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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트리오스의 관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76
에릭 앰블러 지음, 임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평점 :
스파이 소설의 원조로 알려진 에릭 앰블러의 소설이라고 해서 기밀 서류, 고문, 암살 음모, 뭐 이런 것들을 연상했는데 완전히 헛다리 짚다. 차라리 히치콕의 '이창'과 같은 스릴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선량한(?) 시민이 우연히 관심을 갖게 된 인물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너무 많이 알게 된 주인공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 이런 방식의 서술이 너무나 현대적이어서 놀랐다. 아직도 많이 써먹는 수법 아닌가. 만일 디미트리오스나 그 짝패, 경찰의 입장에서 얘기를 진행했다면 그저 시니컬한 코믹이 되었을 것이다. ('아기는 프로페셔널'이랑 비교되는 사항) 탁월한 연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고두고 몇번씩 읽을 정도로 치밀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하루 저녁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재미는 있었다. 배신의 제왕인 디미트리오스와 그 주변 군상의 묘사도 실감났다. 39년작이니 2차대전 발발 직전의 물건인 셈인데 하는 짓들이 편지 쓰는 것만 빼면 현대인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걸 보면 문명이란 게 별게 아닌듯 하다.
줄거리 상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 어리버리한 디미트리오스의 보즈웰은 그의 작가적 호기심으로 인해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취재했는데, 결말에서는 아가사 크리스티적인 퍼즐놀이를 쓰기로 맘먹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겪은 현실(?)이 훨씬 더 다이나믹하고 재미있었지만 생명의 위협까지 겪게 되자 지적 유희로 도피하고 싶어진 것일까? 아니면 지은이(에릭 앰블러)가 본격 소설에 대해 하고팠던 얘기를 슬쩍 끼워넣은 것일까? 확실히 본격 추리는 인물이 보다 명료하다. 오죽하면 동기와 수단만을 가슴팍에 써넣은 puppet 들처럼 느껴지겠는가. 아마도 지은이는 '추리 퍼즐과는 달리, 현실에서 범죄란 훨씬 복잡하고 추악하며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소산이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