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폐하 율리시즈호 동서 미스터리 북스 82
알리스테어 매클린 지음, 허문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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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H.M.S.(=Her Majesty's Ship) Ulysses. 1959년작. 이것을 "여왕폐하 율리시즈호"라고 번역해 출판한 것은 무슨 유머처럼 느껴진다. 처음에 책을 골랐을 때는 호화로운 여객선 "퀸 율리시즈"에서 벌어지는 나찌 상대의 첩보작전을 다룬 전형적인 Whodunit 얘기가 아닐까 하고 상상했을 정도였다. 물론 첫 챕터를 끝내고 브룩스 중령의 일장 연설을 마치면서 분위기를 완전히 잘못 짚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선남 선녀들의 호화로운 선상 생활은 커녕, 다 큰 아저씨들이 1년에 겨우 며칠만 육지를 밟으며 해군 함대의 기함에서 인간의 한계를 육체적/정신적으로 시험받는 고생담의 일부였던 것이다! 하긴 속표지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전함 구역 세부 명칭만 보고 눈치를 깠어야 했는데, 나 자신이 멍청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권말의 해설을 읽고서야 영화 <나바론> 시리즈의 원작자이며 십여편의 원작을 영화화시킨 걸출한 유명 작가임을 알았다. 동서미스터리 북스 시리즈에는 물론 스파이 소설과 정치 드라마가 빠지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상당히 이단적(?)인 축에 속하는 것이 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스터리"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 소설, 모험 소설, 비경(秘景) 소설, 이 세 범주 중 어느 하나에 넣어도 베스트에 올라갈 만한 수준을 갖춘 소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추리소설은 아니라고 감히 얘기할 수 있다. 살인인지 사고인지 알 수 없는 사건이 극초반에 일어나고, 결말에서 그 진상이 밝혀지긴 하지만, 그것이 주된 관심사가 아닌 것은 읽어보게 되면 누구라도 동의할 것이다.

허나 미스터리가 없다는 점이 이 소설의 별을 깎게 되진 않다. 원래부터 별 9개나 10개는 받을 수 있는 소설이다. 문학적으로도, 재미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2차 대전 중 독일의 총공격을 받고 있는 소련 지원 작전의 일환으로 미국과 캐나다는 영국 함대의 엄호 하에 대규모 수송선단을 노르웨이 접경의 부동항으로 보내게 되는데, 그 영국 함대의 기함 율리시즈 호는 첨단을 달리는 성능과 최고의 간부진, 유능한 선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지만 본국에서는 무사안일한 관료주의와 과중한 책임에, 임무에 나서서는 금세기 최고의 폭풍우에, 그리고 끊임없는 적국의 잠수함-비행기-전함의 공세에 시달린다. 이런 큰 줄거리에 끼어드는 것은 함내 승무원들의 드라마. 헌신적이고 조용한 함장으로부터 다혈질에 시니컬한 선의, 귀족의 자제란 이유만으로 임관된 무능한 장교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배 위에서 함께 부대끼며 지옥같은 1주일을 견디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흔해빠진 휴먼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정작 초점은 임무도,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 특이하다. 전쟁이라는 대량 학살의 본질이 이 책의 진짜 관심사인 것이다. 이 책의 전체를 꿰뚫는 정서가 불가피한 파멸에 가깝다는 점에서 재난 소설이라고도 불릴 만하다.

인터넷의 한 외국인이 이 책을 가리켜 "excellent but extremely dark"라고 평했던 것이 생각난다. 배의 구석구석과 북극해의 낯설고 두려운 자연, 수많은 인물을 사실적이면서도 센세이션을 놓치지 않는 신속하고 절묘한 묘사로 마치 영화를 보는 듯 그려내는 것은 정말 훌륭하지만, 그 묘사로 떠오르는 광경의 처절함과 내용의 잔인함은 읽으면서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중반 이후 동종 학살을 극대화하기 위한 문명의 충돌(=전투)이 구체화되면서, 그에 노출된 몇몇 인물들의 운명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전쟁이란 상황에 의해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비극적 상황에 내몰리게 된 이들은 육체적인 부상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서서히 파멸해가게 되는데 그 과정이 거의 여과 없이 극단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더욱 섬뜩하다. 그 와중에서도 기본적인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 산화해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연민을 자아낸다...

과연 율리시즈가 이 모든 난관을 뚫고 수송 호위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전쟁 드라마를 극도로 혐오하지 않는다면, 어느새 바다의 거친 선원들과 함께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인다면, 군대를 다룬 소설은 계급과 상명하대의 어조를 잘 살려 번역되어야 하는데 그 점에서 번역과 편집은 낙젯점 감이다. 처음 몇 챕터에서 몇 번의 일관성 없는 경어체 실수로, 한동안 틴들과 버렐리 함장의 상하관계를 착각하는 문제가 있었다. (읽으실 분을 위해 말씀드리면, 틴들은 함대 사령이므로 기함 함장의 상관입니다. 계급도 소장이니 더 높죠) 그 밖에 같은 인물의 계급이 일관성 없이 번역되었다든가 하는 사소한 실수들이 참 안타까왔다. 개정판 같은 것은 나오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으니, 새로 나오는 동서미스터리라도 제발 한번쯤 제대로 된 교정을 거쳐서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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