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기도
안토니 블룸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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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기도는 자신보다 큰 존재에게 비는 행위로 정의된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지 20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런 내게 안토니 블룸의 <살아있는 기도>는 기도를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하는 여정으로 보여준 책이었다.

기도란 위험한 것이며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p.14

블룸은 기도를 '위험한 행위'라 말한다. 처음엔 낯설었다. 나는 기도를 언제나 평화를 주는 행위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말한다. 기도가 늘상 따스한 도피처에 머문다면 그것은 온전하지 않다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집착과 안온함을 내려놓고, 온 존재를 내맡기는 순간에야 비로소 기도가 시작된다고.

나는 여기서 성경 속 밀알을 떠올렸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듯, 기도하는 인간도 매 순간 죽고 새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럴 때 기도는 더 이상 도피가 아니라, 생과 사를 초월하는 거룩한 여정으로 거듭날 수 있다.

기도는 위험하다. 익숙한 세상과 결별을 고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투신하는 일은 어리석은 도박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매 순간 망설인다. 마치 거대한 바다 앞에 선 소금인형처럼, 나약한 모습으로. 그럼에도 하느님께선 기다리신다. 천천히 그분의 깊이에 스며들어, 바다와 우리의 경계가 희미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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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 하루의 리듬
안셀름 그륀 지음, 황미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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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추적추적 비 내리는 파리 거리를 걷는다. 닿을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두 눈 가득 슬픔을 담아 노래한다.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마리우스를 떠올리며 부르는, 뮤지컬 <레미제라블> 속 에포닌의 넘버 <On My Own>은 그렇게 시작된다. 애절한 목소리로 사랑을 갈구하지만, 마리우스의 마음은 이미 코제트에게 향해 있다. 누가 봐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소녀 코제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는 그녀 옆에서, 에포닌은 그저 초라한 배경에 불과하다. 어딜 가나 눈에 띄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밋밋한 존재감의 나처럼. 코제트처럼 사랑받고 중심에 서고 싶지만, 바깥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는 에포닌. 나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게 괴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감정선에 공명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나는 오랫동안 자문했다. 나는 왜 코제트가 될 수 없나? 주목받고, 사랑받는 삶을 간절히 원했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도 내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자존감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어디서나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하느님께서는 왜 내게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으실까. 불신과 원망만 키우던 나는 끝내 번아웃에 빠졌고, 결국 주말마다 찾던 성당마저 발길을 끊게 됐다.

신앙과 멀어진 채 무기력에 잠겨있던 그 무렵, 한 권의 책이 내 앞에 놓였다.
은은한 담청색 바탕에 푸른 잉크 몇 방울을 떨어뜨린 듯한 표지. 그 위에 새겨진 <리추얼, 하루의 리듬>이라는 제목을 가만히 손끝으로 더듬으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알게 되었다. '리추얼'이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매일 새롭게 하는 거룩한 시간이라는 것을. 안셀름 그륀 신부님이 정의한 '리추얼'은 그렇게 잔잔히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이제 당신은 하느님께 아무것도 입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드러내기를 바라십니다. (중략) 당신은 자신이 꿈꾸는 그런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강함과 약함을 지닌 평범한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p.122

매 순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인정욕구와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내 삶이, 그 구절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항상 코제트의 뒷전에 머무르며, 가슴속 외로움과 슬픔을 홀로 삭혀야 했던 에포닌. 나는 그런 그녀가 답답하고 불편했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그녀에게 감정이입하는 순간마다, 애써 부정했다. 그래서 혼자 다짐하듯 되뇌었다. '나는 에포닌이 되지 않을 거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속삭이셨다. 괜찮다고, 그 모습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그날 이후 나는 나만의 작은 리추얼을 만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성경을 펼치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 하나를 수첩에 적었다. 하루 동안 그 말씀을 품고, 짧은 기도를 드리며 묵상했다.

세상의 기준에서 에포닌은 그저 초라하고 볼품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그녀는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다. 그 믿음이 내 안에서 겨자씨처럼 싹트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코제트를 부러워한다. 인형처럼 예쁜 그녀의 얼굴, 보석처럼 눈부신 존재감. 마리우스의 사랑을 받는 그녀를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나만의 작은 리추얼을 통해 나는 알게 됐다. 하느님께서는 코제트의 화려한 미소보다, 에포닌의 눈물을 더 아끼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의 손끝에서, 그 눈물은 진주의 영롱함으로 빛난다는 것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아. 안심하여라. 두려워 말고 힘을 내어라. 힘을 내어라.
-다니엘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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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들
앙리 드 뤼박 지음, 곽진상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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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종종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뿌리로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앙리 드 뤼박의 <역설들>을 읽으며, 그 뿌리가 흔들리는 낯선 경험을 했다. 익숙한 위로가 아닌 불편한 진실 앞에서, 신앙은 나를 감싸주는 대신 조용히 밀어냈다. <역설들>은 신앙의 본질을 '역설'이란 키워드로 관통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모순과 어긋남, 그 안에 숨은 진리를 드러내는 영성 철학서다. 짧은 아포리즘으로 구성된 문장은 모호하고, 다소 불친절한 인상을 주지만 그 울림은 오래간다. 나는 그 미로같은 문장들 속에서 자꾸 길을 잃었고, 때로는 막막함을 느끼며 주저앉기도 했다. 무력함이 찾아왔다. 출구조차 찾을 수 없는 공간에 홀로 남겨진 장님처럼, 바닥을 더듬고 헤매면서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무너지며, 내 안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여정. 그럼으로 결국 고통과 죽음을 수렴하는, 눈부신 역설의 신비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 아닌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을 무시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변모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진정한 행복은 연금술의 결과일 뿐이다. p.180

<역설들>은 위로와 치유의 하느님을 말하지 않는다. 기존의 도식화된 구원 서사와는 달리, 뤼박은 명징한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움켜쥐려고 하면 모래알처럼 흘러내리고, 다가가면 무지개처럼 멀어지는 신앙. 인간이 매 순간 '감각적 확신'을 요구할수록, 하느님은 그들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으신다. 신앙은 정확히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완전한 질서가 아닌, 혼란과 모순 한가운데에서 더듬거리는 것.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욕망과 실패와 유혹이 혼재된, 피조물. 그렇기에 신앙 역시 낯설고 어두운 심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걸, 뤼박은 강조한다. 진창 속에 몸을 담근 채 별을 동경하는 운명. 서글픈 역설의 이면이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도 17,27-

뤼박의 <역설들>은 형이상학적 언어로 가득한, 불편한 책이다. 뤼박은 독자를 다독이며, 감싸주는 영성을 말하지 않는다. 존재의 심연을 침묵으로 해체하며, 낯선 신비를 마주하게 한다. 그는 나에게 익숙했던 하느님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안전한 신앙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안주했던, 과거를 성찰하며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제때 원하는 답을 내려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회의와 불신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칠 것이다. 바닥부터 더듬거리며, 그분을 찾아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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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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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뿐이에요. 그래요, 물에 다시 뛰어들지 않았다면 애나는 지금 살아 있겠죠. 하지만 애나가 원하는데 물에 들어가는 걸 내가 막으려 하거나 그랬다면 우리는 30년 이상 함께 하지 못했을 거예요. 삶은 위험해요. 매리언, 언제라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죠.(중략)솔직히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고, 왜 하필이면 나냐, 하고 하늘을 향해 신음을 토하지도 않아요. 왜 내가 아니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죽어요.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쉰여덟에 죽죠. 다만 나는 애나가 그리워요. 그게 전부에요. 애나는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이제 나는 애나 없이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해요." p.41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내세의 삶, 의식적 비존재라는 이 역설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존재는 그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중략)그녀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한 가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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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는 죽었다. 하지만 바움가트너의 감각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는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아내와 공유했던 시간 속에 머문다. 그녀가 남긴 기록을 더듬고, 흘러간 세월을 복기하며, 기억의 층위를 하나하나 되짚는다. 그 손끝에서, 애나는 끊임없이 소환된다.
이때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려지고, 폴 오스터는 '눈부신 역설'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상실 이후에도 관계는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의식적 비존재’라는 사유로 드러나며,
주인공의 애도는 기억을 복원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애나가 남긴 기록으로 그녀의 소멸은 유예됐다. 감각의 수면 위로 떠오른 아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바움가트너는 살아간다.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지워가며 홀로 서 있는 바움가트너.
그 쓸쓸한 여정에 스며든 한 줄기 빛이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닿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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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나는 북유럽 동화 - 노르웨이부터 아이슬란드까지 신비롭고 환상적인 북유럽 동화 32편 드디어 시리즈 6
페테르 크리스텐 아스비에른센 지음, 카이 닐센 그림,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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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다. 주말을 제외하면 얼굴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어쩌다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지만, 늘상 언성을 높이며 다투시는 부모님 때문에 동생과 나는 자리를 피하는 순간이 많았다. 잔뜩 핏대를 올려 아빠를 비난하는 엄마와 집안이 떠나갈듯 고함을 지르던 아빠. 동생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런 동생을 애써 달래며 함께 작은 방으로 피신했다. 우리 남매의 유일한 방공호였던 공간으로.
그리고 어깨를 맞댄 채 비디오를 봤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웅크린 고양이들처럼.

거실 귀퉁이에 매달린 벽시계가 무겁게 울리고, 고막을 찌를 듯 날카롭게 울리던 소음이 간신히 잦아들어 낮은 속삭임으로 이어질 때 동생은 안도하듯 눈을 감았다.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엄마가 잠든 동생을 침대에 눕히고, 꺼질듯한 한숨을 남긴 채 부엌으로 갈 때까지 나는 멍하니 화면만을 바라봤다. 나는 온몸으로 가시나무를 끌어안은 한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던 눈망울엔, 커다란 이슬처럼 부풀어오른 슬픔이 맺혔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서늘한 정적 속에서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동생의 숨소리, 그 평온한 숨결을 호흡하듯 화면 속 여자는 모든 것을 비워낸 얼굴로 눈을 감는다. 침묵의 그늘이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을, 그와 공유했던 세월을 떠올리며 기도하듯 맞잡은 두 손.

지상에 홀로 남은 그녀의 삶은 한 작가의 손끝에서 영원으로 거듭났으며,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로 남았다. 슬픈 꿈에서 막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의 멍한 감각. 그 아련한 여운을 고스란히 간직한 안데르센. 나는 어릴 때부터 안데르센을 비롯한 북유럽 동화 특유의 느낌이 좋았다. 마치 전쟁을 치르듯 살벌한 눈빛으로 대치하던 부모님, 그들을 피해 은밀한 방공호로 몸을 숨겼던 어린 남매. 오프닝 곡과 대사까지 달달 외울 정도로 끊임없이 재생했던 비디오, 이야기에 몰입하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막연한 공포와 슬픔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유년기를 어루만지듯, 장막처럼 떠올랐던 오로라. 그 신비스런 빛깔이 나는 좋았다. 손등으로 떨어졌던 눈물처럼, 영롱한 빛깔이.

성인이 된 지금, 이제 와 다시 그 이야기를 읽을 때면 그때 느꼈던 감각들이 어릴 적보다 훨씬 선명하게 다가온다. 뚜렷한 형상조차 갖추지 못했던 슬픔이 제각각의 이름으로 말을 건네는 느낌.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를 부여받은 슬픔, 그 얼굴들을 확인하듯 나는 책장을 펼친다. 허공 속 먼지로 흩어진 그날의 소음들과 엄마의 붉은 눈시울을 떠올리며.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아빠의 목소리를.

슬픔의 마지막 이름을 이제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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