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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갇힌 소년 ㅣ 에프 영 어덜트 컬렉션
로이스 로리 지음, 최지현 옮김 / F(에프)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읽은, 눈을 떼고 싶지 않을 만큼 자잘한 일상이 주는 잔잔함과 곧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요소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는 『침묵에 갇힌 소년』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온다.
증손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캐티는, 유년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의사인 아빠를 둔 캐티는 의사를 꿈꾸는 평범한 소녀이다. 캐티는 아빠와 함께 동생을 임신 중인 엄마를 도울 가정도우미 페리를 데리러 가는 길에 페리의 동생 제이콥과 처음 만나게 된다. 떠나는 페리를 향해 수줍은 듯 손을 흔드는 제이콥, 캐티의 시선을 피해 얼른 창 뒤에 숨어버린 제이콥이 내내 머릿속에 남는다.
"저 아이가 내 가방을 들 거예요."
아빠가 그렇게 말하자, 그 남자가 제이콥에게 가방을 건넸다.
나는 어떤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정신지체아야."
그는 옆에 있는 남자를 팔꿈치로 치며 제이콥을 가리켰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뜻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이콥이 듣지 않았기를 바랐다. 39쪽
제이콥은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소년이다. 말이 없고 표현이 서툴고, 항상 모자 속에 모습을 감추는 소년으로, 그 나이 소년 중에 입으로 소리 흉내내기를 가장 잘 한다고 캐티는 생각한다.
캐티의 집과 이웃집 비숍씨네 집 그리고 마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침묵에 갇힌 소년』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소재로 잔잔하게 전해진다. 작가 로이스 로리는, 사건들과 마주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최소한으로 표현하는 문체로, 당황스럽고 놀라운 그리고 흥분의 소리를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침묵에 갇힌 소년』은 단 한문장에서도 흥분의 소리를 내지 않으며, 사건의 원인과 결과까지도 속시원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독자가 느끼는 만큼이 진실이라는, 독자가 짐작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아빠, 제이콥은 정신지체예요? 그게 뭐예요? 머리에 이상이 있다는 뜻인가요?
내가 묻자 아빠는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제이콥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정신지체란 말은 지능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래, 제이콥이 좀 다르기는 하지. 하지만 제이콥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다가가는 방법도, 그 옆에서 안전하게 있는 방법도 다 알아. 그러려면 지능이 필요하거든.그런 거야, 캐티. 저기 있구나."
돌아보니 커다란 돌이 돌아가며 곡식을 갈고 있는 것을 그늘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이콥이 보였다. 46쪽
캐티의 아빠는 마을에서 매우 유능한 의사이며, 환자에게 매우 긍정적인 반응으로 진료를 본다. 또한 의사를 꿈꾸는 캐티에게 현장을 직접 보여주고, 꿈을 꾸는 딸에게 적극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다. 캐티 또한 아빠의 영향과 긍정적인 시선으로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제이콥을 바라보며, 그가 가진 재능을 아주 귀하게 여기는 심성이 참 맑은 소녀이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미소 한 번 짓지 않는 제이콥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다가서는 캐티의 모습은 어른인 나에게도 약자이기에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묵직한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제이콥은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표현하지 않는다. 누구와도 교감할 수 없으며,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제이콥은 누가 보아도 약자이고 침묵으로 일관하기에 떠넘기고 함부로 다루기에 제격인 인물이다. 그를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 어른들의 힘에 제이콥은 아무런 반항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이끌림을 당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놓인 문제들이 제이콥에게 그대로 일어나고 있음에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보다 약자의 세상을 인정하는 어른들의 자세가 시급하지 않을까 싶다.

『침묵에 갇힌 소년』은, 제이콥과 함께 한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캐티의 회고록과 같은 이야기이다. 가정도우미 페리의 동생 제이콥, 모두들 정신지체아라고 부르는 그를 '친구'로 기억하는 캐티, 그들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옆집 비숍씨의 아들 폴과 페리의 언니 넬, 그들이 서로 얽힌 관계 속에서 제이콥은 또 다른 낙인으로 세상과 싸워야 한다. 그 싸움은 아무런 기록도 없이 사라지고, 캐티는 할머니가 되어 증손자들과 함께 한다.

『침묵에 갇힌 소년』은 그 동안 읽었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소재와 분위기를 풍긴다. 캐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상이 잔잔함과 즐거움이었다면, 도시로 가고자 하는 꿈을 꾸는 페리의 언니 넬에게서는 불안함과 아슬아슬함이 풍겨오고, 말없이 동물들과 교감하는 제이콥을 만날 땐 피식 웃음이 나다가도 안타까움에 답답함이 베어나온다.
『침묵에 갇힌 소년』은 캐티가 회상하는 제이콥과의 일상을 잔잔하게 담아내는 이야기로, 어른들의 이기심과 미안함으로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도 덮을 수 없게 한, 오랜만에 만난 '사색'이란 말이 떠오르게 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