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 - 그리스도인의 묵상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서명옥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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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톨릭 신학의 거장이자, 철학과 신학을 통합한 독창적 사유 체계를 세운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추상적 이론이 아닌 하느님의 드라마로 해석한 신학자다. 그에게 신앙은 하느님을 멀리서 관망하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시선 안에서 그분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주체적 행위였다.

<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는 말씀(Logos)을 관념적 세계관에 가두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추상적 원리가 아닌 구체적 인격이며, 신앙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살아있는 한 편의 드라마다. 발타사르는 단언한다. 그리스도는 관찰과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변화는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나,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p.66

말씀은 단순한 활자들의 배열이 아니다. 신앙 또한 복잡한 이론이나 관념의 흔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말씀 안에서 그분의 얼굴을 마주 보고, 끊임없이 그분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분과 일치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
매일 성경을 읽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습관적으로 성호를 긋지만, 내 신앙은 여전히 문턱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고 눈먼 이에게 빛을 찾아주셨던, 그분의 기적 앞에서도 반신반의했던 바리새인.
그 냉담한 관찰자의 그림자를 나는 내 안에서 발견한다. 입으론 줄곧 믿음을 외치면서도, 타성과 관념의 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올 때마다 성모님을 바라보라고. 말씀을 온몸으로 품으셨던, 그분의 순종을 본받으라고.

오히려 마리아처럼, 자신에게 혼란스럽고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길을 기도하면서 따라갈 것이다. p.113

성모님은 아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믿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9-) 성모님의 응답(Fiat)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영혼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였다.
요셉을 잃고 가난한 과부로서 삶을 이어가며 어린 아들을 키웠던 성모님. 장성한 아들이 나자렛을 떠났을 때도 그저 말없이 지켜보셨다. 의심과 불안 속에서도 하느님을 놓지 않으셨던 천주의 모후.

성모님은 신학자가 아니었다. 화려한 언변도, 학식조차 없던 평범한 나자렛 여인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했기에, 하느님은 그 사랑에 응답하셨다. 한 여인의 순수한 믿음이 하느님 구원 드라마의 중심이 된 것이다.
하느님을 믿었지만 반쪽짜리 신앙에 머물렀던 바리새인, 관념에 사로잡혀 말씀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한 그들, 그리고 그들의 전철을 밟고 있던 나에게 저자는 속삭인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아라. 너는 이미 말씀 안에 있으며, 그분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 이해와 논리로 신앙을 분석하지 말아라. 그저 함께 머물러라. 십자가 아래 성모님처럼.”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면서도 결코 신앙을 추상적 관념으로 이해하지 않으셨던 성모님. 의심과 불안 속에서도 묵묵히 걸어가셨던 성모님을 통해, 발타사르는 신앙의 본질을 밝혀낸다. 십자가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나는 표지이자, 인간의 나약함과 어둠이 그리스도라는 형상과 하나되는 자리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정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신앙의 신비를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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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기도
안토니 블룸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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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기도는 자신보다 큰 존재에게 비는 행위로 정의된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지 20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런 내게 안토니 블룸의 <살아있는 기도>는 기도를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하는 여정으로 보여준 책이었다.

기도란 위험한 것이며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p.14

블룸은 기도를 '위험한 행위'라 말한다. 처음엔 낯설었다. 나는 기도를 언제나 평화를 주는 행위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말한다. 기도가 늘상 따스한 도피처에 머문다면 그것은 온전하지 않다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집착과 안온함을 내려놓고, 온 존재를 내맡기는 순간에야 비로소 기도가 시작된다고.

나는 여기서 성경 속 밀알을 떠올렸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듯, 기도하는 인간도 매 순간 죽고 새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럴 때 기도는 더 이상 도피가 아니라, 생과 사를 초월하는 거룩한 여정으로 거듭날 수 있다.

기도는 위험하다. 익숙한 세상과 결별을 고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투신하는 일은 어리석은 도박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매 순간 망설인다. 마치 거대한 바다 앞에 선 소금인형처럼, 나약한 모습으로. 그럼에도 하느님께선 기다리신다. 천천히 그분의 깊이에 스며들어, 바다와 우리의 경계가 희미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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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 하루의 리듬
안셀름 그륀 지음, 황미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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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추적추적 비 내리는 파리 거리를 걷는다. 닿을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두 눈 가득 슬픔을 담아 노래한다.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마리우스를 떠올리며 부르는, 뮤지컬 <레미제라블> 속 에포닌의 넘버 <On My Own>은 그렇게 시작된다. 애절한 목소리로 사랑을 갈구하지만, 마리우스의 마음은 이미 코제트에게 향해 있다. 누가 봐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소녀 코제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는 그녀 옆에서, 에포닌은 그저 초라한 배경에 불과하다. 어딜 가나 눈에 띄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밋밋한 존재감의 나처럼. 코제트처럼 사랑받고 중심에 서고 싶지만, 바깥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는 에포닌. 나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게 괴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감정선에 공명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나는 오랫동안 자문했다. 나는 왜 코제트가 될 수 없나? 주목받고, 사랑받는 삶을 간절히 원했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도 내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자존감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어디서나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하느님께서는 왜 내게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으실까. 불신과 원망만 키우던 나는 끝내 번아웃에 빠졌고, 결국 주말마다 찾던 성당마저 발길을 끊게 됐다.

신앙과 멀어진 채 무기력에 잠겨있던 그 무렵, 한 권의 책이 내 앞에 놓였다.
은은한 담청색 바탕에 푸른 잉크 몇 방울을 떨어뜨린 듯한 표지. 그 위에 새겨진 <리추얼, 하루의 리듬>이라는 제목을 가만히 손끝으로 더듬으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알게 되었다. '리추얼'이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매일 새롭게 하는 거룩한 시간이라는 것을. 안셀름 그륀 신부님이 정의한 '리추얼'은 그렇게 잔잔히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이제 당신은 하느님께 아무것도 입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드러내기를 바라십니다. (중략) 당신은 자신이 꿈꾸는 그런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강함과 약함을 지닌 평범한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p.122

매 순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인정욕구와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내 삶이, 그 구절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항상 코제트의 뒷전에 머무르며, 가슴속 외로움과 슬픔을 홀로 삭혀야 했던 에포닌. 나는 그런 그녀가 답답하고 불편했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그녀에게 감정이입하는 순간마다, 애써 부정했다. 그래서 혼자 다짐하듯 되뇌었다. '나는 에포닌이 되지 않을 거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속삭이셨다. 괜찮다고, 그 모습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그날 이후 나는 나만의 작은 리추얼을 만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성경을 펼치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 하나를 수첩에 적었다. 하루 동안 그 말씀을 품고, 짧은 기도를 드리며 묵상했다.

세상의 기준에서 에포닌은 그저 초라하고 볼품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그녀는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다. 그 믿음이 내 안에서 겨자씨처럼 싹트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코제트를 부러워한다. 인형처럼 예쁜 그녀의 얼굴, 보석처럼 눈부신 존재감. 마리우스의 사랑을 받는 그녀를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나만의 작은 리추얼을 통해 나는 알게 됐다. 하느님께서는 코제트의 화려한 미소보다, 에포닌의 눈물을 더 아끼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의 손끝에서, 그 눈물은 진주의 영롱함으로 빛난다는 것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아. 안심하여라. 두려워 말고 힘을 내어라. 힘을 내어라.
-다니엘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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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들
앙리 드 뤼박 지음, 곽진상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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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종종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뿌리로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앙리 드 뤼박의 <역설들>을 읽으며, 그 뿌리가 흔들리는 낯선 경험을 했다. 익숙한 위로가 아닌 불편한 진실 앞에서, 신앙은 나를 감싸주는 대신 조용히 밀어냈다. <역설들>은 신앙의 본질을 '역설'이란 키워드로 관통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모순과 어긋남, 그 안에 숨은 진리를 드러내는 영성 철학서다. 짧은 아포리즘으로 구성된 문장은 모호하고, 다소 불친절한 인상을 주지만 그 울림은 오래간다. 나는 그 미로같은 문장들 속에서 자꾸 길을 잃었고, 때로는 막막함을 느끼며 주저앉기도 했다. 무력함이 찾아왔다. 출구조차 찾을 수 없는 공간에 홀로 남겨진 장님처럼, 바닥을 더듬고 헤매면서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무너지며, 내 안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여정. 그럼으로 결국 고통과 죽음을 수렴하는, 눈부신 역설의 신비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 아닌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을 무시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변모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진정한 행복은 연금술의 결과일 뿐이다. p.180

<역설들>은 위로와 치유의 하느님을 말하지 않는다. 기존의 도식화된 구원 서사와는 달리, 뤼박은 명징한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움켜쥐려고 하면 모래알처럼 흘러내리고, 다가가면 무지개처럼 멀어지는 신앙. 인간이 매 순간 '감각적 확신'을 요구할수록, 하느님은 그들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으신다. 신앙은 정확히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완전한 질서가 아닌, 혼란과 모순 한가운데에서 더듬거리는 것.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욕망과 실패와 유혹이 혼재된, 피조물. 그렇기에 신앙 역시 낯설고 어두운 심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걸, 뤼박은 강조한다. 진창 속에 몸을 담근 채 별을 동경하는 운명. 서글픈 역설의 이면이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도 17,27-

뤼박의 <역설들>은 형이상학적 언어로 가득한, 불편한 책이다. 뤼박은 독자를 다독이며, 감싸주는 영성을 말하지 않는다. 존재의 심연을 침묵으로 해체하며, 낯선 신비를 마주하게 한다. 그는 나에게 익숙했던 하느님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안전한 신앙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안주했던, 과거를 성찰하며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제때 원하는 답을 내려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회의와 불신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칠 것이다. 바닥부터 더듬거리며, 그분을 찾아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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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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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뿐이에요. 그래요, 물에 다시 뛰어들지 않았다면 애나는 지금 살아 있겠죠. 하지만 애나가 원하는데 물에 들어가는 걸 내가 막으려 하거나 그랬다면 우리는 30년 이상 함께 하지 못했을 거예요. 삶은 위험해요. 매리언, 언제라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죠.(중략)솔직히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고, 왜 하필이면 나냐, 하고 하늘을 향해 신음을 토하지도 않아요. 왜 내가 아니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죽어요.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쉰여덟에 죽죠. 다만 나는 애나가 그리워요. 그게 전부에요. 애나는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이제 나는 애나 없이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해요." p.41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내세의 삶, 의식적 비존재라는 이 역설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존재는 그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중략)그녀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한 가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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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는 죽었다. 하지만 바움가트너의 감각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는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아내와 공유했던 시간 속에 머문다. 그녀가 남긴 기록을 더듬고, 흘러간 세월을 복기하며, 기억의 층위를 하나하나 되짚는다. 그 손끝에서, 애나는 끊임없이 소환된다.
이때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려지고, 폴 오스터는 '눈부신 역설'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상실 이후에도 관계는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의식적 비존재’라는 사유로 드러나며,
주인공의 애도는 기억을 복원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애나가 남긴 기록으로 그녀의 소멸은 유예됐다. 감각의 수면 위로 떠오른 아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바움가트너는 살아간다.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지워가며 홀로 서 있는 바움가트너.
그 쓸쓸한 여정에 스며든 한 줄기 빛이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닿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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