과제 중 하나인데, 가령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안, 2005)가 여자-되기 혹은 여장남자-되기의 사례라면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는 동물-되기(보다 구체적으론 고슴도치-되기)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한다(이에 대한 '읽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당장 돈이 되는 일도 아니므로).

들뢰즈의 이어지는 문단: "이러한 생성/변화들은 르 클레지오의 한 소설 작품에서처럼 특정한 선을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거나 아니면 러브크래프트의 힘찬 작품에서처럼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문, 문지방, 지역 등에 따라 모든 층위들에서 공존한다. 생성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남자가 모든 재료에 강요되는 지배적 표현형식으로 제시되는 한 남자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거들먹거리는 남자들은 들뢰즈적 생성(되기)에서 열외라는 얘기겠다(하긴 그들은 필연코 뭐가 돼야 할 만큼 뭐가 아쉬울 리 없을 테니까).  

<비평과 진단>에서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따라서 인간은 모든 재료에 강요된다고 주장하는 지배적 표현형식으로 표상되는 한, 사람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16쪽)라고 돼 있다. 전혀 감을 잡고 있지 못한 번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클브룩의 <질 들뢰즈>에서도 역자는 '남자/남성'이라고 옮겨져야 더 적합한 대목들에서 'man'을 '인간'이라고 옮기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라니?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1940- )의 책들은 데뷔작인 <조서>(세계사, 1989; 민음사, 2001)를 필두로 해서 이래저래 20여 권 가까이 번역/소개돼 있다(그는 지난번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내한한 바 있으며 작가 황석영과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2001년인가에도 방한한 적이 있으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내가 읽은 건 <조서>뿐이어서(그것도 15년쯤 전에 읽은!) "특정한 선을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라고 쓰려는데, 들뢰즈의 각주에 따르면 "작품 <조서>에서 르 클레지오는 여자로의 생성, 쥐로의 생성, 그리고 지작할 수 없는 생성 속에 소멸해 가는 한 인물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로선 계속 도망다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H. P. 러브크래프트(1890-1937)는 내게 생소한 작가인데, '미국 출신의 호러 작가'라니까 그럴 만하다(호러는 소설이건 영화건 잘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미국 로드 아일랜드주에서 태어났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8살 때 사망한 아버지, 신경질적인 어머니 아래서 악몽에 시달리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 자신 18세에 정신쇠약으로 학교공부를 포기하고 독서광으로 지냈다. <위어드 테일즈> 등의 잡지의 인기작가였던 그는 생전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현재는 진정한 '미국적 판타지의 창조자'로 평가받고 있다. 암으로 사망했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47살에 사망했으니까 애드가 앨런 포우만큼이나 불우한 작가의 계보에 속하는 모양이다. 국내에는 1992년부터 띄엄띄엄 소개된 걸로 나오는데, 올해 <러브크래프트 코드(전5권)>(책세상)이 한꺼번에 나왔으니까 그의 독자들에겐 '기념비적인' 해가 될 만하다. 판매율이 저조한 걸로 보아 그가 국내에선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영미문학 애호가인 들뢰즈에 따르면, 그의 "힘찬 작품에서처럼 (생성은)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문, 문지방, 지역 등에 따라 모든 층위들에서 공존한다."

"반면에 여성이나, 동물, 미립자는 자신의 고유한 형식화를 벗어나는 도피 성분을 항상 지닌다. 남자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의 이유가 있을까? 주체가 여성일 때조차도 그녀는 여성으로 생성되어야만 한다. 이 생성은 그녀가 간청할 수 있을 어떤 상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생성은 어떤 형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여성, 어떤 동물, 어떤 분자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인접지역이나 식별이 불가능한 미분화된 지대를 찾아내는 것이다."(247쪽)

세 가지가 지적될 필요가 있다. 먼저, "남자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의 이유가 있을까?" 다시 말해서, 글쓰기는 남자임(being a man)으로부터의 도주이다. '글쓰는 자'는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에 대해 거북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자이다. 그리고, 둘째, "주체가 여성일 때조차도 그녀는 여성으로 생성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 여성은 들뢰즈의 여성-되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그러니까 여자라고 해서 이 '여성-되기'에서 무슨 특권을 갖는 게 아니다). '여성'은 '소수자'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기에. 그리고 끝으로 이 되기의 지향점은 "어떤 여성, 어떤 동물, 어떤 분자"와 더 이상 구분/식별되지 않는 익명적, 비인칭적 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Andre Dhotel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의 에필로그는 '하나의 삶'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데, 그때 '하나의 삶(une vie; a life)'에서 '하나'가 뜻하는 바는 고유성이나 단독성이 아니라 이 '익명성'이고 '비인칭성'이다. 그 사례로 들뢰즈가 들고 있는 것은 앙드레 도텔(Andre Dhotel; 1900-1991)의 성상체(aster)이다. 들뢰즈의 각주에 따르면, 이 '성상체-되기'는 도텔의 <우화 같은 연대기(La Chronique fabuleuse)>의 225쪽을 참조할 수 있다(번역본엔 222쪽이라고 오기돼 있다). 나는 표지의 이미지만을 참조할 수 있는데(두번재 이미지), 혹 세번째 이미지의 풀 같은 종류가 아닐까 싶다(마지막 이미지는 작가 앙드레 도텔과 그의 캐리커쳐).

문학을 그러한 '성상체'로 만든다면, 거기서 "성(sexes)이나 속(genera), 계(kingdoms) 사이를 무언가가 지나간다." 여기서 '계'란 '동물계', '식물계'라고 할 때의 '계'이다. 이 사이로 지나간다는 말은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분류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나간다는 뜻이겠다. "예컨대 여자들 사이의 여자, 동물들 중의 하나처럼 생성은 언제나 <-사이>이거나 <-중에>이다."(영역: "Becoming is always 'between' or 'among': a woman between women, or an animal among other.") 그러니까 들뢰즈의 생성(되기)란 '군계일학(群鷄一鶴)' 즉 닭의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 학이 되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군계일계(群鷄一鷄)' 곧, 닭의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 닭이 되는 걸 말한다. 왜 이런 노래 있잖은가. "나는 한 마리 이름없는 닭/ 닭이 되어 살고 싶어라" 이 닭털 같은 나날들을?!

 

 

 

 

05. 12. 25-27

P.S. 분량상으론 '문학과 삶'의 한 페이지를 읽었다. 글이 늘어지고 있는 탓에 몇 차례 분재해야겠다. 저녁시간이 다가온바 육신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도 먹어야겠고. 우리의 '두더지'는 다음 연재에서 죽을 것인바, '문학'도 그때 시작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