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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마르크스 평전’ - 쿼바디스(Quo Vadis) 맑시즘!
자크 아탈리
잉여가치의 생산을 이루는 조건은 자기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한 것을 전제조건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
잉여가치의 생산은 처음부터 잉여가치를 빼앗기고 빼앗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노동력의 매매를 통해서 성립한다. ……
따라서 그 관계는 처음부터 조화로운 성립을 배제하고 있다.
여기 한 명의 학생이 어둠을 틈타 반지하방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옆구리에 서류철을 낀 또 한 명의 학생이 그 뒤를 따른다. 다섯 명의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그들은 각자의 가방에서 종이 뭉텅이를 꺼내든다. 그들이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자본’. 그들은 격렬하게 토론하며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 논쟁한다.
먼 7,80년대의 얘기가 아니라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대학가의 풍경이다. 맑스의 저작들은 몰래 숨어서 보는 금지된 책이었다.
당시엔 ‘자본’을 읽기 위해서 수많은 공학도들과 인문학도들이 서양중세사나 철학. 미시, 거시경제학원론을 허리춤에 꿰어 차고 다니는 풍경도 그다지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자본’이 세상 밖으로 나온 지금 ‘자본’을 읽기 위해 ‘헤겔’과 ‘포이어바흐’를 읽는 대학생이 몇이나 될까?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은 우리와 가까워 졌으나, 또한 가까워지지 못한 맑스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덥수룩한 수염의 위대하고 강인한 철인의 모습만을 묘사한 일대기가 아니라 혼외정사로 자식을 두고(아직 이 부분에 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경제적으론 무능하며, 독선적이기도 한 맑스의 모습들도 함께 묘사하고 있다.
어느 학자는 맑시즘을 19세기가 만들어 낸 유일한 종교라고 이야기한다.
맑스는 교주치고는 참으로 남루한 삶을 살았다.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은 그런 고단한 교주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르크스 평전’에는 수 세기를 관통하는 사상의 모태였으나 살아서 빛나지 못 했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의 삶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그 재미 이후에는 ‘과연 자본주의는 영원할까?’라는 물음표가 생길 것이다.
자본주의의 미래를 알고 싶으면 먼저 ‘자본’을 읽어 보길 권한다.
그리고 그 전에 ‘자본’의 잉태자인 맑스를 이해하기 위해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어 보길 권한다.
쿼바디스 맑시즘! 쿼바디스 캐피탈리즘!
곁다리. 반지하방을 드나들던 그들이 ‘자본’에 관심을 둔 이유는 아마도 ‘자본’의 경제학적인 측면보다는 ‘사회적 측면’때문 이었으리라. 아직도 전 세계의 무수한 지식인들이 ‘자본’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140년 전 ‘소외’를 이야기 했던 맑스의 통찰에 대해 그 답을 여전히 구하지 못한 까닭이리라.
하지만 그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맑시즘이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맑시즘 자체가 하나의 강령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다시 ‘소외’되고 말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면……우리는 초라하고 제한된 이기적인 기쁨을 향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수백만 명의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나지움을 졸업하며. 칼 맑스.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
덧붙임 하나.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에서보다 더욱 자연인 상태의 맑스가 궁금하신 분은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어 보시길 권함.
덧붙임 둘. 책의 판형이 쪽수에 비해 너무 작아 읽기 불편했다. 768쪽의 두꺼운 책을 A4용지 절반도 안 되는 판형에 제본 한 것은 넌센스였다는 생각. 판형을 좀 키우고 쪽수를 조금이라도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덧붙임 셋. 나는 자크 아탈리의 저서 ‘인간적인 길’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그래서 얼마 전 방한했을 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손석춘 원장과 가진 대담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그 대담에서 자크 아탈리가 한 얘기를 인용 해 본다. (‘민중의 소리’ 대담 기사 중 발췌)
“한 사회의 궁극적 목표는 영리추구가 아니다. 사회의 목표는 시민을 위한 복지의 실현이다. 성장은 하나의 방법이다. 성장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리면, 시민의 복지는 망각된다. 그렇게 되면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윤의 성장만이 된다. <인간적인 길>이라는 책은 어떻게 유토피아를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책이다.”
“오늘날 시장은 스스로의 승리에 도취해 있다. 계속 도취의 양태가 나타나고 있다. 시장은 자연을 파괴한다. 사람을 로봇으로, 복제인간으로, 물질로, 상품으로 차츰 변화시켜가고 있다. 만약에 인간이 이 상황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상품화가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말 무시무시한 위험이다.”
아주 공감이 가는 지적이었다. 자본주의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전망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공감하는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그가 ‘인간적인 길’에서 강조한 ‘핵무기를 통한 (전쟁)억제력’에 대한 질문을 손석춘 원장이 북핵보유선언과 더불어 질문을 하자 자크 아탈리는 전형적인 지식인의 기회주의적 습성을 보인다. 자크 아탈리는 프랑스처럼 핵무기를 정당하게 갖게 되면 문제가 없지만 북핵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북한 정권의 붕괴가 북핵 문제를 해결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며 “북한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통제하면 어렵지 않게 (북한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대답에 손석춘 원장은 이렇게 되물었다.
“아탈리 박사의 저서들을 읽으며 프랑스에서만 살아온 지식인 일반이 지니는 한계를 느꼈는데 오늘 대담을 통해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핵을 가질 정당성이 있는 나라가 따로 있고 없는 나라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나, 북쪽 정권을 붕괴시키는 게 당위라는 박사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논리와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는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대담의 말미에서 손석춘 원장의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에는 끝내 답하지 않고 ‘국제 문제에 미국과 프랑스는 대체로 견해를 같이 한다.’라는 말로 즉답을 피한다.
자크 아탈리의 한계를 여실히 보는 순간이었다. 또 하나의 윤똑똑이를 만난 것이다.
다시 한 번 맑스의 저작들이 왜 오늘날까지 그 힘을 잃지 않고 있는 지 느낄 수 있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칼 맑스 「포이어바흐 관한 테제들」 중 11번째 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