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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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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키친>, <만월-키친2>, <달빛그림자>

세 편의 단편이 모인 단행본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첫 단행본.

 

 

 

<키친>과 <만월>에서의 '죽음' 그리고 '선택'의 이야기가 좋았다.


'선택'이라는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 더 나은 것, 더 나은 상황, 더 좋아할 만한 상황을 가져오기 위한 행위인데 사람에게는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다.

사실 늘 선택하며 사는 것 같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보장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보면 비관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비관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다.

현실세계의 물리적인 법칙 중 하나라고 본다.

 

참 여운이 길게 남는 소설이다.

극복하는 과정에 있는 주인공들, 역자가 말한대로 '상처 깁기'를 하고 있지만

그건 줄거리상으로 나타난 표면적인 양상일 뿐이다.

성장이라고 보기엔 너무 진중하고 무거운 면이 없잖아 있다.

'죽음'과 '선택'. <키친>의 주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죽음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나쁜 상황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 나쁜 상황 = 고독함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주인공의 가족들의 죽음에, 그리고 그 아파하는 과정에서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리고 그보다 나쁜 상황에 있다고 여겨질 때,

그때 고독하고 냉혹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스러움과 같은 감정을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의지할 바가 사라지는 고통이다.

하나의 기둥이 무너지는 순간,

나 하나만이 고독하게 남아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순간.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맞이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래도 이 상황이 더 나았을 거야.'

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다른 것보다는 이게 나았을 것이라며.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고,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습게도 '선택'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 '선택'이 불러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그것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행본 첫 단편 <키친>의 주인공 미카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1 그녀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제멋대로 배우는 것은 좋지만 그 행복의 영역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세뇌되어 있다. 아마 그들의 자상한 부모들로부터. 그리고 진정한 기쁨이 뭔지를 모른다. 어느 쪽이 좋은지, 인간은 선택할 수 없다. 각자는 각자의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져 있다. 자신이 실은 혼자라는 사실을 가능한 한 느끼지 않을 수 있어야 행복한 인생이다.

 

2 세계는 딱히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일에는 대범하게, 되는 대로 명랑하게 지내는 편이 좋다고. 그래서 여자가 되었고, 지금에 이르렀어.

 그 무렵 나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즐거움이란 그런것인가' 하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토악질이라도 날 것처럼 잘 안다. 왜 사람은 이렇듯 선택할 수 없는 것일까. 버러지처럼 짓뭉개져도, 밥을 지어먹고 잠든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간다. 그런데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3 사람들은 모두, 여러 가지 길이 있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택하는 순간을 꿈꾼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지금 알았다. 말로서 분명하게 알았다. 길은 항상 정해져있다. 그러나 결코 운명론적인 의미는 아니다. 나날의 호흡이, 눈길이,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자연히 정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본문처럼 운명론 같이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 '선택'의 가면을 쓰고 닥쳐오는 삶은 결코 선택이라 할 수 없는 일방적인 시간의 흐름일 뿐이다. 살아낼 수밖에 없는 그런 하루.

 

사랑하는 사람이 죽든, 깊게 우울하지만 누군가를 만나 하소연할 수 없는 그런 고독함의 시간, 내가 원하던 것이 오지 않았을 때 꺼트려지는 기대감과 실망, 그 순간에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다. 앞서 말했듯 그 '죽음'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무력함, 무능력함'을 깨닫게 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 '죽음'은 자신의 예상대로의 삶,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삶의 흐름에 대한 배반이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 속의 삶의 '죽음'과도 같다. 결국 원치않은 상황이라는 뜻인데, '죽음'을 다시 돌이키거나, 살려낼 수 없듯이 자신의 것을 한 가닥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살아내야'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결국 자신이 '생각하던 그 삶'은 더 이상 꿈꿀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생각'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나쁜 상황(죽음)과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전보다 결핍을 지닌 채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떠안은 미카게와 유이치는 같은 결핍을 계기로 서로를 채워간다.

 

<달빛그림자>에서 사츠키와 히라기는 서로의 연인을 하나의 사건으로 잃어버린다.  사츠키는 연인 히토시, 히토시의 동생인 히라기는 연인 유미코를 잃는다. 히라기는 형인 히토시와 연인 유미코를 모두 잃은 셈이다. 그리고 둘의 '결핍'은 각자의 '연인의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불러온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들, 그것은 자신의 삶의 한 구석, 일부를 포기하고 죽여나가는 과정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살아나가기 위해 결핍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세 단편 모두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은 사실 죽음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는 고통이다. 버팀목 하나가 사라지는 과정, 자신의 전부가 사라지는 과정을 겪어나가는 류의 한 방법일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겪지 않고도 이들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사람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이상을 깎는 과정'이 주인공들의 고통과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나의 고통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유없이 고통스럽고 남몰래 눈물훔칠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면 '선택' 할 수 없이 살아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굴레임을, 나만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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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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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는 작가들의 이야기다. 

 

등단 20년차 작가 정수현이 아내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 유지연의 자살을 막지 못하고 아내가 떠난 이후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여자 서영재를 만나는 이야기. 그에게는 폭력을 가한 아버지와 형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기억이 있다. 아내의 죽음까지도 자신의 책임으로 느끼는 불운한 작가다. 유쾌한 소설은 아니다.

 

 

저자 김려령 작가가 원하는 모습은 서영재였던 것 같다. 작품 내내 서영재와 도하(성이 기억 안남-_-)의 활달한 입담이 유쾌하다. 그렇지만 유머코드가 달라 그런지 웃기지는 않았다-_ㅠ.. 공감 역시..안습..

 

솔직히 소설을 보면 어딘가 자신과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보게 된다. 소설에는 여러 인물이 나오지만, 사람들이 드라마를 볼 때 자신과 같은 경우의 인물 때문에 감정이입을 하고 보는 것처럼(그래서 드라마 하나에는 다양한 인물이 포진해 있다.) 소설에서도 한 인물에게 집중을 하며 감정이입을 해서 읽게 된다. 그래서 문학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인물도 다양하고, 독자도 다양하니까.

 

그런데 이 소설의 문제는 그만큼 다양한 인물을 두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아니, 다양하지만 작가가 모든 인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것은 몇 인물들은 소외된다는 뜻이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면,

 

화자인 정수현은 형에게 맞고 자랐다. 그 형인 정수형은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막노동꾼으로서, 공사장의 십장들에게 자신의 아내, 즉 정수현의 어머니의 몸을 팔게 하면서 자신이 일자리를 이어간다. 이렇게 아내가 할 수 있는 극한의 내조에 의탁하면서 아내를 폭행한다. 이 폭력은 아내의 몸이 결과적으로는(원인이 자신이든 뭐든 간에) 외도를 하기 때문이고, 자신이 아내를 제압할 수 있다고 느끼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그런 폭력이다.

 

이 정수현의 어머니가 십장과 몸을 섞고 있을 때 정수현이 이 장면을 목격한다. 어린 수현은 결국 평생토록 어머니를 믿지 못한다. (자신의 끝날에 용서한다.) 결국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정수현은 등단하고, 결혼 후에도 어머니에게 돈을 뜯긴다. 참다 못한 정수현은 어머니의 돈을 가져가는 듯한 늙은 남자를 찾아가지만, 그것은 자신의 형이었다. 형이 어머니를 폭행하며 정수현에게서 돈을 뜯어내도록 한 것이다. 결국 수현은 폭력을 써서 형의 목숨을 끊는다.

 

끝내 아버지를 죽인 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형 역시 공범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사실 주인공(정수현)의 서술 없이는 ("형은 공범이었던 것이다.") 형의 행동만으로는 공범이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굉장히 어색함을 느꼈다. 그 서술 없이는 정수형이 공범이라고 설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딘가 편집되거나 잘린 부분이 많다는 느낌이 많이 드는 소설이었다. 뭉텅뭉텅 잘린 느낌이 많이 들었다. 하나의 사건이 어렴풋이 끝났는데, 그 결론이 나중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질 때에야 아, 그런 거였어? 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물론 그것을 의도한 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자주 들자 내가 눈치가 없는 건가, 싶었다.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정수현의 아내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주안점을 두고 집중했던 인물은 정수현의 아내 유지연이었다. 등장하는 비중은 가장 적지만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도 하다. 아내가 주인공 정수현에게 미친 영향이 꽤 크기 때문이다. 소설의 가장 큰 줄기는 유지연과 서영재 사이의 남자 정수현이라는 삼각관계다. 유지연은 사실 말해 왕따다. 누구를 만나도 삐딱하게 굴고, 고집도 너무 세서 어떤 사람도 경우도 곱게 받아들이지 않는, 스스로 따 시키는 류의 사람이다.

 

사실 누구나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 유지연은 다른 사람과 전혀 타협하지를 않으면서, 피해의식에만 잔뜩 절어있는 답답하기도 한 인물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에 어리광을 부리며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이려고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매우 극단적인 인물이다. 문제는 정수현이 자살하고 떠난 아내 유지연의 진짜 모습을 찾으려 노력하고 또 추적해 예전 지인들을 찾아내지만, 결국 아내에 대한 악평만 잔뜩 듣고서 자신만의 믿음만을 가진다는 데 있다.(소설 중, "그렇게 나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내 유지연은 정수현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러나 정수현은 끝내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고립시켰고, 손을 내밀지 않았다. 유지연만큼이나 정수현도 아내에 대한 의심이 가득하고, 단정적인 남편인 셈이다. 조금 보듬어주고 감싸줄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했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타협하지 않는 유지연의 모습 때문일 수도 있다.(정수현의 어머니가 자꾸 돈을 뜯어가자 1년 정도만 참고 그 이상은 절대 돈을 내주지 않고 타협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1년 정도면 어느 정도 타협했다고 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타협이었고 일방적인 소통의 단절이었다.)

 

유지연 역시 남편을 의심하고, 집착하면서, 믿음을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일말의 믿음,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유지연에게, 정수현은 자신을 덜 미워하는 것 같았다는 착각 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하다. 위의 인용구처럼 정수현은 유지연에 대한 지인들의 비난만 듣고도 그 비난을 백퍼센트 믿지는 않았으니까.) 유지연은 늘 차의 블랙박스를 확인했고, 말로 하지 않고 짐작으로만 정수현의 행동을 단정지었기에 역시 이 부부간의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결국 이 부부의 사연은 이렇다. 남편은 어머니에 얽힌 사연 때문에 유지연을 믿지 못한다고 치자. 그럼 유지연은? 유지연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듣는 이야기는 모두 어렵게 살았다는 이야기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지연의 현재 그 딱딱하고 굳은 성품이 설명되지는 않는다.늘 미움만 받고 그 안에서 피해의식이 자랐으며, 그 미움받는 이유가 자신이 잘나고 독특하다는 생각에서라고만 설명된다. 유지연의 오만한 태도는 자신의 민감한 감각에 대한 반항일 뿐이라고.

 

(그런 비슷한 문장으로 쓰였다. 너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에 짐짓 의식하지 않는 척 하는 방어적 태도를 설명하는 문장 말이다. 그런데, 유지연의 이런 부분에 대한 공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이토록 민감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도 유지연 한 명 뿐이지만, 이 유지연 외에는 모두 타인의 시선을 극단적으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유지연이 왕따인 것은 분명하나 저자까지도 이 인물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불쾌할 뿐이다.)

 

유지연의 사연이나 사정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끝난다는 점에서 유지연은 작품 전체에 걸쳐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유지연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시작된(물론 아내가 자살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깔끔하게 보내고자 하는 추모의 의도인 관심이지만.) '유지연 찾기'는 그저 맛만 보고 끝나버린다.(정말 지루하다. 결국 아내에 대해 어떤 타협점도 주지 않은 채로, 아내의 편을 한 번도 들어주지 않은 채로 작품은 끝나버린 것이다.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 슬픈 현실이 소설이라는 데 쓰였다. 이는 아내 유지연이라는 인물에 감정이입을 한 내게는 굉장한 모멸감을 주었다. 워낙 지독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작가마저도 버린 인물이라는 느낌은 단지 나만의 착각일까? 누구도 받아들여줄 수 없는 그런 인물로밖에 그려질 수 없는 것일까?)

 

사실 화자가 그 남편인 정수현으로서 당연히 유지연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그릴 수는 있다. 왜냐면 유지연은 출판사 사장이자 자신의 친오빠(어렸을 때 헤어진)인 황사장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자신이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갑'의 위치를 이용해서 정수현이 황사장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자신과 결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보면 정수현은 유지연에게 이미 질려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외면하기만 하기엔 유지연이란 인물이 정수현의 한 여자였다는 면에서 너무 비중이 컸다. 결국에 정수현의 죄책감을 해소하는 과정을 그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자 희생양이었을 뿐일까? 어떻게 보면 가장 잔인한 인물은 정수현인데 말이다. (그러나 정수현의 살인은 작품 전체에서 완벽하게 은폐되고 옹호되고 있다. 그 심판을 자신 스스로가 집행한다.)

 

유지연도 못됐지만 작품 전체에 걸쳐 이 유지연이라는 인물에 대한 변호 및 편들어주는 사람은 그가 자살하도록 방관한 남편 정수현의 얄팍한 믿음 하나 뿐이었다. 이렇게 편파적일 수 있을까?

 

어쨌든 인물들이 모두 독특하다 보니 정상적인 사람은 없어 보인다. 윤도하와 서영재의 유쾌한 입담은 계속되지만, 읽는 내가 까칠해서일까? 유머코드도 안 맞고.. 그래서 그 모든 대화의 분위기는 좋아보이지만, 오글거린다는 느낌이랄까. 어떻게든 얌전한 사람이 쾌활한 사람의 연기를 하려고는 하는데 잘 안되는 것처럼 어색했기 때문이다.

 

유지연 못지 않게 작품 전반을 차지하는 여자가 바로 서영재다. 서영재와 정수현의 성애 묘사는 좋은 편이다. 서영재와 함께 마주보고 앉아 정수현은 그녀의 셔츠 밑 상상을 하고, 서영재를 책상에 앉히고 무릎 사이로 파고들어가는 정수현의 모습은 잘 그려졌다. 사실 정수현이 서영재에게 주는 애정과 관심, 그리고 성적인 관심까지도 나는 작가 자신이 다른 남자에게 받고 싶어하는 관심을 상상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였다. 여자라면 호감있는 남성에게서 성적인 매력을 느끼도록 하고 싶지 않은가? 그런 관점에서는 이 남자의 서영재에 대한 애착이 보인다.

 

사실 서영재와 정수현의 사랑은 성적으로는 잘 묘사되었지만, 남성 화자라서일까? 내가 볼 때 정수현은 그렇게 전형적인 남성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훨씬 민감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인 면에서는 사랑 묘사가 서툴렀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여야 감정이입을 해서 함께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읽는 내가 내 방식만 생각해서일까? 그렇게 절절한 사랑의 모습은 마지막 신파적인 장면(사실 신파적이라는 것도, 나만 감정이입이 끝에만 집중돼서였을지도 모른다. 난 그 직전까지도 그렇게 서로에게 대한 절절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 '그 직전'은 스포이므로 밝힐 수 없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정수현이 잘 생겼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일단 매력을 거기서 갖고 들어가니 다른 매력을 찾기는 어려운 남자다. 어느 여자가 같이 살았던 아내에 대한 냉담하기만 한 남성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면에서 정수현은 아내에 질린 대한민국 보통 남자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예민하고 여성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데 일관성이 없다.

 

또 서영재와 정수현은 자주 만나 무언가를 먹는다. 서영재는 정수현이 보기에 먹방을 찍듯이 맛있게 먹는 편이다. 50페이지 안에서 그들은 치맥에 감자튀김, 토스트, 막창, 스시까지 매우 다양한 음식을 거듭해 먹고 있다. 그만큼 많이 만나는데, 서영재가 보고 싶어 자주 만나는 것 같긴 하지만, 억지로 자꾸 사랑을 시키고 싶어하는 작가의 모습이 엿보이는 듯해.. 결국 내가 감정이입을 못해 그냥 연애의 진척이라기보다 작업의 진척이자 먹방으로 보였다.

 

이는 요즘 취미의 한 종류인 푸드포르노를 노린 것 같기도 하다. 먹는 것만 찾아다니거나 요리, 미식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또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싫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무니까. 어쨌거나 서영재는 보통 여자들처럼 먹는 것을 선택하는 데 망설이지 않고 정수현은 그런 서영재의 모습을 좋아한다.

 

결국 이 소설은 남자들이 그리는 로망을 적지 않았나 싶다. 애초부터 여성 독자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먹는 것을 선택하는데 망설임이 없는 여자라면, 보통 여자가 아닌 셈이고, 여자들이 감정이입할 존재가 아니며 남성들이 데이트하기에 '편리'한 존재인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다. 남성들은 아내를 싫어하고, 다른 남자도 넘보는(윤도하도 서영재를 사랑한다.) 매력적인 여자. 게다가 여자는 먹는 걸 선택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꽁함도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쿨하게 남자를 받아주고 있는 여자. 또 서영재만 그러한가? 정수현은 잘생긴 덕에 많은 여자들이 다가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여자들 중에~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다 여자를 잘 알고 있다.)이런 모습은 남성이 동경하면서 되고 싶어하는 진정한 카사노바의 모습 아닌가?

 

그런데 다른 리뷰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남자들도 이 소설에 감정이입을 잘 한 편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김려령 작가는 자신의 유별난 모습을 서영재 속에 집어넣어 뽐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을 모르니까 실제는 알 수 없지만, 여자들에게는 사랑받기 힘들고(챙기기 좋아하는 여자들 습성에 이런 여자를 누가 챙겨주고 싶어할까) 남자들만 잘 홀려낼 그런 여자. 아니면 자신을 위한 소설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아했던 남성 작가를 화자로 내세워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짜릿함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도 수수께끼는 풀린다. 유지연은 좋아하는 남자의 아내로 적대감을 그릴 수밖에 없고, 서영재는 끝까지 사랑받는 여자로 그려진다. 그것도 윤도하에게도 끝까지 사랑받는다. 어쩌면 서영재만을 위한 소설이 된다.

 

<너를 봤어>의 가장 큰 여운이 있다. 살인전문작가(이 정체를 끝에 와서야 밝히지만ㅋ) 서영재와 섹스 전문작가 윤도하는 작가면서도 편집자인 정수현의 기획에 따라 같이 글을 쓴다. 결국 서영재가 정수현이 마구 죽이는 장면들을 그린 후 윤도하가 성애 장면에 끼워넣어 썼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소설의 완성된 제목이 <너를 봤어>다. 왠지 마구 죽인 후에 재미를 위한 성애 장면을 그려낸 저자의 집필 과정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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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모든 것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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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모든 것>을 줄거리로 보려고 한다면 일단 기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순간순간의 공감과 비유의 문장 속에서 외로움을 달래라고 하고 싶다.

 

가장 좋았던 문장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혼자인 사람이 나뿐이라는 것이다... 랑 비슷한 문장ㅋ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부러울 것 없이 단란한 가정에서 다단계에서 사기로 수배자가 된 엄마와 새로운 가정을 차린 아빠로 부모님이 갈라선 후 조부모님 집에서 눈칫밥 먹은 세미는 원래 원치않는 아이였음을 알고 낙태당할 뻔했던 자신의 출생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뚜렛 장애라는, 틱 장애의 발전된 형태의 질병을 앓는 준모.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기억하는 이지혜.

 

이 셋의 우정이 얽히면서도 결국에는 독립적인 자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배경은 90년대로 90년대를 향수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추천한다. 나는 삐삐 구경할 새 없이 핸드폰을 들고 다녔기 때문에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새로웠다.

 

사실 독자로서 이 셋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동정심을 가지고 셋의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결국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참 아팠다. 미국으로 도망간 세미의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으면 했고, 아빠 역시 예전의 단란한 가정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조금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 세미가 좋아했던 남자에게서 단지 성적인 교감이 아닌 사랑을 받았으면, 했다.


왜냐면, 세미가 생각하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이 친구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다면 독자의 자존감에도 행복감이 조금은 들지 않을까. 세미의 생각에 공감하는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혼자라도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 있을 텐데, 작가가 미처 그 부분은 그려내지 못한 것 같다. 가장 주된 주제는 아무래도 혼자라도 괜찮아,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면. 이니까. 내 편이 없지만 나 스스로 내 편이 되자는 생각은 좋지만 그래도 주인공이 사랑받는 능력이 있었으면 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주인공은 성장하면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심을 줄여나가고 있지만 그건 어리광을 줄여나가는 것과는 다르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한 사람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까.

 

세미를 좋아하지만 뚜렛 장애 때문에 괴로워하는 준모가 좀 더 행복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면 했다. 물론 행복해졌지만 보다 더 자세히 그려졌으면 했다.

 

지혜가 학원강사를 하면서, 평생 후회로 남는 셋의 완벽범죄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결국 셋은 외로움을 완화시켜주는 어떤 '내 편'도 얻지 못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요즘의 리얼리즘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삶과 별다를 것 없는 소설. 그렇지만 글에서 나타난 이상 좀 더 욕구를 풀어헤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좀 덜 외롭고 조금 더 화려하고 여유로운 겉으로의 문제가 아닌 내면의 문제가 조금이라도 해결되거나 시원하게 해결되는 소설 말이다. 아니면 제 3의 방법으로라도 보다 박진감있는 플롯으로.

 

성장소설에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지만, 그 지나간 광경을 그려낸 소설이지만 뭐랄까, 나는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저 다른 사람 삶도 별 것 없고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교훈은 순간마다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어떤 소설이고 어떤 장면이든 그릴 수 있는 장면이라면 모두 그려내야 하는 것이 소설가로서의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도 하나의 붓질이라고 생각하면, 그래, 그렇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일단 화자로서의 세미 분량이 압도적이고, 준모와 지혜는 극히 일부로서만 말한다는 점이다. 내가 아쉬운 것은 이 셋이 좀 더 숨기지 않고 서로 기댈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인물들은 사랑스럽다기보다는 불쌍하다.

 

그런데 배경이 강남이라는 점에서, '어떤' 곳에 살든 어차피 '힘들'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인가 하게 된다. 결국 세상은 공평하다고 말하려는 경향이 강한 데도 불구하고 찜찜한 것은, 그래서 강남에 살고 있지 않은 독자들이 보기에 '부러울' 만한 공간임에도 결국에는 모두가 부에 대한 '감사'를 조금씩 갖고 있고, '그래도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이지만 그건 조금 다른 문제다. 배경이 강남인만큼, 강남에 살아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라는 이야기지만 그저 배부른 소리로 들리기 쉽다. 강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살았겠어, 하는 느낌도 못지 않게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강남'에 대한 감사가 조금도 없었다면 차라리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이 소설은 이 인물 셋의 갈등이라기보다는 막판에 가서는 세미의 가정 분란이라는 나름 일일드라마 같은 막장 드라마로서의 전개를 갖춘다는 점인다. 그렇게 성장한다는 이야기로 에필로그를 마무리했지만, 문장들은 좋았지만 문장들에 비해 이야기가 너무 허술하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전에 <달콤한 나의 도시>로 주목을 받는 바 있다. 나는 그 작품을 보지 않았다. 또 <삼풍백화점>이라는 소설도 호평을 받았다는데, 결국에 삼풍백화점 이야기를 넣고 있고, 90년대 배경의 핵심들을 조금씩 들추어내는 것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참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흘러가는대로 쓰여지는대로 썼다는 느낌이 강하다. 뽑아냈다고 해야 할까, 털어냈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살아왔다'고 고백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자신의 삶에서만 소재를 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일단 외로운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모두가 외로웠다로 끝내는 것은 좋지만 이야기의 균형이 다소 무너져 있다는 생각이다.

 

결국에 '강남'이라는 세미의 가정이 무너지는 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허무함이랄까. 안그래도 세미는 부모님의 사랑이 단절되고 자기 편 하나 없는 채로, 가정은 시끄러운 채로, 그저 자신의 가슴만 조물딱거리는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정확히 시대를 그려냈지만 그 어떤 것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저 하나의 인간이 외로워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살아가는 게 다 보잘 것 없고 불쌍하다는 의미만 남는다는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이 셋에게는 그 어떤 삶의 즐거움도 발견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셋 다 과거에 얽매인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씁쓸한 삶을 맛봐야 한다는 점이 참 고달팠다. 그래도 뭔가 행복감이 느껴지는 게 있어야 할 텐데, 그냥 한 권 읽었다, 하고 끝나는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이런 사람들도 있다는 또 하나의 이야기. 또 하나의 입장.

 

90년대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떠오르긴 하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90년대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건 참 진부하다. 사실 90년대를 함께 살아온 독자로서는 90년대를 이렇게 초라하게 그릴 수밖에 없었을까 싶기도 하다. 90년대를 그렸다는 면에서 다른 소설들과 차이점이 보이지 않고 그냥 정이현 작가가 썼다는 점에 의의를 둔 것 같다.

 

독자로서는 단지, 주인공, 그들이 어딘가에서는 또다른 행복을 만났으면 한다. 사족을 붙이자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겠지만, 평탄해보이는 나도 못지않은 무게만큼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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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A144716285 신청합니다. 김영하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었지만 작가와의 만남은 늘 기회가 안됐네요. 그런데 26일 출고라니..-_ㅠ.. 다른 책 들고 가야하는 건가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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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 김관중 사진집
김관중 지음 / 피알에이드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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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김관중 사진집. 잊혀져 있던 독도 일하고 있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일본 사진가가 우리나라 민족운동가들의 흔적을 추적해 찍고 있다는 사례에 충격을 받고 최대한 왜곡을 줄여 독도를 찍기시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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