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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김애란의 야간비행

창비주간논평(06. 07. 25)에 젊은 소설가 김애란씨가 나섰다. '야간비행'은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 논평의 제목으로 쓰였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페이퍼의 제목은 '김애란의 야간비행'이라고 단다. 아울러 작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 올 정초에 이루어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도 자료 차원에서 옮겨다 놓는다.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가 현단계 한국문학의 듬직한 기대주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단에 '김애란'이란 이름이 떠돌 때 나는 문단 마케팅의 일종이겠거니 하고 얕잡아봤었다. 하지만 얼마전에 읽은 그녀의 단편 '성탄특선'(<문학과사회> 여름호)은 마케팅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파워'를 느끼게 해주었다. <달려라, 아비>(창비, 2005)를 몇 주 전에 사다놓고 아직 손에 못 들고 있지만, 내 식으로 분류하자면 그녀는 현단계 '계급문학'의 가장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번 논평 '야간비행'은 그러한 성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살짝 엿볼 수 있도록 해준다. 작가의 계속적인 질주를 기대한다.

-상경 후, 처음 방을 구하러 다니던 날의 날씨를 기억한다. 8월이었고, 숨막히게 무덥던 날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비지땀을 흘려가며 낯선 동네를 헤매고 있었다. 서울 물정이라면 둘 다 무지했고, 가진 돈은 터무니없이 적고, 날은 대책없이 덥기만 했던 어느날. 그럴듯한 방을 얻지 못해 소가지를 부리고 있던 나를 길가에 한참 세워두고, 작열하는 도시 한복판에 서 있던 어머니의 얼굴은, 땀과 파운데이션이 뒤범벅된 탓에 진흙처럼 금방 흘러내릴 듯했다. 우리는 너무 지친 나머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집에 들러 얼렁뚱땅 계약을 했다. 이상하리만치 천장이 높은, 깊고 서늘한 방이었다.

-다행히 조건이 맞아 어머니는 내게 몇평의 애잔함을 떼어줄 수 있었다(*단편 '성탄특선'도 방, 이번엔 성탄을 맞아 그에 걸맞는 근사한 섹스를 남들처럼 해보려고 하는 커플의 여관방 구하기 이야기이다. 나는 작가적 체험의 밑바닥에 깔린 정서가 이 '지상의 방 한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산 전망대에라도 올라가서 서울의 야경을 보노라면 그 수많은 아파트와 집들 사이에 정작 '나의 집' 한칸이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이한 일이던가!).

-그날의 기다랗던 정오, 이 땅의 지난하고 유구한 상경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방을 구한 뒤, 머리를 맞대고 함께 팥빙수를 먹었다. 깊은 피로 사이로 투명하게 부딪치던 얼음 소리, 하얗게 질려 있던 여름 하늘.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수도(首都)의 볕은, 누군가를 미워해도 좋을 만큼 충분히 강렬했고, 어머니는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연신 땀을 훔쳐댔다. 나는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래전, 셋방을 스무번도 넘게 옮겼다는 아버지의 일기(日氣)도, 그날의 20세기 태양도, 저렇게 크고 어지러웠을까?’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나는 그날 우리들 머리 위로 떠 있던 크고 둥근 해를, 그 대낮의 따가웠던 서울의 빛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매일 몸을 뉘었던 방은 어둡고 선득한 곳이었다. 작은 문 안으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면, 세로로 놓인 관처럼 깊은 내부가 시원하게 나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방에 책상과 컴퓨터 등 참으로 학생다운 가재를 들여놓았고, 네모난 가구들이 만들어내는 깔끔한 각을 보며 흡족해했다. 나는 자주 밥을 거르고, 밤을 새우고, 술을 마셨지만, 스무살의 내 몸은 지나치게 건강해 아무 때고 벌떡벌떡 일어나 놀러 나갈 수 있었다. 음악은 잘 듣지 않았고, 책은 늘 엎드려서 읽었다. 빨래를 자주 미뤘고, 어머니에게 가끔 세금을 속였던 것도 같다.

-내 몸엔 아직 읽고 쓰는 습관이 배어 있지 않았지만, 이따금 나는 대가리가 커다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써보곤 했다. 시인이신 나의 스승이 좋은 문장이라도 한번 칭찬해주는 날엔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웃었다. 나는 그 작고 불편한 방에 신을 벗고 들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쉬러 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방을 구하던 날 이후 영원히 내 머리 위를 떠나지 않던 태양,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비록 고향을 떠나오긴 했지만 나는 내 몫의 그 작은 어둠과 고요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내 몸에 꼭 맞는 그 육면(六面)의 어둠 안에서, 내 가슴팍을 향해 하늘에서 닻처럼 내려온 형광등 줄의 흔들거림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좋아했다. 딸깍이는 스위치 소리 한번에 세계는 일순 조용해졌고, 나는 반듯하게 누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언제나, 지나간 빛을 한껏 빨아 통통해진 야광별들이 천장에서 총총 빛나고 있었다. '중국의 붉은 별'도, 루카치의 별도 아닌, 납작 엎드려 가까스로 빛나던 형광색 스티커들.

-그것은 이전 세입자들이 붙여놓은 무수한 별무더기였다(*나의 집 베란다 유리문에도 그런 별무더기가 붙어 있다). 나는 이사오자마자 그 별을 떼어내려 무척 노력했지만, 대체 어떻게 붙였는지 모를 정도로 그것은 손이 닿지 않았고, 희망처럼, 쓸데없이 접착력만 좋았다. 그것은 언제나 거기 있었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아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보지 않을 수 없다면, 봐버리자고 생각하며, 꼼짝 않고 누워 야광별을 응시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거기 있는 별들의 수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나만한 크기의 몸을 가졌을 허약한 자취생들, 가진 것 없이 서둘러 몸을 섞었을 젊은 부부들, 월급과 적금, 어디론가 송금할 액수를 헤아리며 이마에 손을 얹고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젊은이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갖고 있었을 많은 사람들. 몇년째 책장에 꽂아둔 채 절대 읽지 않은 오디쎄우스는 아직 내게 '떠난다'는 말도 한번 못 붙여보고 있는데, '이 사람들, 언제 이렇게 많이 떠나오고 또 떠나갔던 것일까?'

-모처럼 찾아온 고요 속에서, 아늑한 어둠을 방해하는 발광물질을 보며, 나는 퍽 심란해했다. 아무래도 좋을 마음으로 '야광별 따위라니!'라며 투덜거렸던 것도 같다. 그런데도 나의 독립과 사생활의 의미는 어떤 통속성 안에서 저 별빛처럼 자꾸만 초라해지는 듯했다. '당신들의 계급'이 아닌 '우리들의 취향'이라는 말이 입속을 맴돌았고, 이 방이 내 방도 당신의 방도 아닌 우리들의 방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는 그것이 좀 불편했다. 내가 여름을 피해 들어온 곳이, 비지땀을 흘려가며 힘들게 도착한 곳이 결국 비슷한 삶들이 떠나오고 떠나가는, 붙인 별을 보고서야 '아, 밤이구나!'라고 안도할 수 있는 어떤 범박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 방의 크기와 높이를 떠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잘도 기어들어오는 그 가짜 빛들과 그 별들의 운동 안에서 나 역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루카치를 비틀자면, '야광별과 계급의식' 정도 되겠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결국 나는 별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약하고 조금쯤은 천박하지만 그것들이 항상 빛 가까이에 있으려고 한다는 사실과 함께. 그 빛 역시 내가 알아야 할 빛 중에 하나라고 중얼거리며 말이다. 그곳을 떠난 지 몇해가 지났고, 그 방은 이미 헐려 사라졌지만, 이따금 나는 내 성정의 경박하고 아름다운 어떤 부분, 내가 껴안는 상스러움의 어느 부분들은 그 별들의 영향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토성의 영향 아래 있는 우울한 기질의 학자들처럼, 빛을 흡수한 뒤 천천히 사라지는 야광별빛의 영향을 받으며, 나는 길을 걷고, 물건을 사고, 가끔은 그 대가리가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전화가 오면 다시 벌떡 일어나 놀러 나갔던 것은 아닐까 하고(*김애란, 혹은 '야광별의 영향 아래 있는 작가').

한국일보(06. 11. 06)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김애란씨 인터뷰

“누군가에게 어리다고 말하면, 나이가 아니라 그 말이, 그를 정말 어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잖아요? 나이 뒤로 숨고싶을 때 있는데…, 이젠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김애란(25)씨. 그는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타며 등단해 이제껏 9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그것들을 묶어 곧 첫 작품집을 내게 될 신인이다(*물론 그 단편집이 <달려라, 아비>이다). 그리고 그는, 경력으로나 나이로나 가장 일찍 한국일보문학상을 탄 작가가 됐다. 그 결정은 파격이었고, 사건이었다. 4시간여의 격론 끝에 그를 낙점한 본심 위원들조차 자신들의 결정에 잠시 숙연했고, 한 심사위원은 “카메라 뒤에 숨어있어야 할 우리가 이 결정으로 하여 카메라 앞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쟁쟁한 선배들 틈에 끼어 본심에 올랐던 당선자 역시 놀랐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첫 반응을 먼저 전했다. “말씀을 드렸더니 ‘누가 장난전화 건 거 아니냐. 제대로 알아보고 다시 연락해라’하시더군요.” 정작 본인의 첫 느낌은 놀랍고 기쁘고…, 뭐 그런 것보다 먼저 ‘찡하더라’고 말했다. 호명된 자신의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거느린 가난한 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질문을 받은 기분’이라고도 했다. “그 질문이 온당한 것이라면 이제 제가 온당한 대답을 해야 할 차례지만, 그 대답을 오래 아껴두고 싶어요. 어쩌면 평생 두고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겠죠. 그렇더라도 서두르고싶진 않아요.” 그가 염두에 둔 질문은 대화의 다른 맥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왜 쓰는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때문에’나 ‘~위해서’로 이어지는 많은 대답들, 너무 완벽하고 모범적이어서 오히려 거짓말 같은 대답들을 그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답을 구하고 그것을 정답이라고 믿다 보면 결국 속게 될 것 같아요. 차라리 죽을 때까지 몰랐으면 좋겠어요. 죽을 때까지 궁금해 하면서….”

-그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화법도 얼굴 화장도 걸음걸이도 담담하다. 그의 소설도 대체로 그렇게 읽힌다. 당선작 ‘달려라, 아비’에서, 그는 아버지 부재와 가난의 상처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고통에 신음하지도 통증을 내색하지도 않는다. 자위하듯 농담으로 얼버무리지도 않으며, 상처의 맥락을 사회화 역사화하지도 않는다. 그 상처는 극복의 대상도 화해의 상대도 아니다. “아픔을 농담처럼 말하는 것 역시 극복하려는 의지가 개입된 거겠죠. 제가 작품에서 말하게 된 상처는 대결이나 화해의 정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어쩌면 처음부터 농담처럼 주어진 상처일 겁니다.”

-일각에서는 그 낯선 전술을 세대적 감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탈사회, 탈역사적 세대의 감수성이라는 게 그것이다(*김애란의 어떤 소설들이 그런 빌미를 제공하는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작가는 예민한 사회학적 시각을 갖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이 작가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탈역사적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99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왔고, 지금껏 7년을 살았어요. 그 경험들이 저의 글 어디에든 묻어있겠죠. 곧 제 일상의, 동시대의 이야기를 한 겁니다. 제게는 세대적 공감보다는 계급적 공감이 컸어요.”(*바로 그것이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계급적 공감! 이럴 때 작가로 립서비스를 해주는군.) 

 

 

 

 

-그는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보여준 담담한 잔인성,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이 지닌, 제시에 충실하면서도 뭘 제시했는지 모르게 만드는 은근함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객관적으로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나름 조숙한 작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전달하는 태도가, 어깨에 힘주지 않고 핏대 세우지 않는 진지함이 부럽다고 말했다(*나는 <달려라, 토끼>의 작가 존 업다이크가 언급될 줄 알았다). “김수영의 시의 치열하면서도 범박한 느낌과 아득한 유머감각…, 그런 거요.”

-그는, 뭔가를 써야겠다는 생각 없이 무의식이 던져주는 한 문장을 옮겨놓고,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부르면 계속 써나가는 방식으로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중반부쯤 이르러서야 작품의 구성과 결론을 구상한다는 것이다. “당선작도 그렇게 썼어요. 쓰다 보니 아버지가 뛰어들더군요. 말도 안 붙이고 계속 내버려뒀는데 계속 뛰기에 아버지 이야기가 된 거죠.”

-그는 초등학교시절 동시 숙제를 베껴 냈다가 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있고, 그 부끄러움과 뿌듯함의 야릇한 감흥이 오래 남아 소설을 쓰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낯가림이 심한 그는 등단하던 해 겨울 현대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인연으로 시상식에 초대돼 멋 모르고 나갔다가, 그가 좋아한다는 성석제(당선자) 씨에게 인사도 못하고, 먹고 싶은 떡도 제대로 못 먹고 나왔다는 얘기를 웃으며 했다.

-그는 여행을 싫어한다고 했다. 귀찮다는 것이다. “이번에 상도 타고 했으니 그 싫어하는 일을 해볼까 해요. 상금으로 카메라 하나 사서 서울을 여행할 생각입니다. 장소로서의 서울이 아니라 관계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여행!” 문예지 겨울호에 발표할 단편 2편을 끝낸 뒤 써볼 생각이라는 첫 장편소설, 그 첫 문장을 던져줄 ‘무의식’ 공간으로 떠나겠다는 말일까(*그녀의 첫 장편소설을 기대한다).(최윤필 기자)

▲ 김애란씨는

1980년 인천생

199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입학

2003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소설부문) 수상

2005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한겨레(06. 01. 01) 김애란씨는 해가 바뀌어 세는 나이로 스물일곱 살이 됐다. 스물일곱이면 확실히 어린 연배는 아니다. 김승옥씨가 <서울 1964년 겨울>이나 <무진기행> 같은 소설을 쓸 때 나이가 스물댓 살에 불과했고, <광장> 역시 최인훈씨가 비슷한 연치에 쓴 작품이다. 현대문학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적잖은 작가들이 20대 초에 자신의 대표작을 발표하고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조숙한 천재들’의 시대도 아니고 미숙한 만큼 온갖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던 현대문학 초창기는 더더욱 아니다. 30, 40대에 등단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마흔 언저리의 작가에게도 언필칭 ‘젊은’이라는 관형어가 얹혀지는 시기다. 그런 점에서 김애란씨는 문단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작가다.

-지난해 한국 문단이 거둔 최대의 수확 중 하나가 소설가 김애란의 등장이라는 데에 토를 다는 이는 많지 않다. 김씨는 물론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면서 등단했지만, 그의 이름이 문단 안팎에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지난해 11월 하순에 출간된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에서부터였다. 표제작을 비롯해 아홉 개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은 불과 한 달여 만에 판매부수 1만 권을 훌쩍 넘어서면서 연말 문단과 독서계를 달구었다.

 

 

 

 

-책 출간 이후 연말까지 그는 신문과 잡지 인터뷰 10여 차례에 방송 출연도 예닐곱 번을 하는 등 누구보다 바쁘게 세밑을 보냈다.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한동안은 전화기를 꺼 놓기도 했다. “그리 중요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말을 반복하고 다니는 게 쑥스러웠어요. 작품보다 이미지가 더 많이 소비될까 봐 걱정도 됐구요. 여러분의 관심은 과분하고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해 감탄하거나 투정할 일은 아니고, 조용히 책상 앞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었죠.”

-첫 소설집을 낼 때만 해도 그의 생각은 ‘평범한’ 직장에 취직해서 직장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책 출간 이후 청탁이 밀려들어오면서 가을까지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마감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취업 계획은 당분간 접었어요. 하지만 언젠가 취업은 정말 하고 싶어요. 작가로서 제가 건강했으면 해서예요. 소설이란 혼자 쓰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쓰는 거라고 믿거든요.” “그런데 (본의 아니게 유명해져서) 날 받아 줄 직장이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그는 웃었다. 젊은이답게 잘 웃고 감정에 솔직하지만, 동시에 신중하고 사려 깊은 면모도 뚜렷하다.

-지나간 2005년이 자신에게 어떤 해였는가 묻자 “질문을 많이 받았던 해”라고 재치 있게 받아 넘기더니 이내 진지해진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 잘 알게 된 해였던 것 같아요. 마치 연애할 때처럼요. 왜, 연애할 때면 내가 모르던 나 자신이 잘 보이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작년은 내가 나 자신을 많이 바라본 해였어요. 때론 흥미롭게, 때론 걱정스럽게. 하지만 상황 한가운데 있어 보니까 내가 생각보단 약하지 않구나 싶었어요.”

 

-그렇다면 2006년의 계획은? “많이 돌아다니고 싶어요. 카메라 하나 사서 서울을 구경하고도 싶구요. 정해진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려서는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다시 버스에 타서 모르는 곳으로 가고 하는 식으로요.”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정해진 주제나 구상이 없이 일단 써 가면서 소설을 완성시키는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제 작법을 낭만화하거나 신비화시키려는 건 아니고요, 처음부터 무얼 쓸지 알고 시작하는 것보다는 쓰면서 주제를 ‘발견’해 가는 게 더 즐거워요. 물론 다른 방식으로, 가령 취재를 해서 쓰는 경우도 있죠.”

-선입견과는 달리 니체를 비롯한 철학서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이 당돌한 신인은 “독자에게서 ‘마음의 답장’을 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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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아침부터 두 군데 강의가 있었고, 점심 먹고 논문 한편 읽고 도서관에서 책 한권 복사하고 서점에 들러 새로 나온 계간지도 하나 챙기고(이건 필요 때문이다), 그러고 저녁을 먹으니 이 시간이다. 잠시 여유를 부려서 계간 <세계의 문학>(가을호)을 훑어보다가 이근화 시인의 시에 눈길이 머문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는 이런 시들이 마음에 든다. <문학과사회>(가을호)에도 '우리들의 진화' 외 3편이 발표됐는데, 그 정도면 아주 활발한 활동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론 이 계절에 읽은 가장 눈에 띄는 시인으로 꼽고 싶다.

 

 

 

 

약력을 보면, 이근화씨는 지난 2004년 등단하고 지난봄에 첫시집 <칸트의 동물원>(민음사, 2006)을 낸 아직 초년병 시인이다. 분류하자면, '문사마(문태준)' 계보도 아니고 소위 '미래파'도 아니다. 그의 시는 무겁지 않고 난해하지 않다. 가볍고 평이하다. 그게 마음에 든다. 나는 내게 재미있는, 그래서 지지하는 시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희망을 가져본다. 그런 의미에서 잠시 인용해보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를 사랑하는 개가 있고 나를 몰라보는 개가 있어

하얗게 비듬을 떨어뜨리며 먼저 죽어가는 개를 위해

뜨거운 수프를 끓이기, 안녕 겨울

푸른 별들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로 달려오고

그 별이 머리 위에 빛날 때 가방을 잃어버렸지

가방아 내 가방아 낡은 침대 옆에 책상 밑에

쭈글쭈글한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날 가방들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아직 건너보니 못한 교각들 아직 던져보지 못한 돌멩이들

아직도 취해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

(중략)

내가 마음에 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인생!

계절은 겨울부터 시작되고 내 마음에 드는 인생을

일월부터 다시 계획해야지 바구니와 빵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접시 위의 물은 마를 줄 모르네

물고기들과 꼬리를 맞대고 노란 별들의 세계로 가서

물고기 나무를 심어야겠다

(후략)

 

 

이 정도면 재미있고 유머러스하지 않는가? 덩달아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라고 합창하고 싶어지지 않는가? 저 혼자 폼잡는 시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들의 진화'는 또 어떠한가?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이건 놀라운 시 아닌가? 감자나 고구마가 등장하는 시들을 내가 좋아하기도 하지만(당신은 감자와 고구마를 싫어하는가?) 그 '놀라운 영양성분'에 대해서 토로하는 시는 아주 드물다. 하니, 이건 아주 드문 시이다.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 발을 사랑해

 

열 개의 손가락을 오래 사랑했다

고부라지고 빈 구명이 숭숭 뚫려 있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내 몸의 물은 내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왔다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오래 사랑했다

(중략)

 

천장 위에 쌓이는 먼지들의 고고한 자세로

우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손을 모은다

내 몸을 엉망으로 기억하는 이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기로 한다

(후략)

 

그래, 그 골목들을 나도 사랑했었다. 그래서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로 시작하는 시도 쓴 적이 있었지. 그래, 그 이불에 대해서 나도 아무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게 일상이고, 일상의 발견이다. 그러니 터놓고 얘기하자.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그리고, 너만 알고 있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사실, 아니면 어쩌겠냐구?)..   

 

 

06.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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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내 연봉은 포도나무 한그루

오랜만에 창비주간논평 한 꼭지를 옮겨온다. 문인들의 '연봉' 얘기를 다룬 보기 드문 논평인데, 필자는 소설가 백가흠씨이다. 이 글이 눈길은 끈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데, 엊저녁에 <현대문학>(12월호)에 실린 특집 '문학과 돈'의 글들을 읽었던 것. 연말정산의 시즌이 곧 돌아오기도 하지만 세밑이 되면 한해동안의 궁상스런 살림살이에 대해서 되돌아보게도 되는데, 궁상으로 치면 여느 직업 부럽지 않은 시인/소설가들의 경우엔 감회가 더할지 모르겠다(비정규직 대학강사들의 처지가 그럭저럭 동병상련이 될 만하다). 손으로 꼽을 만한 극히 일부 소설가를 제외하면 전업시인/작가로서 중산층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 부업이 불가피한 이유이고 상금이 걸린 문학상들에 목매달기도 하는 이유이다. 당장에 대안을 떠올리기 어려우므로 대략 그런 속사정만을 챙겨두고자 한다.

 

창비주간논평(06. 11. 28) 내 연봉은 포도나무 한그루

가을이 이렇게 가버리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개나리가 마음을 들볶은 게 꼭 일주일 전만 같은데, 목련은 피었는지 모르게 빗방울에 후드득 떨어진 지 사흘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낙엽 다 지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쓸쓸하게 매달려 있는 감 때문에 저는 어찌할 바 몰라 방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요.


그래서 선배 시인 한분을 꼬여내 북한산에 올랐습니다. 늦은 단풍이나 볼까 하고 말입니다. 비온 뒤라 날씨도 좋고 공기도 맑아서 아침부터 마음을 가만히 둘 길 없었는데요. 막상 산에 오르니 기대했던 거와는 달리 낙엽도 거의 진 뒤라 풍경은 시시하기만 했습니다. 대신 멋진 집들을 구경했습니다. 빨간 벽돌, 십 미터도 넘어 보이는 담으로 둘러싸인 예쁜 집들을 말입니다. 사실 예쁜지 어떤지는 잘 몰라요, 집이 보여야 집 구경을 하지요. 실은 멋지고 높은 담 구경을 했다고 해야 맞겠네요.

 

서둘러 내려와선 두부와 막걸리를 먹었어요. 고추전도 먹었구요. 산에 갔다 왔는데도 집에 돌아오는 길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산이 제 것 같지 않아서였던 것도 같아요. 취해서 속으로 중얼거렸지요. 여기다 집을 사야겠는데, 그래야 저 산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쓰다 만 소설들이 저를 애처롭게 쳐다보는데요. 술 취한 눈으로 저는 소설에게 말했지요. 니가 잘 씌어져야 거기에 집을 짓지. 소설아, 소설아 집 좀 지어줘라. 분명 거기까진 기억이 났었는데, 깨어보니 한낮이었습니다. 집을 짓고 북한산을 갖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지요.


누구나 연말이 되면 새해에 바라는 것,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서둘러 정하곤 하는데요. 몇년 전 망년회가 생각납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자친구도 없는 떨거지 친구들과의 망년회 자리였는데요. 케이크에 소원을 빌고, 촛불을 끄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이 진지해서 저도 그에 버금가는 무엇인가를 정해야만 했었는데요. 새해에 바라는 소원, 생각하자마자 금방 떠올랐어요. 제 차례가 되자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새해에는 연봉이 육백만 넘었으면 좋겠다구요. 전혀 웃기지 않는 얘기였음에도 사람들이 웃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웃었지요. 말하고 나니 조금 웃기는 것도 같았습니다.


며칠 후 선생님 댁에 신년인사하러 갔는데 술이 두잔 세잔 돌자 누군가 또 묻는 거예요. 새해에 바라는 소원이 뭐냐구요. 저는 똑같이 연봉이 육백만원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요. 그 시절 진짜 소원이었으니까요. 한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웃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소설가 이기호가 가흠아, 연봉 육백이면 한달에 오십만원 벌어야 하는데 그거 힘들다, 했어요. 정말 힘든 표정을 지었어요, 이기호 형이요. 그래서 제가 그니까 소원이지 형, 했습니다. 실은 속으로 그때 부러웠거든요. 연봉 육백만원을 이미 이룩했던 기호 형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때문에 온나라가 떠들썩하지요. 정치권, 매스컴 할 거 없이 무슨 호재라도 만난 것처럼 떠드는 것이 정말 큰일이 난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한데요. 집값이 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저는 웬 호들갑들인가 싶더라구요. 평균임금을 받는 사람이 서울에 아파트를 장만하려면 44년이 걸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때도 저는 그러건 말건 했었는데요, 평균임금을 벌게 되니 이젠 집을 갖고 싶은 거예요. 몇년 전만 해도 연봉 육백만원을 간절히 원했던 제가 말입니다. 왠지 집이 있으면 장가도 잘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구요. 그런 생각이 드니 느닷없이 가로수들이 부러워지는 거예요. 니들은 무슨 복이 있어 이렇게 비싼 도로가에 한평씩 집을 지었냐 싶은 거예요. 가로수들이 부러워지니까 신경질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어느날은 집앞에 늘어선 가로수들마다 한대씩 발길질을 한 적도 있어요.


하나 또 예전에 정말 몰랐던 일 하나가 있는데요. 바로 마당이에요. 시골에서 자란 저는 당연히 마당이 있어야 집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서울에서는 마당을 갖는 일이 큰 호사임을 깨닫게 된 거예요. 원래 간사하잖아요, 사람마음. 제가 세들어 사는 집에 감나무, 자두나무가 서 있는 꽤 넓은 마당이 있는데, 언젠가부터 제가 감나무, 자두나무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제 욕심이 얼마나 물질적으로 비대해졌나를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땅을 딛고 서 있는 모든 것과 경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경쟁심이 집값을 올리는 것이더라구요. 제가 집값 상승의 주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감나무보다 잘살아보려고 정말이지 애썼거든요.

 


예전에 시인 박형준 형과 치악산에 오른 적이 있는데요. 제가 등단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이었는데요. 작가가 되고 일년을 살았는데,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등단한 지 십년쯤 지난 형에게 치악산을 오르며 물었어요. 정말 궁금하더라구요. 어떻게 먹고 사는지 말이에요. 형 연봉은 얼마나 돼요? 박형준 시인이 껄껄 웃더니 내 연봉은 포도나무 한그루쯤 될까 몰라 했습니다. 문학하는 사람에게 연봉은 마음속에 포도나무 한그루 정도 있으면 된다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아직도 저는 가로수가 부러우니 제가 시인이 되지 못한 이유가 분명 있기는 있는 것이겠지요?

 

06. 11. 28.

 

 

P.S. '연봉 육백만원' 달성에 보탬이 돼보려고 해도 백가흠의 책으로 나와있는 건 달랑 <귀뚜라미가 온다>(문학동네, 2005)란 소설집 한권이 전부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이 제목의 흠을 꼬집기도 했는데, 사실 '귀뚜라미가 온다' 같은 건 시집의 제목으로나 어울리는 것 아닌가?('귀뚜라미'로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 차라리 데뷔작의 제목을 따서 <광어>라고 했다면 훨씬 더 묵직해보였을 것이다('광어'는 빼어난 단편이다). 어쨌거나 연말 분위기이기도 하니까 우리의 불우한 작가들을 돕는 의미에서라도 소설집 한두 권씩은 사두시길 바란다. 뭐, 샛노란 게 빛깔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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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아직도 러시아 문학인가?

재작년 6월 모스크바 통신문에 '몰락 이후: 아직도 러시아 문학인가?'란 글을 띄운 적이 있다. 다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놓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스탈린시대 러시아에 관한 자료들을 읽다가 눈에 띄길래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둔다. 본문에 밝혀져 있지만, 초고는 2000년 봄에 작성된 것이다. (*)표시하에 덧붙인 코멘트들은 2004년의 것들과 이번의 것들이 혼재돼 있다. 어차피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므로 그 정도는 굳이 가려놓지 않았다.

자료파일을 뒤적이다가 몇 년 전에 쓴 글이 있어서 여기에 옮겨둔다. 아마도 2000년 봄에 작성된 듯하다. 한 ‘행사’에서 ‘학술’발표 요청을 받고 쓴 것이지만, 전혀 ‘학술적’이지 않으며, 청중 몇 명 없는 발표장에서 그냥 읽어 내려갔던 글이다. 이후 글의 일부를 한두 곳에서 더 읽은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론 자신을 둘러보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고, 몇몇 대목은 아직도 유효하기에 보존해 두고자 한다. 글의 말미에 적었듯이, ‘몰락 이후’에 대해서 좀더 부피/규모 있는 이야기를 하고픈 욕망과 해야 할 의무를 나는 느끼지만, 지금 당장은 여건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스크바 체류 기간 동안에 한번쯤 생각을 다시 정리해볼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럼, 한번 더 읽어나가도록 하겠다(참고로, 발표문의 각주를 본문에 삽입하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그리고 새로 붙인 ‘군말’에는 *를 달았다).



 

 

 

먼저, 이 글에 대한 몇 가지 기대를 접어둘 것을 부탁하고 싶다. 나는 소위 ‘몰락 이후’ 러시아문학의 최신 동향에 대해 알지 못하며(*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 최신 동향이란 건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리키는데, 이와 관련된 책 몇 권을 샀지만, 아직 읽어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문학의 현재적 의의에 대해 강변할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직도 러시아문학인가?”라는 물음은 얼마 전부터 내가 주변의 동료들이나 나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며, 그에 대하여 내가 마련한 ‘대답’은 지극히 사적인 고백의 형식을 띠고 있다.

나는 주로 지난 8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한 일이십 년의 세월을 회고하면서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져온 파장의 몇 대목을 짚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나는 제목에서 제기한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응전의 ‘행태’가 러시아문학을 바라보는 한 가지 유효한 시선으로서 평가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럼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젊은 날, “나이가 좀 어리기 때문에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늙은 사람들이 머리 속에 집어 넣어준 돌자갈 같은 관념들을 바닷물 속에 비스듬히 쏟아버린 후로는 늘 멍청해서 거리를 걸어다닌다.”(이제하)는 문구를 모토처럼 되뇌고 다녔다. 그때 나는 30세 이후의 삶이란 왠지 부도덕하게 여겨졌고(이반 카라마조프도 그런 생각을 한다), 따라서 30세 이후의 ‘여생’에 딱히 무얼 해보리란 계획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요즘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리고 물론 그 대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다만 멍청했던 것이고, 아무런 믿는 구석이 없다는 것이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행복한 삶’(사실 이건 모순 형용 아닌가? 마치 ‘도덕적 자본주의’란 말처럼. 삶의 결핍과 고통 속에 놓여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삶을 ‘의식’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행복한 삶’이란 삶에 대한 아무런 의식도 갖고 있지 않은 삶이다. 자먀찐(E. Zamyatin)의 분류를 빌자면, ‘행복한 삶’은 ‘살아있고-죽어있는(alive-dead)’ 삶이다. 반대로 ‘살아있고-살아있는(alive-alive)’ 삶이란 모순과 고통, 실수로 뒤범벅이 된 삶이다!)이란 곧 “장례절차만이 남아있는 삶”이라고 떠들어대곤 했으니 행복과 그다지 인연이 없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다(*자먀찐의 에세이에 나오는 내용인데, <우리들>의 국역본 개정판에는 이전판에 실려 있던 이 에세이가 빠져 있다).

(*)나는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는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행복한 사람은 삶을 ‘의식’하지 않는다. 즉, 당신이 행복을 ‘의식’하는 순간, 행복은 당신과 함께 있지 않다. ‘의식’은 언제나 병과 죽음으로 우리를 이끌며, 행복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구를 빌자면, “의식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었네.” 좀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행복은 의식의 대상으로서 현전하지 않으며, 언제나 기대되거나 회고될 뿐이다.

또 그때는 시대를 탓할 만도 했다. 그리고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공화국이 바뀌었고,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디지털 혁명이 진행중이고, 사람들이 떼로 죽거나 말거나 세계 인구가 60억을 넘어섰다. 어제로써 20년이 된 5.18 또한 점차 빛 바랜 기억이 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2000년 5월 19일 시점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겠다). 이렇듯 다들 바뀌는 틈에 나도 좀 바뀐 행세를 해야 했다(디오게네스의 일화? 이 ‘통아저씨’ 디오게네스가 하루는 보아하니 주변의 시민들이 전쟁준비로 모두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자 이 디오게네스, 열심히 자기 통을 굴리고 다닌다.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디오게네스, 남들이 하는 건 그도 한다).

이젠 나이가 어린것도 아니기 때문에 마냥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도 없어서 나는 제법 아는 체도 하고 다닌다. 대략 이런 것들이 내가 그동안 멀쩡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면서 ‘겪은바’인데, 아직은 그것에 적당한 이름을 붙이지 못하겠다. 그래서 그냥 ‘세월’이라고 불러본다. 그 세월에 대한 이야기에 ‘몰락 이후’란 제목을 붙인 것은 그것이 세상을 보는 나의 기본적인 시각이면서도 동시에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물론 ‘몰락 이후’라는 건 동구권 붕괴 이후의 국제정세를 가리키는 ‘사회과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아직도’라는 건 이 글의 주제와 장르를 암시하는 바, 이어질 이야기의 주제는 ‘미련’이며, 장르는 ‘타령’이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객담에 황지우, 장정일 두 시인/작가의 이야기를 끼워넣은 것은, 내가 보기에 그들이 각각 지난 우리의 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할 만한 ‘반체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좀스런 문학을 싫어하는 나는 ‘반체제작가’들을 좋아한다. *‘순체제작가들’이란 게 있다면).

시적 규범의 해체를 통한 ‘파괴의 양식화’(“나는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라고 황지우는 말한다. 왜냐고? 기존 권력-질서(그가 ‘끔찍한 모더니티’라 부르는 것)에서 건질 만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개인-시민에 대한 공권력의 부정하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은 얼마 되지 않는다)와 ‘포르노그라피적 상상력’을 통한 ‘신버지’(신+아버지)에의 모욕(종교적 권위와 국가 권력은 ‘상징적 아버지’로서 장정일에게서 동일한 의미연관을 가지며 따라서 줄기찬 공격대상이 된다. 장정일 문학을 이끌어가는 힘은 모든 ‘아버지’에 대한 증오이며 적의이다.)은 지난 세월의 먼지를 털고 한번쯤 되새겨 볼 만한 문학적 성취에 속한다고 나는 믿는다.

#새들은 세상을 뜬다지만…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의 젊은 시인 황지우의 시 한편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아 세월은 잘 간다./ 눈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 속으로./ 잘 간다.”('活路를 찾아서') 80년 광주의 무참한 기억으로부터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던 세대에게서, 그리고 시인에게서 과연 활로란 무엇이었던가? 그저 세월이 아니었을까?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본다.”의 세월, 그 백치 같은 ‘무참한’,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만 기억의 무참함은 다스려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했는지도. 적어도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긴 그 세월의 관성이란 얼마나 끈덕지며 무서운 것인가!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아내가 먼저 이 닦고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이빨 닦고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데워서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살찐 소파에 대한 日記')라고 이젠 살찐 중년의 시인은 적고 있다.(<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1998)

생각건대, 태초에 세월이 있었고, 하품이 있었다. 이 세상의 유구함을 만들어내는 데는 이 세월의 하품, 혹은 하품의 세월을 당해낼 자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과 더불어 말한다. “나, 이번 生은 베렸어/(...) 그래, 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한번 ‘베린’ 생은 눈먼 세월의 품안에서 가고 또 잘 갈 것이다.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걸 눈뜨고 보아주는 일이다. ‘흐린 酒店’에라도 걸터앉아서 말이다. 이 한세상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새들뿐이었다.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날아가는 새들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낄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세상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날아가는 새들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우리는 그저 주저앉을 뿐이다. 하여, 우리는 ‘닭’이고 ‘닭대가리’이다. 무얼 더 궁리해볼 것도 없이 우리의 운명은 그걸로 싸다. 이걸 ‘몰락’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몰락(Untergang)의 길은 언제나 이행(Ubergang)의 길이기도 했으니까(<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인생은 유전하는 것이고, 이 몰락을 양식으로 삼아 세월은 또 다른 유구함을 빚어낼 것이다.

#양계장

 

 

 



“한세상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꿈을 잃어버린 세상은, 그런 꿈들이 모두 ‘닭장차’에 실려가 버린 사회는 오갈 데 없이 양계장이다(한 사회학자는 ‘사회의 맥도널드화’로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데, 이 경우는 ‘오리장’쯤이 될까?). 혹 도스토예프스키의 ‘닭장-유토피아’를 떠올리는가? “양계장의 닭들은 멍할 거야. 좆같다고 느낄 거야. 너무 바보같이 살아서 자기가 알인지 닭인지도 모를 거야. 자기만 그런 줄 알고 옆을 둘러보면,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바보 같은 놈들이 수천 수만 마리나 줄지어 서 있는 거야. 하나같이 바겐세일로 산 싸구려 모피 코트를 입고서. 잠을 재우지 않고 알만 낳게 하려고 형광등을 줄지어 빼곡하게 켜놓은 양계장의 좁다란 닭장 속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서 있어야 하는 닭들은 자기가 뭐하는 놈인지 진짜 모른다.”(<보트 하우스>)

이 닭들이 꿈꾸는 ‘부르주아 유토피아’를 장정일은 ‘보트 하우스’라고 부른다. 얼음을 재운 콜라를 마시며 비치 파라솔 그늘 아래 긴 의자에 드러누워(혹은 자빠져) 쉬는 보트족!(‘보트 피플’이 아니다!) 문제는 “얼음이 있으면 콜라가 없고 콜라가 있으면 얼음이 떨어지곤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데 있다고 작가는 엄살을 떨지만, 얼음과 콜라 대신에 ‘자유’와 ‘평등’이란 말을 대입해 본다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그래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고” 혁명은 고독한 것이라고('푸른 하늘을', 1960), 일찍이 양계장 주인이었던 시인은 노고지리처럼 노래했던 것일까? 그 시인, 김수영은 또 이렇게 적었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그 방을 생각하며') 이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내겐 또한 “낄낄대면서/ 깔쭉대”는 소리로 들린다. 그것은 바로 피의 소리였고 혁명의 소리였다.



지난 60년대에 그 혁명의 소리가 ‘헛소리’가 되는 데는 불과 몇 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80년대의 힘찬 함성(“깔쭉대는 소리”)이 90년대에 “폼으로 갖다놓고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듯이”(*이 <자본론>은 요즘 상당히 비싼 책이다) 푹석 ‘주저앉는’ 소리로 바뀌는 데에는 십여 년의 세월밖에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1917년 광활한 러시아를 붉은 보자기로 싸서 이 세상 밖 어딘가에 있는 ‘있지도 않은 곳’(유토피아)으로 떼어 매고 날아가고자 했던 러시아 혁명이 털 빠진 미운 오리 새끼 마냥 폭삭 양계장에 떨어지는 데에도 고작 70여 년이 걸렸을 따름이다. 이로써 머리를 굴려 세상을 뒤바꿔보려는 합리적/계산적 이성의 기획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의 열망과 함께 파산을 고한다. 우리 머리로는 안되는 것이고(*‘머리’로는 안되기 때문에 요즘 나오는 것이 ‘욕망의 기획’이다. ‘좆같다는 느낌’으로 세상을 바꿔보려는.), 해봐야 ‘닭짓’인 것. 이걸 몰락이라 부를 수 있을까?

#人神 혹은 슈퍼닭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신들에 의한, 신들을 위한, 신들만의 공화국이었다. 아니 신들의 공화국이고자 했다. 어디 레닌과 스탈린뿐이었겠는가? 사회주의 러시아가 섬기던 신들, 혹은 신적인 인간들. 가령, 7톤의 할당량 대신에 102톤의 석탄을 캐어 낸, 1935년의 전설적인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는 또 다른 ‘강철 인간’, 즉 스탈린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요구한 것은 ‘닭들’이 아니라, 이 신적인(혹은 神格의) ‘기계들’이었다. 이러한 신적 존재들에 대한 열망은 러시아 민족/민중의 깊은 종교적 열망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들은 신적인, 그래서 비인간적인 존재를 열망하였고, 신격에 못 미치는 인간들, 즉 ‘벌레들’을 강제 수용소로 내모는 데 주저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는 ‘인간-닭’의 멸종과 더불어, ‘슈퍼닭’ 혹은 人神(Man-God)들의 도래와 더불어 개시될 어떤 것이었다. 여기에 휴머니즘이 끼어들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값싼, 게다가 통속적인 센티멘탈리즘이 끼어들 여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이란 종의 사회주의적 종자개량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 저명한 반체제작가인 V. 보이노비치의 소설(<이반 촌킨의 모험>)에서 소비에트의 한 아마추어 생물학자는 감자 뿌리에 토마토 열매를 맺는 종자 개량 프로젝트에 ‘사회주의로의 길’이란 이름을 붙이고 매진하지만, 그가 절반의 성공 끝에 얻어낸 것은 ‘토마토 뿌리에 감자 줄기’였다. 문제는 이것이 비아냥거림만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데 있었다.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만 한단 말인가?(*한 인간의 삶은 완전한 사회주의의 도래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짧다!)

그 기다림 속에서 ‘완전한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는 점차 고도(Godot)를 닮아갔고, 소비에트 사회는 점차 부조리한 사회로 변모해 갔다. 그러는 사이에 간혹 ‘수용소군도’의 생활이 폭로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가 제기됐다. 그것이 몰락의 징후였던가? 아니면 값싸고 통속적인 인간적 자질(그것도 자질이라고 한다면)이란 것이 떨쳐내야 할 부르주아적 속성이 아니라, 끝내 떨쳐낼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일부였던 것일까?

아무튼 언제부턴가 소비에트 러시아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신들은 권태를 이겨내지 못했고, 人神들의 금욕은 ‘당근’의 생산량을 늘리는 데 실패했다. 사회주의는 유토피아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이행이면서 동시에 몰락이었던 것이다. 몰락, 그것은 다시 ‘인간-닭’들에게로 되돌아가는 여정에 붙여진 이름이다.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살 줄을 모르는 자들, 그들이 바로 ‘우리-닭’들이다. 몰락, 그것이 우리-닭들의 운명이다: “양계장의 닭들은 멍할 거야. 좆같다고 느낄 거야. 너무 바보같이 살아서 자기가 알인지 닭인지도 모를 거야...”

#안나 까레니나

 

 

 



그렇게 시작되는 <보트 하우스>는 작가가 “소설가로서의 나의 희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는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한 권의 장편소설을, 단숨에 써버리는 것”이라며 써내려간 소설이다. <죄와 벌>을 패러디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서울 소재의 사립대학교의 졸업반”인 한 여주인공 애라는 ‘고르비 영감’이 주인으로 있는 신촌의 화엄전당포를 찾는다. 그녀는 “숨가쁘게 넘겨온 고학 생활의 마지막 1년을 견디지 못하고 휴학에 들어갔”는데, “작년 이맘때만 해도 그녀의 장래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녀가 다니는 대학은 우리 나라에서 서너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인데다가, 학과의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앞으로 활발하게 진행될 러시아와의 교역을 생각하면 졸업 후에 괜찮은 직장을 고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IMF를 맞이하여 그녀가 맡고 있던 과외가 모조리 떨어져 나갔고, 휴학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고물딱지 사진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전당포를 순례하게 된 것. 그녀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네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영화를 좋아하는 타르코프스키. 문학을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 미술을 좋아하는 칸딘스키.”가 그들이었다. 이 “네 명의 ‘스키’는 단돈 5만원을 주고 산 폐차 직전의 차를 타고 4년 동안 함께 단짝이 되어” 어울려 다녔는데, “강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빨아, 강남에 부르주아의 천국을 만든 거”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한 건을 계획한다.

“‘스키’들이 정한 곳은 압구정동에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 당도했을 때는 거리에는 차량과 인파가 붐볐고 백화점은 아직까지 영업중이었다. 유럽식 외관을 하고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의 대리석 벽에 넷이 나란히 오줌을 누기 위해서는 유치장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에코와 푸코 그리고 바흐친을 이리 저리 섞고 아전인수식으로 변조하여 장래의 문화평론가로 행세하게 될 노어노문학과의 네 ‘스키’들은 전혀 그런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었다. 길거리에 방뇨를 하는 것은 꺼림칙하지 않지만 파출소에 붙들려 들어가 경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맥주와 보드카까지 섞어 마신 ‘스키’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백화점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서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을 눈다. 그러면서 “너무나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체제 친화적이 되었다.” 이들과 같이 차를 타고 동행하던 애라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차에서 내려 인도로 뛰어가는데, 그런 “까닭을 이 멍청한 ‘스키’들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어떤 현상도 자신들이 분석하지 못할 게 없다고 믿는 이 시건방진 ‘스키’들은 그 가운데 한 명의 ‘스키’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흠, 알 수가 없는 여자군. 안나 까레니나야.”



이어지는 얘기에서, 여대생 라스콜리니코프, 애라는 자신을 탐하는 고르비 영감을 남근 모양의 수석으로 내리치고 몇 푼 훔쳐내어 도망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죽지 않고 되살아난 고르비 영감은 초능력자였고, 애라는 그의 성적 포로가 된다(그게 그녀의 '벌'이다). 그리고는 장정일적인, 거짓말 같은 황당한 포르노그라피가 이어진다. 이것은 어중이떠중이 사회주의자 ‘스키’들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면서 동시에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종교적 화해에 대한 포르노적 희화화일 것이다(장정일은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적 유토피아 모두에 회의적이다. 그가 가장 믿는 것은, 그의 소년시절과 관련 깊지만, 매를 때리고 맞는 감각의 확실성이다. SM, 그 고통의 체험 속에서 그는 구원의 빛을 본다)...

#나 다시 돌아갈래!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절세 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 터인데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여” 작가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이 노래에서 따온다. 허만수(고르비 영감)와 김대신(빼갈), 그리고 애라. 에라, 우리도 한번 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 터이다. 그것을 나는 앞에서 ‘세월’이라고 적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여자들’ 말고 또 있다면 그것은 ‘세월’이다. 그리고 ‘운명의 힘’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세월의 힘’이다. 아, 무정의 세월이여, 몰락의 세월이여...

그리하여 다시 양계장. 세월이 주인인 이 이 양계장에선 언제나 ‘모피를 두른 닭’과 ‘털 빠진 닭’ 들이 서로의 문화적/상징적 폭력(대학이라고 해서 크게 예외는 아니다. 다만 그런 문화적/상징적 폭력(P. 부르디외)에 대해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대학이란 공간은 마련해 줄 따름이다. 지금 이 자리도 마찬가지의 뜻을 갖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며 삶의 퇴폐와 부패가 명패를 바꿔차는 것도 아니다), 즉 ‘쪼기’와 발길질을 교환하며 다투고 있을 따름이지만, 간혹 우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회한에 젖어들 때도 있는 법이다.

 

 

 

 

2000년 벽두부터 “나 다시 돌아갈래!”(<박하사탕>)라고 절규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아, 언제였던가(80년대 중․후반의 정서? 영화 <겨울나그네>에서 “나 다시 시작하고 싶어!”라는 민우(강석우)의 대사,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강석경의 <숲속의 방>, 그리고 주윤발 주연의 <영웅본색>. 덧붙여 이대근, 원미경 주연 <변강쇠>류의 코믹 에로영화들)!...



소비에트 러시아가 아직 ‘페레스트로이카’란 달빛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을 때 나는 대학에 들어왔다. 우리는 고르비 아저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탐독하면서, 사회주의의 몰락과 해체보다는 ‘강화된’ 사회주의의 장래를 믿고 싶어했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남한의 제 5공화국(그것도 ‘공화국’이라고 한다면)이 그렇게 빨리 붕괴될 줄 몰랐으며, ‘마지막 제국’인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에 대한 예견들을 미심쩍어했다(*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새로운 현실>이란 책에서 그런 예견을 했었다).

 

 

 

 

하지만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을 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복학하기가 무섭게 사회주의 러시아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러시아혁명사>를 맘잡고 한번 읽어보기도 전에, 러시아 혁명은 그렇게 파산해 버렸다. 정말 여기엔 한 푼의 에누리도 없었다! 그리하여 들이닥친 몰락 이후. 몰락 이후의 생존? 이 몰락과 파산의 잿더미 속에서, 그래도 뭔가 값나가는 것이 없을까 뒤적거려보는 이들도 나는 더러 보았는데, 그들은 ‘낭만주의자’이거나 ‘넝마주의자’이다.

아마도 80년대는 ‘총체성’의 원조, 루카치의 년대로 기록될 수 있으리라. 나는 열아홉 살에 강의실에서, 과사무실에서, 루카치란 이름이 읊어지는 걸 들었고, 학술 심포에 가서 루카치와 브레히트의 논쟁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지성사적 논쟁이라는 걸 ‘학습’했다. 비록 루카치주의자들(‘스키’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러시아 문학은 오직 1917년의 시점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그의 단언은 감동적이었다.

 

 

 

 

1917년 이전의 러시아 문학은 모두 그리로 수렴되고, 1917년 이후의 문학은 모두 그로부터 발산한다는 것. 이것은 말 그대로 문학사의 ABC였다. 문학사란 역사적 준거시점으로부터의 회고이며 전망인 것이기에. 그 밖에 내가 아는 문학사란 잘난 작가들과 못난 작가들의 ‘가족 로맨스’뿐이다(*가령, 해롤드 블룸의 <영향에의 불안>을 보라).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90년대는 ‘대화성’의 비조, 바흐친의 년대로 기록될 수 있을까? 적어도 몰락 이후에 루카치의 굵고 쉰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에 역사의 종언론과 대화주의만이 다성악처럼 울려퍼졌다.

 

 

 

 

도대체 1989년, 혹은 1991년 이후의 러시아 문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오 러시아여, 너는 어디로 가려느냐)? 1917년의 시점은 이미 유효기간을 상실했고, 1991년이 시점은 아직 전망을 얻고 있지 못한 처지에서 우리는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외로운 까마귀 신세가 되어 버렸다. 분명 뜨긴 떠야만 할 텐데, 떼어 맬 세상조차 오리무중일뿐더러, 떼어 매고 가야 할 세상밖이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리하여 몰락 이후에 우리는 망연자실 막연히 존재하고 있을 따름. 그러는 사이 우리의 삶은 어느새 ‘전당포 주인’들에게 접수 당한 듯하다. 그 덕분에 우리의 여생은 많이 좀스럽게 돼 버렸다.

# 믿음이 없는 새

 

 

 



몰락이라고? 무엇이 변해 버렸는가? 사실 변한 건 없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나빠졌을 뿐.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사실 나는 이 나라 바깥 구경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내가 몰락 이후 러시아의 현실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어폐가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몰락 이후 러시아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요즘 구경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물결을 탄 자본과 권력의 반격은 민족과 사회에 헌신하고자 하는 인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도덕공동체를 해체시켰고,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가족의 문제에만 신경을 쓰면서 ‘사회가 없는 듯이’ 행동하는 ‘규범부재’, 편법과 편의, 파렴치한 세상을 만들었다.”(김동춘, <근대의 그늘>)는 진단이 전혀 낯설지 않듯이 말이다.



“너무 짧은 기간에 지나치게 부유해지고, 지난 1000년 동안 보다 최근 30년 동안에 더 많은 변화를 겪은” 나라, 혹은 ‘거품 공화국’에 살면서 멀쩡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 대한 믿음도, 문학에 대한 믿음도 턱없이 부족한 터에, “아직도 러시아 문학인가?”를 묻는 것은 그런 오락가락하는 정신상태에서이다. “믿음이 없는 새는/ 어떤 몸짓의 날개를 치며 날아야 하는가를.”(김춘수) 간구해 보지만, 어떡할 것인가, 우린 ‘닭’인 것을!...

#편집증이냐 분열증이냐



 

 

 

중언부언 몰락의 회고 속에서, 회고의 불가피한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이다. 먼저, 편집증 환자의 길.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게 이들의 구호이다. 러시아문학에 손발을 들여놓은 이상, 손을 씻을 수도 없고, 발을 뺄 수도 없다는 것. 예컨대, 마약을 거래하는 건달들의 두목으로 등장하는 ‘빼갈’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들먹이며 ‘넘버3’ 류의 일장 연설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말야. 노인은 고기의 살점을 모두 빼앗길 걸 알면서도 상어떼와의 대결을 포기하지 않은 거야. 녹초가 되어 부두에 배를 매었을 때는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어. 하지만 노인은 아무 미련없이 끄덕끄덕 자기 오두막으로 기어들어가 모든 걸 잊어버린 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을 자는 거야. 그리고 꿈속에서 노인은 또 다시 사자 꿈을 꾸는 거야. 이 소설을 통해서 헤밍웨이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알아? 전부가 아니면 무다! 생이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거다! 헤밍웨이는 그런 메시지를 던졌던 거야. 또 바로 그게 나의 좌우명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왜, 손씻는다. 발을 뺀다하는 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지 알겠지? 나는 세상에서 그런 놈들이 김일성이보다 더 미워. 진정한 프로는 끝까지 가는 거야. 진짜 복권에 미친놈은 오늘 복권에 1등 당첨이 되어도 그 다음날 또 길거리에 나가서 복권을 사는 거야...”



“그러니 비치 파라솔 밑에 누워서 얼음 재운 콜라 따위나 홀짝이고 있고 싶지 않은 거지. 씨팔, 보트가 있으면 타고 나가야지 왜 창고에 처박아 두고 보기만 하느냐 이거야. 노를 저어 갈 힘이 있으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거지 무슨 보트 하우스 타령이야. 헤밍웨이를 봐. 사냥도 낚시도 타자기를 누를 힘도 없으니까 총을 입에 물고 탕, 해버리잖아. 죽기 전에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는 거야. 이제 써지지 않는다, 이제 써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탕! 이게 프로야.”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해체로 인하여 많은 ‘스키’들이 잠적하거나 침묵했지만, 입에 총을 물고 “탕!”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저 모두들 보무도 당당하게 공공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 한번 갈기고 너무도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주식에 재미를 붙이고, 벤처로 떼돈을 벌면서 자본주의에 적응해 갔다. 비록 러시아 문학이 앙상한 뼈다귀만 남더라도 끝까지 갈 만한, 갈 데까지 갈 만한 ‘노인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편집증 환자의 길, 즉 프로의 길이 아니라면? 분열증 환자의 길이 있다. 장정일의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는 한 여인을 사랑했으나,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해 그녀의 언니와 결혼, 처제와 형부라는 가족 관계를 맺음으로써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려고 한 사내 ‘나’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이 정신분열증적인 주인공 ‘나’는 회사의 부장으로 승진하지만 삶의 비상구를 찾기 위해 스티로폴을 타고 강물을 따라 어디론가 떠내려 간다. 그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이 스티로폴이 상징하는 표류의 이미지가 내게는 몰락 이후 러시아의 운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운명인 것으로 읽힌다(*우리는 ‘스티로폴 피플’이다).

 

 

 



‘러시아의 최초의 철학자’ 차아다예프는 명민하게도 러시아의 운명을 ‘사생아의 운명’으로 규정한 바 있다(<철학서한>). 키예프-러시아, 모스크바-러시아, 타타르-러시아, 표트르의 러시아, 소비에트-러시아, 그리고 옐친과 푸틴의 포스트소비에트-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아버지-찾기와 아버지-되기는 험난한 여정을 헤쳐왔다. 러시아(문학)에서 모태(母胎)로서의 ‘어머지-대지’와 정체(政體)로서의 ‘아버지-이념’ 간의 관계는 흥미로운 연구주제이다.

(*)지난 6월 7일, 그러니까 푸슈킨의 205주년 생일 다음날이 차아다예프의 탄생 210주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즈베스찌야>의 한 칼럼에서 지적된 대로 러시아에서도 거의 잊혀져 가는 존재인 듯하다. 6월 1일은 작곡가 글린카의 생일이었는데, 이 세 사람, 차아다예프-푸슈킨-글린카는 동세대 이념의 스펙트럼을 잘 보여주는 트리플이다. 진보-중도-보수. 물론 <철학서한> 파문 때문에, 황제에 의하며 정신병원에 감금된 ‘광인’ 차아다예프의 이념적 입장은 때로 모호하며 수수께끼이지만.



분명 몰락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아마도 문학 또한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문학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문학이 될는지도 모른다. 사실 19세기 중반에 탄생한 러시아 근대문학이 20세기 후반에 죽음을 고했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닌 듯싶다. 예술사가 보여준 바, 모든 예술은 역사의 품안에서 성장하여 나이테를 늘려가다가 역사의 껍데기 안쪽에서 소멸해 가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죽음 이후의 문학은 유산(遺産)으로서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대학 강의실에서 소수 관리자들에 의해 방부처리되어 보존될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문학에 대한 사랑은 점점 더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를 닮아갈 것이다(Poor Yorik!).

해서, 몰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문학이란 별의 몰락/사멸에서와 마찬가지로 거리에 의한 시간차에 기댄 것이기 쉽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했지만, 그 부고(訃告)가 우리에게 날아드는 데 막간의 시간이 소요되고 있을 따름이며(20세기 중반에 가장 큰 화제를 뿌린 러시아(출신) 작가와 작품이라면, 나보코프의 <롤리타>(1955),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1957),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이 세 작품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실 혹은 정치와 맞서며 러시아 문학의 죽음/단절과 부활/연속성을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몰락 이후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떠나는” 우리, 센티멘탈-쟈니의 ‘떠남’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 하여도,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의 사랑, 나의 적의

“이제 나는 안다. 해변가에서 반바지와 소매없는 티 셔츠를 입은 채 파라솔 아래 펴놓은 긴 비치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얼음 재운 콜라를 마시는 순수한 날이 내게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 글들을 쓰게 하는 것은 내 적의라는 것을.”(장정일과 마광수의 차이는 바로 이 적의의 있고 없음의 차이다.)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에 대한 ‘적의’와 이젠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적의를 밑천 삼아 내친 김에 이제껏 “손 한번 못 댄 세월”에 언젠가는 손을 봐주고 싶다. 그 세월의 무덤 속에서도 간혹 겨드랑이가 가려운 걸 나는 참지 못할 테니까...

이젠 마치기로 하자. 언젠가 ‘몰락 이후’에 대해, 역사의 ‘부록’에 대해, 나의 ‘여생’에 대해 그에 걸맞는 부피와 규모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데끼리!

04. 06. 23.



P.S. 이 글을 정리한 날은 김선일씨 살해 소식으로 아침부터 기분이 침울해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직도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겠다. 이 전지구적 ‘야만의 시대’를 어떻게 손봐야 할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제(24일) 모스크바영화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상영되었던 ‘두 공산주의자’ 감독의 한국영화 <자본당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는 아주 단순하게(그래서 상투적으로),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손쉬운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모스크바의 크레믈린궁 앞에 서 있는 마르크스 동상. 단대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다.



자본주의의 안락(coziness)을 고려하지 않는 비판은 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예찬만큼이나 공허하다. 자본주의의 안락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본주의가 가장 ‘천박한’ 경제시스템이긴 하지만, 그것은 ‘천박한’ 인간의 본성과 요구에 잘 부응하는 시스템이다(돈에 의한 차별이 신분이나 인종에 의한 차별보다 더 천박하거나 야만적인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한편의 인간들을 야만적으로 착취하지만 다른 한편의 인간들에겐 최고의 안락한 ‘서비스’를 제공한다(서비스=착취). 거꾸로 말하면, (이론적으로) ‘착취 없는 사회’는 (실질적으로) ‘서비스 없는 사회’이기도 하다(*이 서비스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다룬 바 있다). 과거 소비에트 사회주의에서처럼(러시아에서 ‘서비스’란 개념은 자본주의화 이후에 들어온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다).

서비스 대신에 들어서는 것은 ‘무표정한 의무’(=기계들)이거나 ‘자발적인 헌신’(=천사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지는 세 가지이다. (1)천박한 (인간들의) 사회 (2)기계들의 사회 (3)천사들의 사회. 물론 당신이 인간이라면, ‘인간적’으로 가장 나쁜 사회는 ‘천박한 사회’이다. 하지만, 당신이 기계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라면,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건, 최악이지만 그래도 좀 ‘덜 나쁜 사회’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더 좋은 사회’? 그건 ‘기계들의 사회’나 ‘천사들의 사회’이다. 당신이 더 좋은 사회를 기대한다면, 인간과 기계들의 전쟁에서(<터미네이터>)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분명해질 것이다. 휴머니즘은 가장 ‘인간적인’ 이즘이지만, 동시에 가장 ‘천박한’ 이즘이다…

04.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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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줄리 델피와 바타이유

 

  

 

 

필요 때문에 바타이유를 읽다가(생각보다 안 읽히는 대목이 많다) 기분전환 삼아 자료 검색을 했다. 그러다 발견한 글꼭지는 얼마전(2006. 03. 24) '한겨레'의 기획연재 '스크린 속 나의 연인'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영화 <분홍신>의 프로듀서 신창길씨가 필자이고, 그는 거기서 <비포 선라이즈>(1995)의 '셀린느'(줄리 델피를) 자신의' 연인'으로 호출하고 있었다. 한데, 그게 나에겐 줄리 델피와 바타이유의 '희귀한' 접속점을 알게 해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단은 필자의 그 연애담을 조금 따라가본다.  

-그녀는 내가 결혼을 생각하게 만든 첫번째 여자였다. 가장 가슴 벅찬 열망과 가장 고통스런 비애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 그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그녀는 실패한 연애의 상처로 인해 심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난 달콤한 탈출구였다. 영화 하겠다고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진지하게 삶을 꾸려가는 것이 진정 의미있는 인생일 거라고, 순진하고 치기어린 얘기들을 들려주었고, 그녀는 나와 함께 대학로와 인사동을 오가며 영화와 공연장을 순례하고 둘만의 여행으로 고단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연애의 모양새는 갖췄지만,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했던 그녀와의 관계는 매순간 희열과 좌절의 극단을 넘나들게 했다. 내가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던 것은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희와 열정을 붙잡고 싶은 욕망에서였다. 그녀의 일상이 편안해지고 문화탐험을 위주로 한 교양연애도 시들해지자, 결국 그녀는 좀 더 안정되고 부가가치 높은 삶을 향해 나를 떠나고 말았다. 결혼이라는 선택을 통해 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삶을 위치지우고 싶어한 그녀는, 결혼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내비친 나를 정말 순진하고 치기 어리게 바라보았다.

-내가 가진 현실적인 불확실함까지 감내할 자신이 없었던 그녀의 선택에 난 크게 반발하지 않았지만, 희열과 열정이 사라진 공백과 허탈의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그때, 코아아트홀 일요일 조조상영에서 만난 그녀 ‘셀린느’(<비포 선라이즈>의 줄리 델피)는, 그때까지 내가 알던 연애와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한순간에 뒤집어놓은, 말 그대로 ‘발견’이었다(*나도 코아아트홀에서 봤었는데). 그동안 내가 붙들려 있었던 연애가 얼마나 과도한 욕망과 집착으로 버무려진 열병덩어리였는지, 정말 내가 사랑을 느끼는 대상은 누구이며 사랑을 이뤄가는 내용과 방식은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 뒤통수를 치는 듯한 깨우침을 ‘셀린느’는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단 하룻밤의 시간뿐. 비엔나 거리를 거닐면서 제시와 셀린느는 참 많은 얘기를 나눈다. 고즈녁히 책을 보며 대화를 하는 그녀. 서글서글한 눈매에 담백한 인상의 그녀는 지적이고 사려 깊기까지 하다. 매력적인 눈웃음에 천진한 미소, 나긋한 목소리에 맑고 풍부한 감수성까지…. 내가 제시가 되어 비엔나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듯 나른한 흥분에 빠져들었다. 제시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건네게 만든, 기차 안에서 그녀가 읽고 있었던 바타이유의 <죽은 자>도 서점을 뒤져가며 열심히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불행히도 번역본을 구할 수 없었다.

(*)나는 셀린느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 바타이유의 <죽은 자>라고 하니까, 아마도 그의 소설 'The Dead Man'을 가리키는 것 같고, 보통의 영역본에는 'My Mother', 'Madame Edwarda'와 함께 묶여 있다(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 바타이유 소설선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여하튼 그래서 '줄리 델피와 바타이유'가 한데 묶이게 되는 것. 참고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의 해뜨기 전 짧은 사랑이야기, 곧 <비포 선라이즈>의 줄거리를 이미지로 잠시 따라가본다(중국어판에서 옮겨온 탓에 중국어 자막이 들어간 장면도 있다).

-그때 이후, 별 내세울 것도 없는 내 사랑과 연애는 이른바 ‘셀린느 찾기’의 흥미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신념어린 의지(!) 끝에 마침내, 나는 나의 셀린느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제시와 셀린느가 <비포 선셋>에서 다시 만난 바로 그때, 나는 나의 셀린느와 함께 옛날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크린 속 10년 만에 만난 그들은, 지난 시간의 엇갈림과 회한 속에 아쉬운 두 번째 이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객석의 나는 흐뭇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나의 셀린느의 손을 꼭 쥔 채, 그들을 애틋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보는 셀린느. 늘어난 잔주름과 시간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오랜만의 그녀에게서 발견한 안타까움이었지만, 나에게 그녀는, 사려깊고 당당하며 진지하고 순수한 10년 전 비엔나 밤거리의 셀린느, 그대로였다.

(*)나는 <비포 선셋>(2004)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작년에 비디오로 봤는데(그러니까 해가 뜨고 지기까지 내겐 10년이 걸렸다), 어느덧 '선라이즈'보다 '선셋'에 더 공감하는 나이가 됐음을 확인하고 좀 씁슬했다. 내친 김에 <비포 선셋>에 등장하는 제시와 셀린느의 '10년후'도 따라가보기로 한다. 사이즈가 좀 큰게 흠이군...

우리는 저마다 가슴에 '비엔나'를 품고 있지만(이 스틸 사진들 속에 각자의 연인들을 채워넣는 일은 부득불하며 불가피하다. 그것이 어떤 풍경이든지간에), 비엔나에도 해는 진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젠장, 책까지 읽어야 하다니!..

Before Sunset

06. 04. 09.

P.S. 때아닌 감상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해서, 얼마전에 나온 유기환 교수의 <조르주 바타이유>(살림, 2006)에 대한 동아일보의 리뷰(2006. 02. 25)를 옮겨온다. 책은 나도 단번에 읽었었는데, 리뷰를 쓰는 건 다른 일들에 밀려 늦추어졌었다. 조만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흔히 바타이유의 사상은 난해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은 난해하기보다는 난삽하고, 복잡하기보다는 산만하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난삽하고 산만하다는 걸 <저주의 몫>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됐다.) 흔히 ‘저주받은 작가’로 불리는 조르주 바타이유(1897∼1962)의 사상 체계를 조리 있게 정리한 이 책에서 불문학자인 유기환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이렇게 바타이유에 대해 독자들이 품고 있는 ‘죄책감’을 말끔히 씻어 준다.

 

 

 

 

-바타이유는 초현실주의의 제왕 브르통과 실존주의의 지존 사르트르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비판을 했던 작가였다(*서로 사이가 다 안 좋았다). 이는 그의 글이 니체의 강한 영향 아래 애초부터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함에 따라 늘 모순과 역설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타이유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저주의 몫>(1949년)과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꼽히는 <에로티시즘>(1957년)을 통해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준다(*<에로티시즘>이 아니라 <에로티즘>이다. 영역본도 그렇게 표기한다). 특히 그의 정치경제학 저서라고 할 <저주의 몫>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바타이유는 마르크스처럼 ‘과잉(잉여)’의 문제에 천착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지만 바타이유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봤다. 태양이 지구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보내는 것처럼. 문제는 이 과잉 자체가 아니라 이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양차 대전의 발발은 바로 과잉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발생한 부작용의 극치였다. 바타이유는 이 과잉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비생산적 소비’를 제시한다. 그것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대가 없이 증여하거나 심지어 불태우는 ‘포틀래치’처럼 수요공급의 법칙에 어긋나는 소비다. 바타이유가 발견한 이 ‘소비의 경제학’은 오늘날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서는가.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행위를 뜻하는 에로티시즘은 그러한 비생산적 소비의 또 다른 대표 사례다. 인간이 에로티시즘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록 순간일지라도 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며 금기의 위반을 통해 증대하는 쾌락의 경제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전히 바타이유에 대한 저주의 봉인을 풀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금기와 위반의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돌이 될 것’이라는 위협에도 신이 돌아보지 말라고 했던 곳을 응시함으로써 예언력을 획득한 그의 신탁을 듣기 위함은 아닐까.

바타이유의 관점에서 볼 때,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은 '사랑의 이전의 사랑' 혹은 '에로티즘 없는 사랑'이다('비포 러브'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거기엔 어떠한 과잉도 어떠한 비생산적 소비도 자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의 너울거림에 잠시 삶을 의탁하지만, 그 경계에서 다시 회수해간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에는 언제나 테이블 하나 정도의 거리가 끼여드는 것. 그 거리는 (불가피하다고 믿어지기에) 아쉽고, 안타깝고, 서운하고, 애틋하다. 그러한 여운 속에 그들이 남겨놓은 질문은 한 가지이다. '그들은 정말 사랑한 걸까?' 예의상,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는 던지지 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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