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annerist > 개츠비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피츠제럴드 단편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3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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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A.

(재즈시대 미국, 늦가을 어느 토요일 밤 뉴욕, 이스트 에그. 개츠비 저택의 해변가.  '불길하고 위협적인 또 한 차례의 십 년'을 목전에 둔, 서른 살 생일을 맞은지 얼마 안 되는 남자가 '모래 위에 벌렁' 드러누워있다. '조류를 거스르는 배' 어쩌구 중얼거리던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슨 일이오. 형씨[old sport]? 후후... 아. 그런 표정으로 이 말, 이상하게 듣지 말아요. 당신 얼굴을 보니, 내가 지난 여름 바로 이곳에서 개츠비가 나를 그렇게 불렸던 게 기억나네요. 그래요. 이상한 말이죠? 그게 나한테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친근함이었는데, 어떤 사람에겐 질투와 증오에 불을 붙이는 말이덥디다. '경솔한 사람들[careless people]'말에요.

내일이면 뉴욕을 떠난다우. 이제 동부라면 지긋지긋해. 교양? 세련? 웃기는 소리에요 다... 아. 형씨는 어떻게 생각하우? 지금은 차가운 비 맞으며 묘지에 누워있을 이 집 주인 말이오. 뉴욕 사람치고 이 집 주인을 모를 리는 없을테니. 아... 제발. 노란색 쿠페, 치정극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요. 그런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선 안되요. 그 사람은... 그야말로 영웅없는 이 평화로운 시대에 '위대한'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리는 남자란 말이오. 뭐라구? 좋아할만한 가치가 없는 경솔한 여자 좋아하다가 비명횡사한 사람 아니냐고? ... 당신 역시 경솔한 사람이구만. 이봐요. 형씨. 내 한 번만 이야기해줄테니 잘 들어요. 그 남자.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 '낭만적 민감성' 그 자체였던 그 남자가 얼마나 위대한 가치를 온 삶에 걸쳐 밀어냈는지 알기나 하시오?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돈'으로 환원되어, 가장 순수한 감정 마져도 그 쇳가루의 비린내에 밀려버린 이 빌어먹을 자본주의 속에 살면서도, 얻을 수 없을 거 알면서, 그 경솔한 여자의 가치가 이미 빛바래었을걸 알면서, 자신이 가진 순수한 감정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끝까지 밀어부친 남자가 무가치하다는 말이오? 사랑의 시지푸스란 말이오.

 그와 비슷한 삶을 밀어낸 눈 밝은 글쟁이가 있다면 주저없이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그의 삶을 써내려갈거요. 아니, 거기서 그칠 리가 없지. 분명히, 그 글쟁이는 이 남자의 삶을 평생동안 명도만 다르게 해서 그릴 게 틀림 없소. 부도 명예도 없던 시절의 비참함과 이루지 못한 사랑, 그리고 세속적 성공에 대한 갈망, 설사 그중 하나를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나머지는 이룰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지켜나가는 순수한 사랑과 낭만적 민감성, 그리고 그 과정에 짙게 배여나오는 우수와 쓸쓸함, 또 파국적 결말까지... 그는... 개츠비는. 그런 남자였다는 말이오. 알겠소? 형씨?

 

variation I. 어리석은 자만이, '다시' 바빌론을 찾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개츠비를 생각해 보자구. 부와 명예같은 물질적 성공에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딸. 걱정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이들이 가장 화려한 날을 보내기에 어울리는 곳은... 그래. 아마도 파리일거야.

이봐. 자네. 사람이 언제 망가지는지 알아? 더 이상 추구할 게 없을 때, 지금의 삶이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러울 때라고. 물질적 성공과 사랑. 두 가지 모두 자기 손 안에 있는데 뭐가 더 아쉽겠냐고. 그저 하루하루 즐기기에 바쁘겠지.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 - 그게 처제라 할 지라도 - 눈에 뭐 보이겠어. 오늘도 내일도 없는 듯이 감각적 쾌락을 즐기기에 바쁠거야. 자 근데 그 삶의 기반이 송두리채 무너져내린다면 어떨까. '사소한' 다툼이 어떻게 꼬이다보니 아내는 세상 저버리고 대공황 맞아 하루아침에 전재산이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려 어쩔 수 없이 처제 집에 사랑하는 딸까지 맡겨 버리고 그 왠수놈의 '돈' 때문에 홀로 타향을 떠돌아야한다면.

다시 그 남자는 파리로 돌아와. 대공황 전 흥청망청하던 파리의 호화로운 분위기는 흩어저려버렸겠지. 어깨를 같이 들썩이며 샴페인을 기울이던 사람들도, 눈이 부신 네온사인도 없이, 파리 거리거리를 걷는 이 남자의  몸과 마음에 그저 추적추적 비만 뿌려지고 있다면. 한국 사람들이 절터라는 데에 가서 흐트러진 수풀 가운데 넘어진 댓돌 위에 앉아 어둑어둑한 저녁 하늘을 바라보는 기분이 그럴 거야. 이쯤되면 알 거야. 그남자가 처제에게 넘어간 양육권을 되찾아 옛날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되찾으려는 꿈이, 한낮 미망에 지나지 않음을.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고? 분명 그 남자는 달라졌는데말이지? 건실한 기반도 다져놓고 그의 달콤한 시절을 무너뜨렸던 알콜중독의 마수에서도 벗어났는데도? 모르는소리. 한 번 아닌 건 돌이킬 수 없는 거라고. 쾌락에 젖어 흥청망청 살던 시절의 작자들이 처제의 집으로 들이닥쳐 깽판을 벌였기 때문에 그가 쓸쓸히 파리를 뜰 수 밖에 없던 게 아냐. 모든 걸 가졌던 시절의 그림자 때문이라구 그 날건달들의 모습이 곧 그의 과거였고 차마 다 떨쳐내지 못한 현재였다고. 동양에서 말하는 업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어. 중요한 건 돌이킬 수 없는 걸 추구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걸 이 남자가 몰랐다는게지.

이제 알겠어? 오로지 바보들만이 좋던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더 머저리같다면 혹시나 하고 그때 그 장소로 돌아가려하겠지. 그리고 남은 평생동안 그걸 후회하고 괴로워할거야. 그러니 돌아보지마. 그리워하지도 말고.

 

variation II. 가장 지독한 사랑, 자기애. 혹은 순수와 위선 사이.

육체적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그에 발맞추지 못하는 더없이 빈약한 정신세계를 가진 여자의 추한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남자 저남자 문어다리 걸치듯 만나며 서로 다른 종류의 짜릿함만을 추구하는 여자가 결국 파멸하는 모습을, 건실하고 예민한 낭만적 감수성을 지닌 청년의 눈을 빌어 간접화법으로 비난하고 싶은 마음 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나. 이 소설을 끌어나가는 건 물질적 성공을 착실히 이루어나가는 청년 덱스터이다.

가진 건 없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이를 성취할 능력이 있는 청년이 캐디 노릇을 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던시절부터 선망해오던 아름다운 주디. 그 여자를 옆에 둘 만한 물질적 성공을 거며쥐었을 때에도 이승환의 노랫말마따나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날 뿐"으로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여자 하나에 열 두명의 남자. 번갈아가며 서로 다른 매력을 즐기는 이 여자, 남자 다루는 솜씨도 능수능란해서 어느 한 남자가 '삐질'타이밍이면 어느새 달려와 달래주어 그 '일부다처'적 관계를 이어가는 이 여자를, 덱스터는 진정 사랑한 것일까. 성실하고 착한 약혼녀를 등져버리고 파국으로 치달을 걸 알면서도 주디를 안은 덱스터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덱스터가 사랑한 건, 정확히 말해 덱스터에게 중요했던 건 '누군가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자신의 순수함일거다. 사랑에 빠져 있는 자기 모습, 이 때만은 누구보다도 순수하다는 생각(혹은 착각)에 빠져 있던 게 아닐까. 그렇기에 고작 한 달도 지속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주디의 호감에도, 그녀의 거짓에도, '어떤 반감도 어떤 즐거움도 초월해(p. 83)'있던 거 아닐까. 이렇게 읽으면 마지막에 흐르는 그의 눈물, 더 이상 '순수의 시대'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음에 애통에 하는게 가증스러움으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그런데말이지. 그의 위선과 개츠비의 순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variation.III 그 버릇 어디 못 간다.

서른 두 살의 장년이 된 두 사람이 학창시절의 애틋한 감정을 떠올린다.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만큼 십여 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그때의 핑크빛을 다시 찾아가는거. 이거 뻔한 얘기지만 옆에서 보긴 더없이 즐거운 이야기잖아.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치면서 끝을 ? 꼭 비슷한 시대 살다 간 오헨리를 생각하게 되잖아?  짤막한 길이에 뒤통수 치는 반전과 여운. 한번쯤은 이런 단편을 누구나 쓰고 싶나봐. 근데 피츠제럴드는 어쩔 수 없나봐. 글 전체에 이루지 못한 사랑과 물질적 성공, 그리고 그 시절에 대한 동경을 짙게 드리우는게. 도회적이고 쓸쓸한 분위기는. 좀더 냉소적이고 세상 물정 좀 더 아는 오헨리의 단편이라고 할까. 아니아니. 피츠제럴드는 피츠제럴드일 뿐이야. 그저 그가 쓴 의외의 결말이 뒤통수친다고 해 둬야지. '개츠비스런'인물의 냄새는 풍기면서말이지. 순수를 찾는 남자와 다소 줏대없고 어리석기까지 한 여자.

그러고보니 도대체 피츠제럴드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 왜 다 이모양인거야? 남자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멋진데.

 

variations. IV 분별 있는 남자의 항변.

날 '개츠비적' 인물로 분류하지 말아주슈. 뭐 비슷한 구석이 있는 건 맞지. 물질적 성공과 사랑을 꿈꾸는, 충동적인 구석이 있으면서도 기본적으로 건실한 청년이긴 하지. 그런데.첫번째 변주곡의 웨일스나 두번째 변주곡의 덱스터처럼 무분별하게 유혹에 완벽히 굴복하지는 않잖수. 그저 불화와 의심 속에 서로 망가져가는 한 커플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지. 그래요. 뭐 그여자가 자꾸 나한테 꼬리치는게, 그들의 파국에 일조했다는거. 크게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캘먼 씨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래서 스텔라가 내게 매달릴 때, 늦긴 했어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구요. 내가 '다시 돌아올게요'라고 했다고, 나도 파국이 뻔히 보일 사랑에 매달릴 어리석은 남자라고 생각하지 말라니깐. 난 그때 더없이 화가 난 목소리(p. 136) 있었다구.

난 그런 사람이라구요. 한때 유혹에 흔들리긴 해도 금방 사리판단을 냉철히 해 내는. 알겠어요? 아마 개츠비의 판단력이 지난 시절의 사랑에 대한 미련과 갈망에 흐려지지 않았더라면 나와 똑같이 행동했을거라고.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경솔한 여자를 내쳤을 거라고.

그래서말인데. 그 과부 집을 떠나온 뒤 내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수? 그 이야기를 왜 끊었나몰라. 아마 그 벌이었을지도 몰라. 자기가 맨날 여자와 주위 환경때문에 결국 주인공 망가지는 이야기만 쓰다가 나처럼 분별력있는 남자 이야기를 쓰다보니깐. 젠장. 나도 성공한 모습 길이길이 남기고 싶었는데. 쳇. 그래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을거유. 나 조얼 콜스가, 이 글쟁이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고. 뭐? 뒤에 아예 제목에 '분별력'을 박은 사람 얘기가 나온다고? 쳇...

 

variations V. 이루지 못할 꿈, 차라리 모른다면.

개츠비가 왜 불행해졌는지 알아? 이루지 못할 꿈을 모든 걸 던져서 이뤄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안되는 걸 어거지로 되려 하는게, 억지 부리는 게 다 그쪽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는 거지. 파. 국. 이란 걸로.

근데 사람이라는게. 알면 어떻게든지, 좋든지 나쁘든지 그쪽으로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잖아? 그런 거잖아? 근데말야. 아예 그 꿈을 모르게 하는 게 어떨까. 그게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기 전 시점으로 어떤 사람을 머물게 하는 게 말야. 오랜 몸과 마음의 병에서 깨어난 이 여자, 남편이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은지도 모르고 조금 늦는 거라고 하루하루 기다리면서 더없이 행복해 하겠지. 이 행복을 최대한 늘려주는게 이 여자에게 좋은지도 모르잖아.

근데 문제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처음에 그 의사가 이 여자의 이야기를 어디서 꺼냈는지 생각해봤어? 중세의 고성 이야기 하다가 그랬잖아. 분위기 어둑어둑해지려고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꺼냈다고. 그녀가 얼마나 행복한지.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무지와 미망을 옆에서 지켜보는게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아냐고. 그 괴로움이 얼마나 크면 이 의사가 또 그럴까. '제발... 비밀 지하 감옥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시다.' 정말. 사랑이란거. 어느 정도는 차라리 모르고 그냥 좋아만 하고 살아가는게 나은지도 몰라.

 

variations VI. 피츠제럴드의 지독한 빨간 구두.

가끔 난 생각한다우. 젤다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일까. 피츠제럴드가 여자주인공에 대해 도무지 좋게 쓴 글을 찾을 수 없는걸 보고는 지독한 여성 혐오에 빠져 산 게 아닐까.

대략 분위기 보니깐. 이블린은 젊은 시절, 피츠제럴드의 소설에 나오는 '경박하고 가볍고 경솔한'여자야. 오죽하면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난 당신에게 당신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고 아름답고 속이 텅 비어 있고 쉽게 속을 훈히 들여다볼 수 있는 물건을 선물로 보내겠어(p. 149).'라는 저주 섞인 말을 던졌을까. 그런 '경솔한'여자의 댓가가 어떤 건지, 작정하고 펜을 잡았던 것 같네.

좀 해도 너무하지 않아? 젊은시절 좀 경솔하게 행동해 어느 남자에게 상처주고, 결혼하고 바람 좀 폈기로서니 딸은 '컷글라스 그릇' 모서리에 손 벤 데 패혈증 올라 손목 자르게 되고, 남편 사업도 아작나며, 아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컷글라스 그릇'에 담겨진 전사통지서를 통해 받더니, 결국엔 '컷글라스 그릇' 안고 '절망의 소리를 부르짖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 땅 아래로....(p. 185)'라니. 그녀는 피츠제럴드의 '빨간 구두'가 아니었을까. 설마. 여기에 젤다를 투사하지는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야.

근데말이지, 이 짧은 소설에 끌린다면 아마도 한때 유행하던 컷글라스 그릇 세트의 운명과 이 기구한 팔자를 지닌 여자의 일생을 병렬적으로 대비시켜가며, 그리고 그 영롱한 빛깔의 섬뜩함과 이여자의 운명을 정교하게 묘사해 낸 데 있을거야. 그래서 그냥 기분나쁜 현대판 '빨간구두'이야기 듣고 치워버리자. 하는 느낌이 덜할지도 모르지.

 

variations VII. 사랑의 가장 지독한 변수, 시간에 대하여.

'4월은 흘러갔다. 이제 4월은 지나가버렸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있건만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p. 213)' 마지막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이 연애소설 역사에 남을 것이다.

지금은 사랑할때가 아니고 다른, 뭔가 중요한 일을 할 때라고. 이 일을 먼저 하고 사랑을 찾을 거라고. 그래. 그때의 마음만은 진지하겠지. 그리고 진심이겠지.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소년과 소녀는 알게 된다. 시간과 함께 사랑도, 마음도 흘러 버림을. 다시 찾는 마음은 그때의 사랑이 아님을. 만물유전이라는 말이 그처럼 서글픈 게 없음을. 그걸 인정하고 난 다음에야 소년은 청년으로, 소녀는 숙녀가 되는지도 모른다. 첫사랑, 한때 사랑했던 사람 다시 보는 게 아니란 말 괜히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그래서 겨우 서른 페이지 남짓한 이 짤막한 변주는, 옛사랑에대한 그리움에 가끔 가슴 울컥하는 사람들에 대한 헌정이다. 돌아보지 말기를 이처럼 간곡하고 애절하게 쓰기도 힘들테니. 그래서 별 말 붙이기 힘들다. 그냥 이렇게나 말해보리라. 지나간 사랑이 떠오르는 사람들, 그저 붙잡고 읽어보라고 말이다.

'분별 있는 일 - 그들은 분별 있게 행동을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젊음을 능력과 바꾸었고, 절망으로 성공을 빚어냈다. 그러나 삶은 젊음과 함께 그의 사랑의 신선함까지 앗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p. 210)'

 

variations VIII. 파멸하지 않는 개츠비는 행복할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영웅은 그 가치를 잃는다고 했던 게 조셉 캠벨이던가. 개츠비를 읽은 사람들이 간혹 그런 생각을 할 지도 모르겠다. 개츠비가 자신의 예민함과 순수를 적당히 억제할 수 있다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부잣집 아이'앤슨이 그렇다. 개츠비가 바라마지않던 세속적 부와 명예는 처음부터 갖추고 있었고 손만 제대로 뻗는다면 자신에게 호감있는 여자와도 행복한 삶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그에게 최우선의 가치가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경솔한 행동을 하고도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다가가지 못하며 잡아야 할 시점에서도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신으로 그 타이밍도 놓쳐버린다. 이후 그의 일생은 그녀, 폴라에 미치지 못하는 여자들과 그냥저냥 호감과 혐오를 오가며, 주위 사람들에게 그저 '좋은 사람'으로 인식될 뿐이다.

'주인공'이란, '영웅(주윤발大人같은 통속적 분위기 말고, 조셉 캠벨이 말하는 "영웅" 말이다)'이란 그런 거 아닐까. 극단적적 가치를 끝까지 추구하지 못하는 인물은 이렇게 흐지부지 묘사될 수 밖에,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저 이 변주의 마지막처럼, 자신의 마음을 다 던질 상대를 찾지 못하고, 그러지도 못하고, 그저 남들에게 잘 해주는 걸로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우월감 속에, 그 외로움 속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래서다. 극단적 감정의 문제에 있어서, 애매함과 적당함은 그 어느 것 보다도 나쁘다.

"세상은 오로지 극단적인 것을 통해서만 가치를 가지고 오로지 평균적인 것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츠바이크의 이 금언을, 피츠제럴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평균. 행복하지는 않지만 불행하지는 못하는, 비참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작곡을 한다면, 이 변주곡의 선율이 아마도 가장 지독한 단조로 작곡될거다.

 

variations IX.  개츠비의 시대는...

난장판. 오월제라는 제목은 명목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모두 미쳐돌아가는 카니발이라는 표현이 걸맞는지도 모르겠다. 1차세계대전의 종전 후의 희망찬 분위기. 라고 썼으면 좋겠지만 실상은 긴장이 완전히 풀려 다들 자기 욕망을 분출해 내기에 정신없는 시대다. 재능에 대한 확신을 잃은 어느 화가 지망생은 푼돈을 '잘 나가던 시절'의 옛 친구에게 구걸하고 그 친구는 적당히 비웃고 적당히 외면한 채 '지금까지도 잘 나가는'친구들과 어깨 들썩이는 파티에 나간다. 이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사회 밑바닥 인생으로 여기저기 치이는 승전국의 패잔병 - 자기 나라의 승리가 참전 군인 일생의 승리가 아니기에 - 들이 끼어든다. 당연히, '잘 나가던 시절'의 옛사랑도 그 자리를 거듬은 말할 필요도 없고. 모두다 자기의 욕망을 분출하기에 여념이 없던 오월제가 흐르자, 광란의 분위기에 휩쓸려 누군가는 다리가 부러지고 누군가의 인생은 머리가 깨어져 으스러진다. 역시나 '피츠제럴드적'인 여자는 세속적 가치가 머물지 않는 옛사랑 앞에 매몰차게 뒤돌아서고, 이에 그 남자도 그날의 오월제도 미쳐 돌아간다. 사랑도 명예도 세속적 성공도 모두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남자는 끝내 자기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미망만 남은 사람은 그런 거다.

아마도 피츠제럴드가 바라보았던 재즈 시대의 아메리카가 그랬을거다. 물질적인 풍요와 동시에 넘쳐 흐르는 말초적 쾌락의 충족,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드문 '금주법'의 도덕적 위세는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의 글이 어둑어둑하게 마무리되는지도 모른다. 다들 미쳐돌아가는 카니발의 끝이란 그런 거다. 지독한 숙취에 머리 지끈대며 침대 짚고 일어날 때, 어제 파티에 썼던 구겨진 가면을 밟았을 때의 기분 말이다.

 

Finale.  Adagio Catabille

날이 밝아오는군요. 어이. 올백머리 형씨. 당신 직업이 뭐요? ...없어요. 광고 회사에 다니다가... 관두고... 글을 쓰고 있어요. 글? 후훗... 한때 예일 뉴스를 쓰던 시절도 있었는데... 난 형씨가 작곡가였으면 좋겠수. 이 남자의 삶, 꽤나 로맨틱한 음악이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이를 말입니까.

...형씨, 형씨는 찾고 싶은 게 있어요?
황금 모자, 황금 모자요.
형씨?
그리고 뛰어오를거요. 그녀가 외칠 때까지... 당신을 차지하겠노라고.
...
고마웠소. 말 섞어준거. 형씨라 불러준거. 이름이?
닉 캐러웨이. 당신은?
(올백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는 엷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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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20050910_백건우 베토벤 소나타 공연후기

 아마 올 하반기 서양고전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의 최대 화제 중 하나는 백건우 선생님이 DECCA레이블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프로젝트를 시작했는 걸거다. 한 작곡가에 깊이 몰두하는 백건우 선생님은 라벨의 피아노곡 전곡,, 프로코피에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 녹음을 하면서 그때마다 좋은 평 - 이 말로 백건우 선생님의 행적을 수식하는 건 사실 실례다 - 을 받아왔기에 그만큼 기대도 되고.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꿈 중 하나 아닐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그것도 메이져 음반사에서 낸다는 건.

여튼간에. 그 프로젝트의 첫빠따로 나온 이 음반, 백건우 선생님의 베토벤 중기 피아노 소나타 음반에 대해 들려오는 평이 하나같인 찬사 일색이다. 특히나, 매너가 좋아하는 23번은 리히테르의 그림자가 겹쳐보인다는 말에는 귀 쫑긋해질수밖에 없었으니. 작년 모처에서 '열정' 을 기가 막히게 두들겨대셨다는 말에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그건 핏줄 비슷한 사람끼리 해주는 덕담에 가깝겠지 어림짐작했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거라. 마침 부산에서 백건우 선생님의 연주 스케줄이 잡혀있기에 별 망설임 없이 예매. 3만원짜리 A석은 다 동나고 5만원짜리 S석이 있다. "음악을 듣는데 있어 눈은 방해가 될 뿐이다"라는 리히테르의 말이 기억나 역부러 피아니스트의 손모양새가 잘 보이지 않는, 그러나 소리는 명확히 퍼져나올 왼쪽 앞자리.

여튼간에 자리잡고 두근두근. 공연시간을 기다린다. 개 우라질리스틱 코리안 타임은 여지없이 적용되고. 다섯시 다 되었는데도 1/3이 비어있다. 매너가 예매했을때 90%정도가 매진이였는데. 종 치고도 느릿느릿 꾸역꾸역 밀려드는 포유류들은 대체 뭐냐고.

좌우간 드디어 시작. 무대 저편에서 백건우 선생님 걸어나오시자 밀려드는 박수소리. 응? 근데 걸어나오시다 만다. 무대 조명이 너무 밖아서인지 천정을 가리키고 뭐라뭐라 말씀하시는 백건우 선생님. 잠시 후, 거의 피아노 건반이 보일락말락한만큼 어둑어둑하게 조명을 줄이고 나서야 다시 걸어나오신다. 그 헤프닝에 잠시 웃음.

그때 매너 머리를 스치는 리히테르의 말. "음악을 듣는데 있어 눈은 방해가 될 뿐이다"

역시나. 그렇다는데. 그럼 거기에 응해주는게 음악 듣는 이의 자세겠지. 빙긋 웃으며 매너는 안경을 벗어버리고 눈 감아버린다. 피아노 치는 대가의 모습을 눈에 못 담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쓸떼없는 감각 끊어버리는 게 음악에 집중하긴 더 좋겠지. 하는 순간. "비창"의 첫 화음이 울린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첫 화음을 어떻게 짚는지 들으면 대강 분위기 파악이 되는 곡이다. 쿵- 이 아니라 궁- 이다. 기대했던 것 만큼 육중하게 짚지 않는다. 비통한 느낌을 과장하지 않고 덤덤하게 하나하나 소화하는 느낌. 좋게 말하면 이렇게 나쁘게 말하면 조금 밋밋했던듯. 손에 힘을 빼고 사뿐사뿐 건반을 짚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소리없이 숨죽여 슬픔을 삼키는 모습을 묘사해내고 싶으셨던걸까. 좀 힘있게 몰아쳐야 할 부분에서 끝까지 밀지 않고 그 앞에서 한 발자욱 물러서는 느낌 때문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더라. 아니면, 매너가 너무 러시안 피아니스트들의 '비창'에 익숙한 탓인가? 근데 "비창"이란 제목 자체가 그렇듯이 - 더구나나 베토벤이 직접 인 제목 아닌가 - 밀 때 확실히 미는 게 정답. 이라고, 에밀 길렐스의 스튜디오 녹음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여튼간 조금 아쉬운 연주. 실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비창' 멜로디, 그 극적 대조를 누린 게 어디냐 싶긴 하지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번.

멜로디가 상쾌한 느낌이 들어 8번과 함께 초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 매너가 좋아하는 곡. 여기서부터 백건우 선생님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확실한 극적 대비와 '이때다'싶을 때 끝까지 밀어내는 느낌이 정확히 들기 시작했다. 피아니시모와 포르티시모 사이의 무한하다싶은 대비와 간격에 넋을 잃으면서도, 무겁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더라. 상쾌하고 화려한 느낌의 주 선율을 잘 살렸던게 기억에 남는다. 듣는 내내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연주. 드디어 웃으며 박수를 치는 매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6번.

매너도 잘 안 들어본 곡이라... 그냥 눈 감고 듣다가 잠시 졸아버리다. -_-;;;;;;;;;;; 
그래도 그 기분좋고 행복한 느낌이란...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드. 디. 어. "열정"이다. 가슴 두근두근. 드디어 도입부. 따~ 라라~  헉- 했다. 건반을 아주 여리게 짚어나가신다. 어느 정도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시려고 하시나... 하는데. 순간 귀를 의심했다. 격렬한 화음을 왼손 오른손 할 것 없이, 묵직하게 그것도 거의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쌓아간다. 템포나 분위기는 제르킨에 가까운데 묵직하게 건반 짚어나가는 느낌은 정말 리히테르나 길렐스에 닮아 있다. 듣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박력을 유지하면서도 전체 멜로디 구성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편안하다. 그리고 한 소절 한 소절, 한 음 한 음 살아 꿈틀대는 느낌이라니...

어느새 1악장 마지막. '폭발'이라는 말 이외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무시무시한 속도와 박력으로 몰아친 다음 다시 한없이 여린 목소리로 멀어지더라.

그리고 주제와 변주를 주고 받는 2악장. 여리게 시작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점점 빨리지면서 '열정'의 불꽃을, 그 불씨를 보이지 않게 이어나간다. 이제껏 들어본 2악장 중 가장 빠른 템포였지만 조급하다기보다는 3악장에 폭발에 대비해서 도화선까지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옮겨가는 느낌. 딱 리히테르의 프라하 실황 2악장의 감성. 그리고 드디어 도화선에 불이 옮겨붙었다.

!

페달을 깊게 밟지 않고 다소 드라이하게 같은 화음을 두드리면서 시작. 이거 정말 리히테르 프라하 실황 분위기잖아. 하는데. 정말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와 미친듯한 열기가 불어닥친다. 이제껏 들었던 그 어떤 "열정"보다 빠르고 격렬하다. 정말 '제대로'미쳐 돌아간다. 시간이 흘러가는게 아깝기 그지없지만 그걸 인식조차 못할 정도로 멍- 하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코다. 무슨 말을 붙이는데 군더더기다. 그런 묵직함과 속도가 가능하다니... 이건 번스타인의 차이콥스키 4번을 이야기할때 매너가 쓴 표현이지만, 석유 드럼통에 불붙인 다이너마이트 던져넣은 모양새라는 말 밖엔... 아... 그리고 끝.

코리안 타임에 연주중에도 움직이는 매너 없는 사람들 많았지만, 음악 콩나물 대가리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그 분위기만은 감지했는지, 사람들 모두 폭발한다. 미친듯한 환호성과 기립박수. 매너도 홀린듯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쳐 댔으니. 매너 좋으신 백건우 선생님, 커튼 콜 몇 번을 받으시고 아주 낭만적이고 아련한 앵콜곡 한 곡까지 선물해 주시다.

역시나. 나오니깐 사람들 구름같이 모여서 사인 받으려 줄 서있고, 백건우 선생님 CD판매대에서는 미친 듯이 사람들이 CD를 사고 있다. 그거 자제하느라 혼났다. 사인을 받을까 하다가 에이 뭐... 이정도 선물도 감지덕지지. 하고 한 발자욱 물러서다. 예전 풍월당에서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CD에 받은걸로도 충분한걸. 더 욕심 부리면 아니되지...



역시나... 그 힘든 연주 하시고도 우리의 백건우 선생님, 한시간동안 팬들과 사진 찍어주시고 같이 웃어주시며 마지막 팬까지 사인 다 해 주셨단다... 아...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앞으로도 많은 연주자들의 많은 곡 많이 음반 남겨주시길... ^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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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icaru > 밤으로의 긴 여로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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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랄 때는 아버지 때문에 화가 나서 울어본 적이 아주 많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불행한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도 많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렇게 아버지와 가장 많이 충돌했던 장녀는 좀 변했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할 줄 안다. 왜? 그렇게 심한 독설가인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다는 이유일까? 아니면 시간이 가져다 준 망각이라는 것의 위력으로, ‘과거’는 다 잊었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힘이 비극을 희극(?희극씩이나..)으로 바꾸어 놓은 것일지도, 아마 과거에서 조금도 상황이 변하지 않고, 평생을 서로서로의 불운과 실패를 조롱하며 흘러갔다면 지금은 비극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는 장녀(장녀에게 뿐이었겠냐만...)에 대한 기대가 조금 있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기대와는 많이 엇나가는 딸을 보면서, “가망없어! 틀렸어!”라는 말씀을 곧잘 하셨고, “그래요, 저 못났어요. 아버지의 독설이 저주가 되어버린 거예요! 모두 당신탓이라구요.... ” 식의 울먹이는 댓구를 하면서, 가족이 모두 모인 밥상 앞에서 숟가락을 냅다 던져버리고 나온 적도 많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지난 일을 잘 잊어버리는 스타일이다. 잊는 게 속편해서 그런 건지 속이 편해지니까 제법 상처가 될 과거의 것들은 다 잊게 되었는지,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잊었다.(난 잘 잊어버리니까, 아마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 유진 오닐 같은 대작가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안 될 것이다. ) 게다가 나는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빼닮은 자식이었던 것이다. 나의 못나고 미운 점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아버지에게 발견했던 싫은 구석이기도 하고, 내가 당시의 아버지였어도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는 힘들었을 것도 같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그 때는 왜 그렇게 아버지에 ‘악을 쓰며 대들었을까?’ 아버지가 빈정 상해지면 독설이 더 심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안면서 말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의 가족 성원들은 어떤가, 음 1막이 시작됐을 때, 분위기는 사뭇 화목한 가정의 무엇과 다를 바 없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해주고, 아내는 남편에게 흐트러짐없이 보이려고 연신 머리를 매만진다. 주방의 식당에서 담소를 나누며 크게 웃는 두 아들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조금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렇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이민자(어릴적에 갖은 고생을 함)로, 돈에 인색하여 두 아들의 빈축을 사고, 어머니는 처녀 시절의 행복을 뒤로하고, 아버지와 결혼하여, 아버지의 순회공연 탓에 싸구려 호텔을 전전, 구질구질한 기차에 자기들의 집(사실 어떤 여자에게 집은 세상의 절반일 수 있다.가사에 열성적인 좋은 주부일수록 집에 대한 집념이 강하기 때문에)다운 집(극이 벌어지고 있는 여름 별장 제외하고)도 없이 아이들과 내팽개쳐졌다는 남편에 대한 피해 의식도 있다. 게다가 둘째를 일찍 하늘나라에 보낸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셋째 아이(극중 두 번째 아들 에드먼드 작가 유진 오닐의 현신)를 임신, 그러나 셋째는 병약하고 예민하기만 해, 어머니는 에드먼드에게 마저도, 피해 의식과 죄 의식이 점철된 감정으로 대한다. 알콜 중독이 있는 큰 아들 제이미는 돈푼이 주어지면 술을 마시고 여자를 사는 한량이다. 아버지에게 욕을 먹으며 자란 티가 나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드먼드...절망에, 염세주의에, 신을 무정하는 무신론자를 읽는 병약하고 예민한 청년.


놀랍고도 이중적인 가족이라는 집단의 아이러니는 이 작품 속에도 있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잡고, 조롱을 하지만, 곧 지문처리 “(절망적이면서도 즐거워하는 웃음을 지으며,) 그렇지만 이해해야지 않겠니, 운명이 저렇게 만든거지, 저할 탓은 아니야” 이것도 위로와 위안에 속한다면..... 음...

조롱과 위안이 함께하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집단, 이것이 가족이라는 생물체의 속성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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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연잎차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슬픈 카페의 노래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과 만나는 일도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에 날려온 홀씨가 바늘 끝에 내려앉는 말도 되지 않는, 그 기가 막힌 확률'로 수많은 책 가운데 하나가 독자와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 과장이 심한 걸까.

저자의 이름을 다른 책에서 우연히 자주 보게 된다거나 번역을 맡은 사람을 다른 매체에서 보게 되면 이내 그 책을 구하게 된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도 그렇게 만난 책이다. 번역은 장영희 교수가 맡았다. 원제는 'The Ballad Of The Sad Cafe'로 제목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다.

여느 소설에 등장하는 미남미녀는 온데간데 없고,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보편적이지 못한 외모나 성격을 가진 채로 묘사되고 있다. 아밀리아는 사팔뜨기 회색 눈에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이며 남자보다 힘이 센 여자다. 라이먼은 작은 키에다가 폐병까지 지닌 곱추등이다. 마빈 메이시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포악한 성격 때문에 멋진 외모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다.

어느 날 사료 창고로 쓰이던 카페에 지저분한 몰골의 라이먼이 찾아온다. 그 후 카페는 새 단장을 하여 고단하고 지친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위안을 주고 마을에 유일한 사교 장소가 된다. 인색하기 이를 데 없던 아밀리아는 라이먼에게 새 옷을 입히고 정성껏 보살펴주는데, 이 같은 아밀리아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놀라는 눈치다. 아밀리아는 보잘것없는 라이먼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돈 밖에 모르던 아밀리아는 이전에 없던 활력으로 세상을 대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어서 카페는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찾는 안락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게 4년 동안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어느 날 나타난 마빈 메이시로 인해 카페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된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의 전 남편이었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를 사랑했지만 아밀리아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고작 열흘 간의 결혼 생활은 파탄을 맞았다. 마빈 메이시는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을 정도로 못된 짓만 하고 다녔으므로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났으니 마을은 긴장할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라이먼은 마빈 메이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외로운 사람이 바로 아밀리아다. 라이먼 때문에 그토록 싫어하는 마빈 메이시를 쫓아낼 수도 없는 상황. 예전처럼 홀로 외롭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마빈 메이시와 같은 공간에서 지낼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결투를 신청하게 되고, 결과는 라이먼과 마빈 메이시의 승리로 끝이나 그 둘은 마을을 떠나게 된다. 아밀리아에게 크나 큰 고통을 안겨준 채로.

그 후 카페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가엾은 아밀리아는 슬픈 카페에 홀로 갇혔다. 스스로 목수에게 부탁해서 모든 문을 판자로 막아버린 것이다. 더 이상 카페에서 예전의 평화로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으로 바뀌어 아무도 카페를 찾지 않게 되었다. 사랑이 떠난 삭막한 아밀리아의 마음처럼 흉측하게 변한 카페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 를 읽고서 기형도의 <빈집>이 떠올랐다. 화자처럼 아밀리아는 외롭게 빈집에 갇혀 버렸다.

우리들은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 본문 중에서


저자는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지를 수 있다' 고 말한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고.

소설을 보면 그 모든 말에 수긍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그래서 세상이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제멋대로 생기더라도 성격적으로 장애가 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울 수 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는 사랑 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들의 사랑이야기다. 사랑하는 일이 사랑 받는 일보다 더 큰 괴로움을 안겨줄 지라도 기꺼이 사랑에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물음표 하나를 던져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은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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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ong > 사랑을 앓고 있는 그녀에게
슬픈 카페의 노래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G에게

오늘 문득 냇 킹 콜 아저씨의 The Christmas song을 들으니
당신 생각이 나고, 한편으로는 아~이제 연말이구나 싶더라
그래서 전에 골라준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에 이은 소설을 한편 골라주려고 해
저번 그책이 달콤하고 부담없는 음료라면 이책은 진하고 깊은 에스프레소
정도가 되겠다. 양도 그리고 질도 말이야.
130페이지 남짓한 소설을 읽어 가는데 한장 한장의 무게도 만만치가 않고
주인공들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사랑은 왜 그리도 가슴이 아리던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네가 떠오르더라. 아밀리아 때문일까?
넘치는 사랑에 아파하는 너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무어라 해줄 말이
없어 가슴만 두드리곤 했던 나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고
아, 세상엔 이런 사랑도 있구나 하면서 작가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한자락 위안 섞인 감정도 맛보았으면 하는 바램때문이기도 해.
또하나 우리 둘다 술을 못 마시긴 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그런 까페에 앉아
아밀리아가 만든 술 한잔 마시면 너의 그 지독한 향수병도 스르르
나아버리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어.

바쁘지 않은 주말 오후즈음에 네가 좋아하는 화이트 초콜릿 한잔 옆에 두고
따뜻한 담요 한장 무릎에 덮고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번역을 잘하신 건지 원래 작가의 내공인지...
아마 두가지 모두라고 생각 되지만 두께만 보고 만만히
펼쳐 들었다가 밤잠을 설칠 뻔 했거든.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동안 먹먹함에 멍하니 앉아 있을 시간이
새벽은 아니었으면 해.
당신이 울보라는 거, 내 편지가 또 이 소설이 한번 더 울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좀 들지만 그래도 실컷 울어버리고 이제 그만 어두운 거기를 나와서
내년엔 우리 환하게 웃으며 나한테 노래도 불러주고 만나서 손 잡을수 있기를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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