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시리즈를 내맘대로 골라 보기 시작하면서, 희귀본을 먼저 선택하자는 기준으로 출발해 영화로 나왔거나 예전 해문 등등에서 읽었든가 읽을뻔했던(?) 것을 제외하다 보니 이 책도 관심사에서 제외되었었다. 내가 그 결정을 후회한 것은 주말에 그 책을 사겠노라고 벼르고 있던 친구가 이 책을 들고 찾아왔을 때였다. (아마도 전에 빌려 줬던 <화형법정>에 대한 답례였다고 생각한다...) 친구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아니라면 이런 재미있는 소설을, 가격을 이유로 평생 접하지 않고 살아가야만 했을 테니까.일단 두께의 압박이 상당하다. 600페이지 이상 넘어가는 동서 시리즈는 아직까지 <월장석> 뿐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처음 책의 외모를 봤을 때 '이걸 언제 다 읽어?' 하는 심리적 부담감이 있을 정도이다. 허나 막상 독서를 작정하고 시작하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주인공 '나'가 부자 아줌마의 Companion으로 있다가 한 영국 귀족을 만나고, 여차저차 해서 결혼을 하고 영국에 정착 뭐 이런 사건들을 정신없이 쫓아가다 보면 문득 1/3을 지난 것을 깨닫게 된다. 쉽게 읽히고, 흥미진진하며, 읽다 보면 화자인 '나'의 감정에 휘둘려 눈시울을 글썽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간단히 평하면 스릴러의 줄거리를 가진 로맨스 소설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특히 초기에 막심이 '나'에게 청혼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지금까지 읽어본 소설 중 가장 우울하면서도 로맨틱한 연애 장면이다. 비극이 얽힌 로맨스를 그리면서도 격조 높은 문체를 유지하는 점은 미스터리라기보다 본격 소설에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미스터리와 비극의 원인이 막심과 전처 레베카의 심리적 갈등이라는 사실도 그런 느낌을 강화시켜 준다.남자분들보다 여자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복선을 찾느라 머리 아프지도 않고, 뒤 모리에 여사의 '여인의 입장'에서의 입담도 그렇고, 요즘 같은 더위에 읽으면 딱 좋을 얘기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몇번을 읽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