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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세트 (무선) - 전10권 ㅣ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시험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나에게는 긴긴 수험생활을 끝낼 버킷 리스트가 생겼다. 합격 이후엔 무얼 할지, 어디를 갈지, 방향도 없이 정해 놓은 그 리스트의 1번은 바로 '태백산맥 읽기' 였다. 고등학교 시절 부터 대학에 이르기 까지 이과계열을 전공한 내게 수험 국사는, 특히 한국 근현대사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그저 당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났었다는 것. 그리고 그 주역들이 아직 생생히 현실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 태백산맥은 그 요동치는 현대사의 중심에 선 소설이다. 임용 6개월이 지나는 지금, 아침 출근길, 초과근무하며 짬짬히 읽은 이 책이 어느새 10권을 향해 왔다.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순사건부터 시작된다. 전라도 벌교를 중심을 펼쳐지는 소설은 당대의 여러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강직하고 뼈대있는 양반댁에서 자라 성장한 김범우, 가난하지만 똑똑해 일찍부터 사회주의에 물든 염상진, 형인 염상진에게 눌려 거리의 주먹패로 살아가는 염상구, 숯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후에 빨치산 활동으로 성장하는 하대치 등등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순한 소설의 캐릭터를 뛰어넘는다. 범상치 않은 이들의 공통점은 이 시대가 낳을 수 있는 '그럴듯 한 캐릭터'라는 점이다.
여순사건에 뒤이어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들, 빨치산들의 활동과 남한 단독 총선거, 이승만과 자유당의 집권, 민족의 가슴을 후벼놓은 6.25, 방위군 사건과 양민학살, 미군의 참전과 휴전과정 등등 열권의 태백산맥은 해방이후 한국의 굴곡을 단면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6.25에 이르러 좌익과 우익 중 어떠한 가치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당대 지식인의 고뇌와, 결국은 사회주의를 택할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모습에서 이른바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민족'을 최우선 가치에 놓고 그것이 진정한 독립의 선행조건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던 김범우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태백산맥이 가지는 또다른 가치 중 하나는 민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데에 있다. 빨치산 활동을 벌이다 죽임을 당한 남편을 대신해 입산한 외서댁이라든지, 마름의 횡포에 시달리는 여러 소작인들의 삶,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고 의료행위에만 힘쓰던 벌교의 유일한 의원 전원장 등등 시대가 가질 수 있는 민중의 모습이 소설 전체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이들 민중이 시대의 굴곡을 맞아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어떤 파도가 이들을 휩쓸고 지나갔는 지를 분명히 볼 수 있다. 6.25전쟁 당시 군대가 인공기를 들고 진군하면 인민공화국 만세를, 태극기를 앞에 내걸고 진군하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대던 민중들의 모습이 그 단적인 예다. 빨치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결성된 보도연맹과 이들을 끝내 총살시켜 버렸던 정권 또한 가슴에 사무치긴 마찬가지다.
태백산맥, 그 한의 끝줄기는 어디일까. 몇몇대를 걸쳐 우리 혈관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그 한의 정서 일 것이다. 해방이후 민중의 삶, 지독한 가난, 총과 총을 맞댈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의 한이 모여 아마 지금의 우리 민족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닐까. 태백산맥을 단순히 소설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아마 이 소설 너머에 현실이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항상 뒤따라 온다. 태백산맥을 잉태한 세월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