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은유 지음, 이지선 북디자인 / 읻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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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작가 은유의 신간으로, 시 번역가 7인의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산문이다. 시를 읽는 문화가 거의 없는 현 사회에서 시 번역은 애정이 없다면 지속하기 힘들고 잘할수록 투명해지는 노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나누기 위해 애쓰는 이들. 저자는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소수성'과 '자기 돌봄' 그리고 '감탄하는 능력'과 '운동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찾아낸다. 시 번역을 왜 하는지, 시를 왜 읽는지에 대한 질문은 결국 인터뷰이들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AI가 소설을 쓰고 번역가를 대체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외침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상기한다. 더불어 번역은 단순한 활자의 변환이 아닌 문화의 이해, 의도의 이해, 마음의 이해를 동반하는 일이자 사랑과 감탄을 함께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편견을 깨기 위해 문학을 택했다는 안톤 허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오랜 시간 외국에 있으며 그들이 우리나라에 갖는 폭력적인 편견을 경험한 그는 굳이 문학을 통해 다양성을 강조한다. 장르문학, 퀴어문학, 여성문학을 내보냄으로써 한국 사람들도 다양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의도이다. "우리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너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피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거냐? 문학이 최고잖아요. 우리가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아무리 과학 논문을 많이 내고, 삼성이 세계를 지배해도 아직까지 그런 편견을 갖는 걸 보면 다른 영역으로 우리를 보여줄 수밖에 없어요."(72쪽) 문학을 연장 삼아, 배제하고 왜곡하고 고정관념으로 사람을 대하는 케케묵은 차별 관념과 관행에 균열을 일으키며 변화를 꾀하고 있다(73쪽)는 그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 일은 왜 이리도 즐거운 것일까? 평소 인터뷰를 찾아 읽는 편이다. 누군가 내게 취미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자신 있게 '인터뷰 읽기'라 답할 정도로 좋아한다. (따라서 다른 책들보다 인터뷰집을 조금 더 편애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잡지나 기사, 인터뷰집을 통해 만나는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생각은 자연히 내 세계를 넓힌다. 닿지 못할 지점까지 혹은 닿을 생각조차 없던 지점까지 안내하는 타인의 말들. 그리고 마음들. 은유 작가와 7명의 시 번역가의 말과 마음 역시 그러했다. 무엇보다도 읽는 내내, 사랑과 감탄의 언어를 만끽할 수 있어 기뻤다. 앞으로도 오래 이들과 함께 희박한 아름다움을 좇아 마침내 시에, 문학에 도착하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한결 힘이 난다.


#책속의한줄 🔖

(10p.) 나는 한국 시 번역가들을 인터뷰하면서 사랑과 감탄의 언어를 원 없이 들었다. 스스로 '과몰입 성향'이라고 칭할 만큼 아름다운 걸 볼 자세와 감탄하는 능력을 장착한, "자기 힘에서 멀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눈앞에 존재했다.

(56p.) 모든 게 매끄러우면 다 읽고 하나도 생각이 안 나요. 근데 정보라 작가님 글은 읽다가 '이거 뭐지' 하고 다시 돌아가서 읽게 하는 약간의 저항이 있어요. 비단보다는 울 같은?

(61p.) "견디지 않았어요. 저는 번역을 그만뒀다고 생각했어요. (...) '나는 너희가 필요 없어'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증명했어요. 그때 쌓은 자본과 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매일마다 문학 번역을 그만둘 준비가 돼 있어요."

(85p.) 그런데 내 주변에 여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모두 여성으로부터 오니까. (...) 그러니까 핑계를 댈 수가 없어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엔 없었어, 나는 무지해, 이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호모포비아를 만나면 X같고 인종차별주의자를 만나면 X같지만 여성혐오주의자를 만나면 진짜 X같죠.

(110p.) 글이 늘려면 적절한 비판과 정확한 칭찬이 고루 필요하다. 문제는 내용보다 방식이다. 어떻게 말하느냐. 말하는 사람이 찌르기보다 듣는 사람이 찔려야 한다. 쓴 사람은 그렇게 쓸 수밖에 없어서 쓴 것이고, 글은 금방 바뀌지 않는다.

(111p.) 무언가를 이겨내려면 그 힘은 공동체에서 온다.

(139p.) 재난 이전과 이후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 현실, 구멍 뚫린 사회가 조용히 침몰하는 "죽음의 완만함"이 어쩌면 우리가 겪는 재난이고, 공포이고, 고통인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152p.) 나는 그가 ADHD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용기에 놀랐고, 질병과 함께 차질 없이 일하며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누구를 참조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와 노력에 감탄했다.

(170p.) 자기 인식은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되면 파도처럼 밀려온다.

(194P.) 한국어가 구멍이다. 애초에 있던 구멍을 우 좋게 찾은 게 아니라 그가 미세한 틈을 끈기 있게 파고들어 구멍으로 뚫어냈다. 태아처럼 밀고 나와 온몸으로 만들어낸 다른 세상을 향한 출구.

(246p.) 외국어로 소통하면 배려하는 공간이 넓어요. (...) 친구 사귈 때에 제3언어로 하는 게 제일 편안해요. 중립국에서 만나는 것 같아요. 평화지대.

(247p.) 이런 생각도 했어요. 아기들이 되게 빨리 울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냥 보통 사람들이 길에서 임계점이 지나자마자 울어버리면 어떤 풍경일까?

(248p.) 평생을 언어의 과잉 상태에서 살아가고 공부하던 사람이 언어의 기능이 축소된 상태에서 배우자를 만났고, 언어가 무용한 상태에서 아이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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