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분석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22
칼 구스타프 융 외 지음, 권오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칼 융이 그의 말년에 대중을 염두에 두고 쉽게 풀어 쓴 책이라고는 하지만, 프로이트와 융의 학설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 없이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다.

꿈, 그래 꿈부터 얘기해보자. 우린 수많은 꿈을 꾼다. 하지만 대개의 꿈은 '개꿈'이란 이름으로 무시되기 십상이다. 가끔 좀 '있어 보이는' 꿈을 꾸긴 하지만 한나절 동안의 재미난 이야기 거리가 될 뿐이다. 꿈은 그저 잠결의 몽상일 뿐일까?
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꿈이란 무의식의 언어라고 생각했다. 의식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징의 언어.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무의식이 자아의 의식에게 말을 거는 수단이 '꿈'이라는 것이다. 오랜 옛날, 인류의 의식 수준이 지금만큼 발달하기 이전에는 그러한 언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인류의 자기 통제 능력과 합리적 사고가 발달해 감에 따라 상징의 언어에 대한 이해는 감퇴되어 갔다. -성경에 쓰여진 것과 같은 신의 목소리를 더이상 듣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융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무엇인가? 프로이트와 융은 무의식에 대한 인식에 차이를 보인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잊혀지거나 억압된 기억의 저장고로 생각했다. 즉, 개인 무의식 만을 인정한 것이다. 무의식은 정신병리의 원인으로 여겨졌고 자유연상법을 통해 내면의 얽힌 실타래를 풀면 환자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을 부정적을 받아들였음을 알수있다. 하지만 융은 무의식의 범위를 확장한다. 개인 무의식 뿐만 아니라 '집단 무의식' 또한 존재함을 주장한 것이다. 집단 무의식은 개인적인 체험을 초월한,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옛 조상의 오래된 기억-혹은 경험-이다. 세계의 신화, 민담이 유사한 구조를 띄는 것은 집단 무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유사성을 '원형'이라고 지칭했다. 또한 융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무의식이 '단지 과거의 것만이 축적된 창고가 아니라 미래의 심적인 상황이나 생각의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한 일례로 독일의 화학자 케쿨레의 꿈을 들 수 있다. 그는 벤젠의 분자 구조를 연구하던 중, 자기의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뱀의 꿈을 꾼 후 닫힌 고리 형태의 벤젠 분자구조를 생각해냈다.

융은 그 밖에도 유형의 문제 등도 다루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내향적', '외향적' 이라는 개념이 여기에서 다루어진다. -그러고보면 알게 모르게 융의 심리학이 삶에 스며들어 보편화된 부분도 많은 듯 하다-

이전까지는 프로이트 혹은 융의 심리학을 단순히 정신병리학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 -프로이트의 저서는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적어도-융의 심리학은 단순히 정신병리학이 아니라 자기인식의 안내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의식적 존재인 자아(ego)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적 존재인 자기(self)로의 발전을 독려하고 있다. 상징의 언어로 가득한 무의식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불완전한 의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진실된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빌헬름 텔 을유세계문학전집 18
프리드리히 폰 실러 지음, 이재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무엇을 위해 죽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영화 '브레이브하트(Braveheart)' 中)

브레이브하트를 무척 감명 깊게 봤더랬다. 스코틀랜드의 민족적 영웅인 윌리엄 월리스의 생을 다룬 영화로,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과 죽음을 장업하게 그리고 있다. 월리스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의 죽음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압제를 이겨내고 독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영화 종반부 월리스의 처형장면, 그는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 마지막 힘을 다해 외친다.
'Freedom!' (자유!)
인류의 역사적 사건 중 많은 부분은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 투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에 [빌헬름 텔]의 울림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빌헬름 텔]은 14세기 초반의 스위스를 배경으로 태수의 폭정에 저항하며 자유를 쟁취해 가는 민중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알브레히트 1세가 스위스 지역을 오스트리아에 병합하려는 가운데, 그가 임명한 태수는 폭정을 휘두르며 민중을 억압한다. 이에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등 세 주는 동맹을 맺게 되고 빌헬름 텔의 화살은 민중 봉기의 발화점이 된다.

저자인 프리드리히 폰 쉴러는 '자유'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는데, 그의 이러한 사상은 본 극작품에 선명히 녹아들어 있다. 슈비츠 등의 세 주가 근본적으로 원한 것은 '자유 서한'에 따른 주의 자율권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약속되어온 자유가 침해 당하자 민중이 분노한 것이다. 그들의 저항과 투쟁은 숭고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쉴러는 투쟁과정의 지나친 폭력성은 견제했다. 저항권은 올바르게 행사되어야 하며 무분별한 폭력성은 저항권의 정당성을 훼손시킬 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 혁명이 자유, 평등, 우애라는 본 이념을 벗어나 과도한 폭력성과 무분별한 혼돈으로 치닫는 것을 결연하게 비판하였다. 극 중 발터 퓌르스트는 그의 이러한 이념을 대변하고 있다.
'불가피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가능하면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합시다...칼을 쥐고도 절제할 줄 아는 민족은 두려워해야 마땅한 존재니까요.'
'순결한 승리를 피로 더럽히지 않은 건 실로 잘한 일이네!'(아버지의 눈을 멀게한 태수를 살려 보낸 멜히탈에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선 자유를 위한 투쟁이 계속 되고 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필연적이지 않을까. 자유는 인간의 숭고한 권리로서 보장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재의 인류는 너무 많은 피를 흘리고 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피는 더 많은 피를 부를 뿐이다. 쉴러의 충고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송 을유세계문학전집 1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프카의 작품은 그리 친절한 편은 아니다. 그레고리 잠자를 이유도 없이 거대한 벌레로 '변신'시키고-[변신]- 측량기사로 임명한 K를 정작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던 것처럼-[성]-, 이번엔 요제프 K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소송을 건다.

서른의 나이로 은행 차장에 오를만큼 성공가로를 걷던 요제프 K는 그의 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갑작스럽게 체포된다. 직장 동료들의 짓궂은 장난 정도로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던 요제프는 심리가 진행되고 자신의 소송건을 알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점차 소송건에 집착하게 된다. 숙부가 소개시켜 준 변호사, 은행 고객의 소개로 찾아간 화가, 변호사 집에서 만난 또 다른 의뢰인. 소송을 원활하게 해결하려는 요제프의 노력은 별 소용이 없다. 소송이 제기된 이유 자체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누가 소송을 걸었는지, 그의 죄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비단 요제프만이 아니다. 그가 만난 다른 피고소인들도 자신의 죄목이 무엇인지 모르기는 매한가지이다. 불공정한 법원을 향한 항의도, 사건 해결을 위한 노력도 무용했을까. 서른한 번째 생일날 저녁 요제프 K가 즉결처형 받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은 무척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준다. 이유 없는 체포, 빈민들을 위한 임대 거축 꼭대기층에 위치한 법정, 법원 사무처의 기묘한 분위기, 의뢰인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변호사, 그런 변호사의 집에 기거하는 의뢰인, 화가의 방과 연결된 또 다른 법원 사무처, 고객의 관광안내를 위해 찾아간 대성당에서 만난 교도소 신부 등. 요제프를 둘러싼 소송은 법정이라는 거대 권력의 횡포를 드러내는듯 하면서도 한편으론 요제프만 모르게 진행되는 한바탕 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더 게임'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의 연극이 주인공을 구원하기 위한 동생의 연출이었다면 [소송]의 연극은 주인공 요제프를 파멸시키기 위한 거대 권력의 음모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겠다.-요제프 한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한 연극치고는 좀 거창하긴 하지만-

요제프의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요제프 자신과 변호사, 그를 체포한 감시인과 감독관 등 아무도 소송의 진상을 모른다. 요제프의 첫 심리를 맡은 예심 판사조차도 그의 죄목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요제프의 직업도 엉뚱하게 알고 있는 처지에 무엇인들 제대로 알겠는가?- 그의 죄는 무엇인가?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가?
그를 심문하는 법정은 확실히 권위적이고 불합리하게 비친다. '법원의 서열과 진급 체계는 끝이 없어서 그 세계를 잘 안다는 사람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이고, 어떠한 불만 사항이 있더라도 '법원에 어떤 개선할 점을 제의한다거나 관철시키려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변호사는 이와 같이 얘기하면서 '눈 앞의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늘 보복의 길을 찾고 있는 관리들의 각별한 주의를' 끌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조언한다. 제조업자의 소개로 찾아간 화가나 변호사 집에서 만난 한 의뢰인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법정은 피고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이다. 피고인의 싸움은 가망없는 몸부림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가 도움받을 가능성도 마땅찮아 보인다. 요제프가 선임한 변호사는 자신의 능력과 과거의 성과를 자랑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소송 해결 방법은 '판사와의 개인적 유대 관계' 정도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패소시의 자기 변명을 위해서인지- 수많은 변수를 언급하면서 불확실성을 내비친다. 제조업자의 조언으로 찾아간 화가도 크게 다르지 않는다. 법원 화가로 일하면서 판사 초상화를 그리는 그 또한 판사와의 '개인적 관계'를 강조하지만 실효성은 없어 보인다. 그가 제시하는 구제법은 소송의 무효화가 아니다. 무효화 자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종적 판결의 '지연' 뿐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요제프는 정말 무죄인걸까? 법원의 호출을 받을 만한 잘못은 소설상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성당에서 교도소 신부와의 대화는 인간의 '원죄'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죄. 이미 지은 죄와 앞으로 지을 죄를 모두 포함하는, 인간 내면에 잠재한 악의 가능성. 너무 멀리 갔나? 하지만 요제프가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법원 정리 아내의 유혹에 흔들리고, 숙부의 권고로 찾아간 변호사의 집에선 숙부, 변호사, 사무처장을 남겨두고 시중드는 아가씨와 노닥거린다. 소송에 집착하는 나머지 자신을 찾아온 은행 고객들을 홀대하기도 하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쉽사리 경멸한다. 이러한 태도가 그의 죄와 직결된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의 불안정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해답은 없을 것이다. 법원의 정체, 요제프의 죄, 갑작스러운 처형까지. 그로테스크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수많은 물음표를 던져주며 끝이 난다. 어쩌면 카프카 자신이 묻고 싶었는지 모른다. 부조리라면 부조리고 불완전성이라면 불완전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와 한 개인의 관계와 갈등을. 그가 느꼈을 혼돈은 소설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성의 부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7
잭 런던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확천금을 노리고 금광 붐이 이는 알래스카로 떠난 스물한살의 청년. 하지만 행운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1년 후, 청년은 병만 얻고 돌아온다. 청년은 낙심했겠지. 하지만 당시의 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금맥을 품에 안고 돌아왔음을,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야성의 부름'이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주리라는 것을 말이다.

'야성의 부름'엔 당시 알래스카에 불어닥친 금광 붐이 잘 묘사되어 있다. 벼락부자를 꿈꾸는 사람들은 사방에서 몰려들고, 그에 따라 늘어난 우편량을 감당하기 위해 배달부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푹푹 빠지는 눈 위에선 말보단 썰매를 끌 개가 더 적합한 법, 추위를 이길 긴 털과 단단한 근육을 가진 개들은 높은 값에 거래된다. 그리고 그 곳에 벅이 있다.
벅은 본래 판사집에서 기르던 개였다. 세인트버나드의 큰 덩치와 셰퍼드의 날렵한 몸을 물려받은 벅은 금광 붐의 어두운 그림자를 피해가지 못했고, 주인 몰래 알래스카의 썰매 개로 팔려간다. 그 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더이상 우정과 사랑의 세계가 아니다. 개를 매매하는 빨간스웨터 사나이의 몽둥이 세례와 동료 개 컬리의 잔혹한 죽음을 통해 배운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적자생존의 세계인 것이다.
타고난 적응력으로 새로운 세계의 삶을 익혀가는 과정에서 벅은 내면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피에 새겨진 먼 조상의 울음, 인간의 손에 길들여 지면서 봉인된 그것. 바로 야성의 부름이다.

저자 잭 런던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니체의 위버멘쉬(예전에는 '초인'으로 표기하였으나, 최근에는 원어 발음대로 표기한다.)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실제로도 그러한 사상은 그의 작품 다수에 묻어난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도 사회진화론에 따른 적자생존의 법칙이 벅을 통해 세밀히 묘사된다. 하지만 벅의 모습에서 위버멘쉬를 찾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버멘쉬는 영어로 overman 혹은 superman 으로 번역되는데,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overman이 지속적인 자기 극복의 모델이라면, superman은 타고난 초인적 존재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런 점에서 의미상 니체의 위버멘쉬에 더 가까운 것은 overman 이지만, 벅은 superman적인 요소가 강하다. 타고난 체형, 뛰어난 적응력과 전투력, 잠들어 있던 야성을 일깨우는 끝없는 내면의 속삭임.
그러하기에 벅에게서 위버멘쉬의 모습을 찾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벅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극복하고 야성의 본능을 추구했다는 것은 일면 인정하지만 앞서 언급한 선천적인 조건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과연 그러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벅의 여정을 통해 대자연의 일면을 바라보길 권한다. 개라는 것은 결국 길들여진 늑대에서 시작되지 않던가. 가축화 된지 수천, 수만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살아 꿈틀대는 야성의 본능. 벅이 야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은 단순히 집에서 키우던 개가 들개가 되어 가는 과정이 아니다. 개이기 이전에 늑대였던 그들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숭고한 여정이다.
물론 썰매개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데이브의 모습도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뼛속 깊이까지 병들어 지친 몸이면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썰매를 끌려고 노력하는 데이브. 그에게 썰매끌기는 의무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하지만, 데이브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데이브가 자신의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워가면서 까지 썰매를 끌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데이브가 죽을 때 까지 이루어낸 가치는 개의 것이 아니다. 그의 몸에 썰매를 끌기 위한 가죽 끈과 죔쇠를 채운 인간의 것일 뿐이다.

벅은 용맹을 떨치는 야성의 본모습으로 돌아간다. 늑대개. 한무리의 늑대를 이끄는 우두머리. 푸른 달빛을 받으며 설원을 달리는 한마리 맹수.
오랜 문명의 발전 속에서 인간의 야성은 어디로 갔을까. 인간의 야성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이지만 벅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켠의 꿈틀거림을 느낀다. 일종의 공명이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르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5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민용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역된 시, 특히 서양의 시를 읽을 때 가장 아쉬운 것은 우리와는 다른 정서로 공감에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다. 시의 특성상 시인에게 영향을 미친 문화가 그의 시언어에 함축적으로 담겨있기 마련이다 보니, 그들의 문화와 정서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스페인, 나에게 있어 그리 가까운 나라가 아니었던지라, 로르카의 시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한국의 진달래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시에 수차례 등장하는 백합은 상징이 아닌 하나의 꽃일 뿐이었다. 플라멩코, 집시, 민병대, 투우. 그동안 가지고 있던 막연한 이미지는 그의 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시를 느끼는 것은 한번으로는 부족하던가. 처음부터 다시 읽어내려가는 동안 그의 시는 알알이 스며들어왔다. 여전히 2부 이후의 시들은 내게 익숙치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로르카가 20대 초반에 쓴 1부의 시들은 아름다운 속삭임으로 다가왔다.
로르카는 자연을 시의 소제로 즐겨 사용했다. 특히 1부의 시에서 그러한 면이 두드러진다. 봄, 여름, 가을을 노래하고 매미, 달팽이, 도마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게 석류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을 내포한 신비로움이다. -'동녘의 노래'에서 그는 석류를 찬미한다. 석류는 별을 품은 하늘이자 여인의 젖가슴, 생명의 원천인 피(blood)였다- 쓰러져가는 오래된 버드나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죽은 버드나무'- 빗방울에 사랑과 슬픔의 화신이다 -'비'-. 자연을 담은 그의 시는 메마른 영혼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아침 공기를 가르는 태양의 눈부심,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는 바람, 고요한 밤을 울리는 풀벌레 소리에 우리를 환기시키고 각자의 상념에 빠져들게 만든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시는 죽음고 상실감, 슬픔을 노래한다. 무엇이 그를 슬프게 했을까? 역자는 해설에서 그의 시에 담긴 '안달루시아의 한(恨)'에 초점을 맞춘다. 분명 그의 시에서는 한이 느껴진다. 우리 민족의 한과는 다소 차이가 느껴지지만, 그는 절대로 처절하게 울부짖지 않는다. 우리가 '아리랑 아라리요'으로 슬픔을 승화시킨다면 그는 '아이!'라며 구슬프게 흐느낀다. 안으로 삭혀들어가는, 격렬한 외침이 아닌 고요한 속삭임. 그러하기에 그의 비애는 더욱 더 크게 다가온다. 그의 안달루시아, 세바야, 그라나다는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고스란히 흘러 들어온다.

말은 이렇지만 로르카의 시는 여전히 내게 가까운 존재가 아니다. 문화적 이질감이 보이지 않는 벽으로 그의 시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감정의 흐름까지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로르카의 속삭임은 지금까지 그의 시를 통해 되살아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