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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 빛샘(Vitsaem) / 199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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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은 1984년 콩쿠르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또한 노벨문학상을 제외하고 가장 상금이 많다는 리츠 파리 헤밍웨이 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뒤라스의 대표작이다.


작품의 배경은 1920년대 말 프랑스 식민치하의 베트남이다. 메콩 강을 건너던 프랑스 소녀가 백만장자인 32세 중국청년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시작하는 '연인'. 눈치 빠른 사람들은 예감했겠지만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름다운 소녀와 돈 많은 청년과의 사랑,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 따른 비애와 슬픔. 그렇다. 줄거리는 그렇다.


그런데 줄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읽는 사람의 주변 공기 밀도를 단번에 바꾸어버릴 만큼의 신비함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열다섯 살 반. 그 나이에 나는 벌써 화장을 하고 있다. 눈밑 관자놀이 부분의 주근깨를 감추려고, 토칼론 크림을 바르고나서, 그 위에 화운데이션을 바른다. 그날 따라 나는 진홍색, 즉 앵두색 루즈까지 발랐다."(연인 中)


"그녀는 그의 말 중에서 특히 그가 부자라는 것이 엿보이거나 그가 백만장자라는 것을 암시하는 따위의 말들에 귀기울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연인 中)


소녀는 로맨틱한 연예소설에 나오는 그런 여성이 아니다. 소녀는 청년이 백만장자임을 한눈에 알아본다. 은근하면서 노골적이지 않은 유혹, 때로는 대담하게 때로는 못 이기는 척, 중국인에게 호감을 갖는 백인소녀의 대범함. 소녀는 전투적인 여성이면서 매력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로 존재한다. 소녀는 돈 때문에 따라와서 섹스를 나누었다고 말하고 청년은 그것을 들으면서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위태롭기만 하다. 그것은 당시 세계관이 절묘하게 소설에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프랑스인의 집안과 부자이면서도 하위계층의 식민지 남자. 소녀에게는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있고 어머니의 대리자인 큰 오빠, 허약한 작은 오빠가 있다. 소녀가 청년을 가족에게 소개시켜줄 때, 이들의 위태로운 사랑은 허망하게 모습을 감춘다.


"그런 장면은 매번 같은 식으로 반복되리라. 나의 오빠들은 그에게 말 한마디도 걸지 않을 것이다. 그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즉 그가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 역시 더 이상 그와 말하지 않는다. 나의 큰 오빠 앞에서, 그는 더 이상 나의 애인이 아니다."(연인 中)


그럼에도 돈 많은 중국청년은 소녀를 곁에 두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여성과 달리 이 남성은 순하기만 하다. 사실 순하다는 표현보다는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소녀가 청년과의 사랑으로 인한 모욕을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한 의지가 있지만 청년은 아버지의 명조차 거부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아버지한테는 내가 있으나마나지.... 백인 소녀와 함께 있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네가 죽는 꼴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그가 옳아요.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연인 中)


그들은 헤어진다. 온갖 소문에 결국 소녀는 프랑스로 돌아가고 청년도 아버지가 정해준 여인과 결혼을 하기로 한다. 청년은 소녀가 떠나는 날, 차 안에서 여자를 볼 뿐 잡지 않는다. 소녀도 잡으라고 하지 않는다. 너와의 관계는 돈 때문이다, 라는 인상만 주며 떠난다. 그런데 프랑스로 떠나는 배 안에서 문득 소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음악이 바다로 퍼져 나가고 있는 이 순간, 모래 속으로 스며드는 물처럼 과거 속에 묻혀 버렸다. 그가 그녀의 뇌리에 되살아났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사랑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는 콜랑의 그 남자, 그녀의 연인을 생각하고 울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연인 中)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로 작품은 결말에 도달한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프랑스에서, 청년은 그가 있던 곳에서 살아간다. 시간은 늙어가고 그들도 늙어간다. 모든 것이 추억으로 남게 되고, 그 추억이란 것은 가슴을 죄어오는 슬픔과도 같은 무엇으로 생각되어진다. 서로의 소식도 모른 채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간다.


마지막까지도 간결한 문체로 억지로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지 않고 얄미울 정도로 냉정하게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뒤라스. 아마도 그녀의 문체 때문에 마지막에 책을 넘기던 손은 전율하게 된다. 마지막 문단 그 한곳에서.


"전쟁이 끝난 몇 년 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이혼을 하고, 책을 쓰고, 그러는 가운데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했다. 나야. 그녀는 첫마디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말했다. 그저 당신의 목소리나 들으려고. 그녀가 대답했다, 저예요, 안녕하셨어요? 그는 긴장하고 있었고, 예전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떨렸다. 그 떨림과 함께, 갑자기, 중국어 억양이 들려왔다. 그는 그녀가 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사이공에서 어머니를 만났을 때 전해 들었다고 했다. 또, 작은오빠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면서, 그녀와 함께 슬퍼해 주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말을 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 사랑은 변할 수 없고, 그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연인 中)


이 작품의 매력은 뒤라스의 문체다. 또한 1인칭과 3인칭을 왔다갔다 하면서 서술하는 것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놀랍고 전율한다. 별것 아닌 단순한 이야기를 이렇게 극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더불어 큰오빠에 대한 증오와 무기력에 어머니에 대한 연민, 소녀의 욕망이 줄거리와 결합하면서 이 작품은 흔하고 흔한 섬세한 문장, 로맨틱한 스토리, 센세이션한 설정 따위가 없이도 충분히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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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 '바람 구두'를 신은 당신, 카뮈와 지드의 나라로 가자!
김화영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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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는 글들의 절반은 원문이며, 절반은 번역서이다. 번역이라는 것이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모래를 쌓아올리고, 동그란 그릇을 찍으면 스폰지 케Ÿ?모양의 모래가 나온다. 혹은 별모양 얼음틀을 찍으면, 별의 모래가 된다. 번역서도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종종 어떤 작가의, 특히 외국인 작가의 소설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 때에는 그 작가의 글은 죄다 사들이곤 한다. 글이 내 머릿속에서 똑같이 나와줄 순 없으니 대신 책을 읽고 사서 모아서 책꽂이에 꽂아놓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그림자처럼 작가의 이름 아래 번역자의 이름이 나란히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김난주가 거의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다 시피 하는 것. 종종 원문의 문체도 그러한지, 궁금한 경우가 많을 적에는 아마존에서 따로 책을 구입하거나 외국에 있는 이에게 부탁을 한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나는 종종 헛갈린다. 내가 읽은 것은 까뮈인가 김화영인가? 내가 읽은 것은 하루키인가 김난주인가? 내가 읽은 것은 존 파울즈인가 김석희인가?

 

작가의 글을 번역가가 가져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의 필터가 아닌 다른 필터를 거치면, 그 작가가 꼭 외도를 한 듯한 기분을 부러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런 마당에, 차라리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은 자신의 필터가 어떤 것인지를 고백하는 참회서 같기도 하다. 십수년간을 방랑하다가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아들 마냥 그는 얌전하다.

 

모든 여행서는 떠나는 설레임이 돌아다니는 행동력에 우선하는데, 김화영은 내도록 돌아다니는 행동력을 과시한다. 얌전히 가야할 곳을 계획한 다음 그 곳을 가서 사진을 먼저 찍고, 손에 든 수첩에 메모를 하던 수학여행을 온 중학생같은 다소곳한 자세이다. 여행 내도록 김화영이 어떤 식으로 흐트러지거나 남다른 감회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읊는 생각은 일차적으로 카뮈와 지드의 필터를 거친다. 이번에는 작가가 번역가의 입을 통해 말을 하는 순서이다. 혹은, 번역가가 작가의 뒷그림자를 밟아나가려는 과정이라 보아도 좋다. 내도록 작열하고, 허물어져가는 알제리에서 번역가 김화영이 찾는 것은 철저한 현장답사이며 고증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어서, 개인의 감정이나 알제리가 주는 마력은 뒷전이다. 이것이 꼭 좋고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현장답사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명확하게 체험한 기분이다. 이를테면 김화영은 오랑은 어떤 시인가, 를 묻지 않는다. 대신 `카뮈의 오랑은 어떤 곳인가'라고 묻는다. 바다가 있는데도 바다를 등지고 앉은 도시를 보고 이방인 뫼르소가 느꼈을 작열하는 태양을 본다. 아예 직각으로 꽂히는 태양빛까지는 만끽하되 그러나, 고양이를 향해 침을 뱉던 노인까지 찾아내지는 못한 것은, 김화영의 무게중심이 `이방인', '결혼'에 있어서이지 '페스트'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았음을 보여준다. 어느 번역가나 호오를 가지고 있고, 취향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라고 수줍게 그러나 당연하게 말하는 것을 보는, 인터뷰이의 모습이 보인다.

 

하드웨어적인 물질에의 고찰

이보다 더 정직한 표지가 될 수는 없었겠지만,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페이퍼 커버를 벗겨내면 나오는 하드커버는 정말 무미건조하다. 그저 정직한 표지 하나가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컬러로 들어간 사진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도를 아주 정확히 맞추지는 않았더라도 김화영이 실은 사진들은 그 하나하나가 당분없는 호밀빵처럼 정직해 보인다. 노인이 부리는 작은, 그러나 최대한의 사치인 네스카페가 보이고 사막의 풀이 보이고 무너져가는 호텔이, 어린 카뮈가 보았을 마을이 보인다. 이 책은, 최대한 뺄 것을 빼고 꼭 해야할 말만을 실은 개인적인 연애편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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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이드 > Love just has begun.
4월 이야기 (CD + DVD) - [초특가판], Movie & Classic, Antonio Vivaldi - The Four Seasons / Concerto Grosso D minor
이와이 슈운지 감독, 마츠 다카코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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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이야기
 어느해 4월, 지금은 없어진 코아아트홀 
 다시는 못 볼꺼라 생각했던
 96년, 어릴적 먼 곳에서 만났던 남자애와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 한참이 지나,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보기 전
 이 영화에 대해 기억에 남는건

 벚꽃비
 빨간우산
 아주 짧은 러닝타임 정도였다.

 영화의 시작은 홋카이도에서 무사시노대학에 가는  우즈키를 배웅하는 식구들.

또 하나, 아, 이 장면 했던건 
빈 집( 210호더라) 에 들어가서
다다미방 가득 들어온 햇살 바라보다 
옆으로 누워버리는거.  
그리고 기억 속의 그 벚꽃비 장면 
이삿집 트럭이 오고
 길을 물어보는 동안
나오는 신부.

 세세한 장면 하나하나가
 šœ지 감독 영화답게 아름답고 평범하다.

 

 

 

이 영화는 우즈키가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와서 만나게 되는 '처음'의 어색함. 
괴상한 친구도 만나고, 역시 좀 독특한 옆집 아가씨도 만나고,



' 이 대학에는 왜 왔어?'
라는 질문에 얼버무리다가 결국은
'스미마생' 하고 앉아버리는 우즈키

그녀가 멀고먼 홋카이도에서
무사시노까지 오게 된건

고등학교때 짝사랑인 야마자키 선배를 찾아서이다.
영화 중간에 나온 '무사시노' 흑백영화는
참 뜬금없었는데,
그녀에게는 '무사시노' 란 키워드가
짝사랑의 키워드 같은 것이었다.
무사시노,무사시노,무사시노...

그녀의 짝사랑 야마자키 선배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무사시노도서점.

자전거, 책, 서점, 플라잉낚시, 벚꽃 등은 
영화내내 등장하는 주조연들이다.

1시간 정도의 짧은 영화인데, 
내 기억은 참 엉망이다.

야마자키 선배가 매주 책을 권해준다던가
옆집여자가 사실은 술집여자라던가
괴짜 친구가 우즈키의 지갑을 훔친다던가 
기억하고 있었는데, 전혀 아니였다.

 

 

 

 

Love just has begun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려는 찰나, 영화는 끝난다.
'사랑의 시작' 에서 '해피앤딩' 까지의 결말에 익숙한 나는
'사랑 시작 그 전' 에서 '사랑의 시작' 까지의 결말이 낯설고 생소하지만,
뭐, 그걸로 좋다.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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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이드 > 체호프 단편선 . 일단 무조건 읽어봐요.
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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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별을 다섯개 주기 위해 나는 다른 책 들에 다섯개 줬던 별을 다 한개씩 빼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별 기대없이 읽기 시작한 책인데 , 단 세장짜리 첫번째 단편 ' 관리의 죽음' 을 읽고 부터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정신이 번쩍들었다. 유머 소설인  짧은 단편 ' 관리의 죽음'의 결말은 다른 단편소설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체호프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을 집약적으로 나타내준다.

러시아 작가들의 책은 항상 부담스럽다. 등장하는 이름들이 길고 낯설고,  스토리도, 결론도, 사랑도 다 낯설다. 다양한 책들을 못 접해 봐서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러시아 작가들의 이야기는 독특하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뭔가요 라는 질문에 딱 이거라고 답하기 힘들듯이, 가장 감명깊게 봤던 영화가 뭔가요라는 질문에도 비슷하게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있다. 감명 깊다고 하긴 뭐하지만,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이런 젠장! 망할 영화! 했던 영화. 그 영화의 제목은  '러브 오브 시베리아' 다. 배우도 감독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티푸스에 걸려 죽는 사람이 없는 것만 빼고 이 영화는 사실적이고, 그래서 잔인하고, 그래서 또 사실적이고, 그런 점들이 나에게 오랜만에 그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체호프는 러시아의 다른 존경받는 작가들과는 달리, 민중에게 향해야 할 곳을 가르쳐주기 보다는 현실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드러냄으로서 곪아 있는 여러 곳들이 치유되기를 바랬었다.

러시아라는  저 먼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활상이 이 책을 읽는 지금 이 곳에서도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체홉의 힘이다.

별로 잘 팔릴것 같지 않은 체홉의 책이지만, 워낙 다작이었기 때문인지,  체홉의 책은 우리나라에 희곡도 단편들도 꽤나 많이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남은 체홉의 책들을 찾아보는 기쁨이 아직 나에게는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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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이드 > 에센셜 알랭 드 보통
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의 팬이라면, 이 작은 책.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나는 보통의 전기 시리즈(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이것이 사랑일까) 가 좋아. 라거나, 나는 '여행의 기술' 과 같은 책이 좋아. 그것도 아니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과 같은 일상의 철학이야기가 좋아. 라고 할 수 있겠다. 혹은... 보통이면 무조건 좋아.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처럼 말이다. 
당신이 보통의 무엇을 좋아하던지 간에, 이 책을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뭐, 앞으로 더 나올 가망성은 없어보이지만;;) 이 시리즈를 잠깐 소개한다면, 펭귄 출판사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선집이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44414펭귄의 이 시리즈는 꽤나 작고 귀엽다! 보통이 70번째라서, 뭔가 의미가 있는지는 절대 모르겠지만, 왜냐, 앞의 69권의 작가들이 쟁쟁하다 못해, 문학사의 한 페이지들을 차지하고 계시는 분들이니 말이다.

원작의 제목은 on seeing and noticing 이다. 이 책의 번역 제목인 '동물원에 가기'는 여기 등장한 단편중 하나의 제목이다. 원작의 제목은 좀 더 맛깔스러운데, 
On the Pleasures of Sadness
On Going to the Airport
On Authenticity
On Work and Happiness
On Going to the Zoo
...

그래서, 제목이 On seeing and Noticing 이다.
보통의 책이 처음.이 아니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는데, ' 끊임없이 데자부.를 느낄께다. 맹세코, 처음엔 찾아보는 시도를 했음을 밝힌다. 맨 처음 리뷰 들어가면서, 어떤 스타일의 보통을 좋아하더라도, 이 책은 무조건 좋아할 것이다. 라고 했던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아홉편의 단편( 한장밖에 안 되는 짧은 메모(on single men독신남)도 있긴 하지만서도) 이 어디선가 보통이 썼던 얘기들이기 때문다. 아마, 당신이 이미 읽고, 밑줄 빡빡 쳐 놓았던 얘기들일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이 간혹자주 보는 인기작가의 글을 짜집기한 책.이라고 미리 오해는 하지 말기를. 절대절대 아니다. 왜? 라고 묻는다면, '펭귄70주년 기념선집' 이다. 라고 한마디로 답해주겠다. 모르긴 몰라도, 보통의  그 어떤 히트친 장편보다, 펭귄70주년의 70명의 작가 안에 선배 대작가들과 함께 들어간 것이 그에겐 영광일 것이다.

첫 단편 On the Pleasures of Sadness 슬픔이 주는 기쁨( 원서의 제목이 너무 달콤하지 않은가!) 는 호퍼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Edward Hopper belongs to the category of artists whose work is sad but does not make us sad - the painterly counterpart to Bach or Leonard Cohen.
들어가는 제목, 슬픈데 기쁜거.에서 덜 반했다면, 첫 문장에서 쓰러지지 않을 도리 없다.( 내가 호퍼 팬이라 좀 오버하는걸 용서하시길) 이후에 나오는 얘기들은, 호퍼로 들어가는 첫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외로움, 이다. 호퍼의 작품들을 들어가면서, 외로움의 미학을 펼쳐낸다. ' 오스카 와일드가 언젠가 말했다. 휘슬러가 그것을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란 없었다. 고. 물론, 안개가 있었다. 많이. 하지만, 휘슬러가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를 그리기 전에는 그걸 인식하기가 약간 어려웠을 뿐이다. 와일드가 휘슬러에 대해 말했듯이, 우리는 아마도 호퍼에 대해 말할 수 있을것이다. : 호퍼가 그것을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세상에는 훨씬 적은 주유소, 리틀 셰프(런던의 체인 레스토랑 이름. 본문에 등장한다) , 공항, 기차, 모텔이 있었을 것이다'

On Going to the Airport 에서는 공항에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첫 에세이, 에드워드 호퍼, 슬픔의 기쁨에 너무 톤이 맞춰져 버려서, 두번째 작품을 읽으면서도 그 달콤한 외로움을 떨치기 힘들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본 듯한 이야기이다. 슬프고, 지겨울때 공항보다 나은 장소를 찾기 힘들다. 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문장 중간중간에 이국적인 장소들이 튀어나온다. 벵갈, 아프간, 캐스피언해, 또 한참 읽다보면, 캐나다, 파키스탄, 코리아  (;; 무작위.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쥐리히, 파리, 아테네...
그 장소들의 이름은 공항에서 출발, 도착, 연착, 등이 쉴새없이 바뀌는 보드판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보통과 함께 공항에 가서, ( 꼭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할 필요는 없다) 챠르륵, 챠르륵 넘어가는 이국의 장소들을 보며, 보통의 공항에서 느끼는 소회.를 가만히 들어주면 된다.



 

세번째 에세이 'On Authenticity' 진정성
우리의 클로에.가 나온다. 1번부터 26번까지, 알랭 드 보통은 연애의 모범생처럼, 책을 읽는 연애열등생인 나에게 번호를 착착 매겨, 반하기 시작하는 것에서 그녀의 키스를 얻기까지. 를 특유의 유머를( 한쪽 입꼬리 씩 올라가게 하는) 구사하며, 120% 공감을 이끌어내는 예들을 척척 들이대며, 이래도 안 재밌을래? 하기 시작한다.

 이 단락부터는 드디어, 호퍼의 외로움과 싸함을 떨쳐버리고, 여유있게 알랭 드 보통이라는 걸출한 선장을 지닌 이야기의 배에 느긋하게 몸을 맡길 수 있다.


낄낄대고 웃다 보면, On Work and Happiness가 나온다. 결론이 대략 참담한 것이,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이라기 보다는 얄밉기 그지없었던 '불안'을 떠올리게 하는 단편이다.

번역서의 제목으로 따오기도 한 On Going to the Zoo는 짧지만, 지극히 알랭 드 보통 스러운 글인데, 세상 천지에, 동물원 브로셔를 독자로 하여금 이렇게 진지하고, 재미있는 소설 읽듯이 읽어내게 할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낙타 브로셔. ) 물론 동물원 브로셔.는 부분이다. 이 짧은 에세이에 보통은 알다시피, 철학, 생태학, 역사, 문학 등을 다 끄집어내니깐.

On Single men . 독신남. 한장짜리 짧은 메모는 그냥 스윽 읽고 넘어가기.

On the Charm of boring Place 따분한 장소의 매력. 은 그의 출신지이기도 한 쮜리히에 대한 이야기이고, On Writing ( and Trouts) 글쓰기(와 송어) 는 보통의 '글쓰기' 이야기이라기 보다는 다른 이들의( 버지니아 울프, 괴테, 프루스트) 글쓰기와 독자로서( 보통 자신을 포함한)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다. (근데, 송어는 왜???)

이 책을 읽으면서, 선택할 것은 단 하나. 전작들을 뒤적여, 어디서 나왔는지를 일일이 찾아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즐기며 읽을 것인가. 물론 이것은 하나도 안 중요하다. 그 선택을 마쳤으면, 심호흡 하고, 정신없이 쏟아지는 말의 향연에 빠져보시길.

워낙 다작이고, 여러 스타일인지라, 그 동안 보통의 책 중 '이거!' 하고 내밀만한 책이 없었는데, 아직 보통의 책을 단 한권도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 책을 내밀겠다. 이미 보통의 팬이라면, 역시 이 책을 내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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