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크림 전쟁이 70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대체 역사의 세계, 문학을 숭배하고 주인공 이름을 따 작명하는 풍토, 드라큐라, 늑대 인간 등의 초자연 현상의 산물들, 책의 내용을 현실화시키는 외곬수 매드 사이언티스트, 사람을 조종하는 초능력자, 시간 여행... 외계인만 빼고 웬만큼 컬트한 소재는 다 나오는, 딱 나같은 사람이 열광할 것 같은 얘긴데 이상하게 '우와, 재미있다!'라고 외칠 만한 끓어오름이 가슴에 느껴지진 않는다.

작가의 처녀작이라고 하는데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이것저것을 마구 집어넣은 듯, 결과적으로 펼쳐지는 세계는 무언가 언밸런스하고 혼란스럽다. 마치 여러 개의 전혀 다른 분위기의 TV시리즈를 섞어서 감상한 다음 변덕스럽게 바뀌던 감정선을 주체 못해서 멍~해진 기분. 대체 역사의 아이디어가 세계관과 따로 노는 것도 약점으로 작용한다. 코니 윌리스의 하드한 시간물은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대체 역사가 배경에 영향을 미친 이유가 랜달 개릿의 Lord Darcy 시리즈만큼만이라도 설명이 되었다면 모르겠는데, 개인적인 의견으론 전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소재를 써먹은 것 같아서 아이디어의 낭비 같은 느낌이.

덧붙여, 고전에 보내는 나름대로의 찬사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만이 열거되어 있다든가, 이 세계에서 책에 딸려 발달한 각종 부가산업이 현대 TV의 프랜차이즈랑 너무 닮아 있다는 사실은 아쉬웠다. 마치 고전을 읽지 않는 대다수의 현대인에게 고전을 읽는 길고 긴 고통 끝의 감동에 대해서는 슬쩍 숨기고, 그 안의 단편적인 흥미로운 사항만 슬쩍 보여주며 광고를 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뭐, 그런 것에 혹해서라도 책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좋은 현상일라나...

어쩌다 아쉬운 얘기만 했는데, 평작은 넘는다는 것이 확실하다. 무엇보다 문학이 TV자리를 대신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주인공 넥스트 양은 이 모든 난리통에 던져지기엔 평범한 인물이지만, 그의 삼촌 마이크로프트(!)나 숙적 아케론 하데스는 너무나 훌륭한 캐릭터들이었다. 특히 펠릭스의 아이디어는 상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발상. 적어도 잔혹한 면에서는 별 5개를 받을 만한 소재에, 구성에, 스타일을 갖추었다.

노파심: 아직 [제인 에어]를 읽지 않았다면 부디, 소재가 된 작품을 봐야 이해할 수 있다는 편견에 시달리지 말고, 그것을 읽지 않고 볼 것을 권한다. 중간의 복선을 감지하고, 예상되는 결말로 갈 것을 예감하게 되면 이후의 재미가 반감될 것이다. 나중에 들쳐보면서 "아, 이게 거기 나온 그 사람들이군" 하는 재미라면 몰라도... 이번에 물 건너에서 이 시리즈의 하나인 [Lost in a Good Book]이 Dilys Award를 받았다는 소식도 있던데, 같은 세계관의 시리즈가 계속 번역돼 우리 나라에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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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rot 2004-03-06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제인에어"를 읽지않았기 때문에 "제인에어 납치사건"을 안읽고있답니다..(책은 나오자마자 샀다죠..아마-_-a)
말씀을 듣고나니 심하게 갈등이 되는군요..ㅠㅠ

Fithele 2004-03-06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등하시지 말고 그냥 보세요 ^^ 아마 읽고 보는 것보다 1.5배 정도는 재미있으실 겁니다... 더 이상은 스포일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