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인간 선언 - 기후위기를 넘는 ‘새로운 우리’의 발명
김한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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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떻게 낙담과 냉소와 체념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어?
어떻게 최종적으로 희망을 택했어?(204쪽)”


우리가 사는 지금은 ‘인류세’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인류가 지구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켜 만들어진 새로운 지질시대를 말한다. 인류가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어마어마한 지리역학적 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6쪽). 폭염, 수몰, 이상기후, 빙하유실 ,산불... 인류세의 기후위기는 더 이상 활자 속의 개념이 아닌 우리의 삶 속에 실재한다. 저자는 이러한 인간중심적 현 세대에 단호히 문제를 제시하며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탈인간(중심주의)”를 제안한다.

저자는 나르시시스트 인류가 초래한 인간중심주의적 가치와 관습으로부터 과감히 탈피하고, 포기와 낙담 대신 책임과 변화를 택하기 위한 힘을 전한다. 그 방식은 직설적이고 유쾌하다. 동시에 묘한 통쾌함까지 선사한다. 돌려 말하는 바 없이, 시원하게 전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호소하는 저자는 날카로운 통찰로 독자의 기후위기 인식 세계를 넓힌다.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다양한 시도들과 <탈인간 선언>의 차이가 있다면, 이 책이 이론이나 사고실험, 지적 유희가 아니라 현실과 호흡하면서, 또 변화를 갈망하면서 얻은 실천적 성찰들의 모음이라는 점이다(16쪽). 일간지에 4주마다 게재되는 짧은 칼럼이라는 조건은 오히려 저자가 시의성 있게 응답하기 위해 온갖 ‘현장’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변을 걸러내 꼭 필요한 말에 집중하도록 강제한 장치가 되었다.

‘환경적 영향에 대한 생각 없음’이 지구에 대한 큰 범죄 행위를 낳는다는 문장이 맴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논한 ‘악의 평범성’처럼 말이다. 생태적 맥락에서 고쳐 쓰인 위 문장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짙게 물든 우리가 쉽게 행하는 반생태적 생활방식과 밀덥하다. 더불어 매우 근면한 인간이었던 전범 아이히만처럼 ‘생태적 악’ 역시 수행하는 자들의 부지런함과 꾸준한 자연 파괴가 동반된다. 너무나도 쉽게 ‘제 몫의 파괴’를 해낸다는 것이다(114쪽).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아진다고 믿는다. 완벽히 ‘탈인간’하기란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훌륭한 환경운동가가 될 자신도 없지만, 나는 또 내일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겠지만. 다만, “냉소와 포기라는 간편한 선택 대신 책임을 택하는 새로운 인간으로의 전환”을 자주 생각하려 한다. ‘환경적 영향에 대한 생각 있음’으로, 반생태적 생활방식에 나태함으로 행동을 더하며 말이다. 인류세에 살고 있는 인간임을 꾸준히 부끄러워하겠다.

더불어 코로나19 때 정책과 개인의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기억한다.
유독 기후위기 대응책에선 구조적 변화와 개인의 실천이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 듯하다. 하나에 주목하면 다른 하나는 소홀히 한다는 택일관계로 보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해법은 오로지 체제 전환뿐이라며 작은 실천을 폄하하고 다른 쪽은 개인의 실천만 강조한다(43쪽). 비생산적이고 무의미한 이분법을 떠나 기후위기 역시 이 둘의 조화와 병행을 통해 강력한 소통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렇게 혼자 물으면서도,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답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희망을 의식하지도, 굳이 찾지도 않았으리라.
단지 너무도 중요하고 긴급해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스스로 희망이 된 것이리라. 이것이 내가 희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남은 건 무엇을 하느냐뿐이다.(204쪽)”


​—


#책속의한줄🔖

(9p.) 탈인간은 먼저 탈인간중심주의의 준말로, 말 그대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그것이 몸부림인 이유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벗어남을 완벽히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12p.)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는 일은 또 다른 중심을 세우는 걸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심은 비워둬도 괜찮다. 굳이 ‘인간중심’의 반대말을 꼽으라면 나는 차라리 ‘인간 매개’라고 하고 싶다. 중심에서 매개가 되는 것, 게다가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는 것.

(13p.) 이렇듯 인간이란 협소한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다른 존재들, 타자이다. 고로,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 타자에게 주목하는 것은 탈인간의 출발점이다. (...) 도구적•실용적인 관점을 떠나 우리에게 여하간의 쓸모가 없더라도, 오롯이 존재 그 자체로서 (타자의) 살아갈 이유를 긍정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라는 윤리적 명령이 각 인간의 쓸모와 무관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19p.) 미셸 푸코의 말처럼 “이제 목표는 우리가 누군지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제의 인간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30p.) 전 국민이 ‘골든타임’이란 용어를 단일 사건과 연결시켜 기억하는 나라, 우리 말고 또 있을까?

(73p.) “마지막 물고기를 먹고 나서야 인간은 깨달을 것이다, 플라스틱을 먹었다는 것을.”

(75p.) 그들은 기성세대를 애써 좋게 봐주려고 노력도 한다. 설마, 그래도 어른들인데 한편에선 진지하게 고민들을 하겠지? 순진한 기대다. 우리는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다!

(77p.) 한 10대 활동가가 내게 물었다, 이 판국에 어떻게 힘을 내냐고. 힘? 솔직히 안 난다. 내 세대와 위 세대를 보면 대개 힘보단 화가 난다. 하지만 부끄러워서 낸다.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우려고 뭐라도 하려고 한다. 이 수치심은 나의 탄소발자국만큼이나 쉽게 지워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91p.) 정말 나와 상관도 없는 연예인의 신변잡기는 그토록 와닿고, 전 지구적 생태위기는 전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그 피부가 문제다! 회복 불가능한 지구 가열을 막아낼 시간이 겨우 10년 남았다고 기후학자들이 경고한 게 벌써 몇 년째인데도 와닿지 않는다고? 그럼 가닿으라!

(106p.) “물 들어오면 노를 잠시 놓으라. 그리고 물길을 읽으라 이 물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열심히 따라가면 나는 무엇에 기여하게 되는가. 다시 돌아오지 못해도 좋은가.”

(111p.) 경쟁과 분열을 연료로 돌아가는 사회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파이가 커져도 대다수가 행복을 느끼며 살기 불가능하다는 걸-

(142p.) 어리석음이란 순우리말로 ‘얼’이 ‘썩은’, 즉 정신이 썩은 상태다. 지능이 낮은 것이 아니다. 지능이 높아도 얼마든지 어리석을 수 있다.

(163p.) 이쯤 되면 인플루언서의 실제 역할은, 흥미는 끌되 심기는 안 건드릴 적당한 콘텐츠를 공급하며 체제 공고화에 일조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한마디로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인플루언서는 인플루언스(영향)을 주는 척 안 주는 사람인 것이다.

(164p.) 넬슨 만델라나 마틴 루서 킹 같은 인물은(한 번도 인플루언서라 불린 적도 없이!) 영향력을 돈과 결부시키지 않고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데 일조했음을 상기하자. 인플루언서라는 말을 쓰거나 들을 때 일론 머스크 대신 간디를 떠올리면 지금 우리가 받는 영향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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